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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2136

삼월, 그리고 서설(瑞雪) 3월 내린 상서로운 강설 개학 첫 주, 해마다 되풀이되는 가장 길고 힘든 주일이 계속되고 있다. 수업하고 돌아오면 소소한 일거리가 끊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낯선 아이들은 복도를 지나며 씩씩하게 인사를 해대지만 정작 어느 녀석이 어느 녀석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다. 다시 2학년이다. 나는 잠깐만 망설였다. 이번엔 구체적으로 문과반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과반이 한반 늘면서 문과의 끝 반인 4반을 맡았다. 아이들은 서른셋. 작년의 스물다섯에 비기면 여덟 명이 많을 뿐이지만. 교실이 꽉 찬 느낌이고, 사흘째지만 아이들 얼굴을 익히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이웃 반에는 저희가 중1 때 특별활동을 하면서 얼굴을 익힌 아이가 몇 있지만, 우리 반엔 나와 연이 있는 아이가 전혀 없다. 어저께 아이들 자기소개서를 읽다.. 2021. 3. 5.
‘자유인’으로 첫발 내딛기 퇴직, 자유인으로 출발 어쨌든 2월 한 달은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마다 두서가 없어서 몸과 마음이 두루 어정쩡하고 애매했다. 딱 부러지게 어떻다고 하지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도 못하는 요령부득의 시간이 속절없었다. 3월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새날을 맞을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일요일 오후엔 머리를 깎았고 다음날 아침엔 공중목욕탕을 다녀왔다. 해마다 새 학년도를 앞두고 만날 아이들을 그리면서 준비하던 일상을 나는 자유인으로 맞이할 날에 고스란히 되풀이한 것이다. 금오산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마지막 토요일엔 금오산 어귀를 찾았다. 얼음 사이에서 봄을 부르는 꽃, 흔히들 복수초(福壽草)라 부르는 얼음새꽃을 찾아서였다. 이 꽃을 검색하다가 경북.. 2021. 3. 4.
광고 두 개 교육운동 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패러디 광고’ 대형 입시교육 업체가 지하철 따위에 내건 광고가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 광고의 핵심은 ‘친구(우정)가 공부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다. ‘성적을 위해 친구를 버리라고 부추긴다’라는 지적을 받은 건 당연하다. 이에 교육운동 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이 광고를 비튼 ‘패러디 광고’를 만들었다. 문제 광고의 원문에서 ‘우정’을 ‘성적’이나 ‘공부’로, ‘친구’를 ‘학원가’로, ‘친구’를 ‘어른’ 따위로 바꾼 것이다. ‘아브라카타브라 기적은 반드시 일어나’라는 주문 아래 업체의 광고는 ‘합격 불변의 법칙’을 강조하지만, 패러디는 ‘나는 너의 우정을 믿어’다. 정작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구구절절 옳고 시원하기론 패러디 광고가 그만.. 2021. 3. 3.
[임정답사]충칭의 5년, 화시탄 물결 따라 사랑과 죽음도 흘러가고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⑪] 충칭(重慶)① 토교마을에서의 삶과 토교대(土橋隊) 넷째 날, 오후에 우리는 버스 편으로 마지막 임정 청사가 있었던 충칭 시내로 들어갔다. 해방까지 머문 충칭은 상하이를 빼면 임정이 가장 오랜 기간 주재(駐在)한 도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급박하게 전개되어 간 제2차 세계대전의 추이에 따라 충칭 임시정부도 바빠졌다. 임정은 여기서 광복군을 창군함으로써 비록 소규모지만 직속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항일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교마을에서 시작된 충칭 생활 그로부터 80여 년 뒤, 충칭을 찾은 한국인들이 엄청나게 변모한 이 거대한 도시에서 임정의 자취를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요인과 가족들이 머문 토교마을과 그들이 묻힌 허상산 묘지, 조선의용대.. 2021. 3. 2.
대보름 아침, 책 몇 권 대보름 찰밥과 새로 산 책들 정월 대보름이다. 아침 식탁에 찰밥과 나물이 올랐다. 아내는 찰밥이 제대로 된 것 같지 않다고 투덜댔지만, 나는 대추와 밤까지 넣어 지은 밥 한 그릇을 얌전히 비웠다. 나물은 고사리, 취, 냉이, 시금치 등이었는데 내가 늘 입에 올리는 아주까리 나물이 예전 맛이 아니었다. 나물 맛, 혹은 입맛 잎의 결이 살아 있으면서 담백한 풍미를 가진 게 아주까리 나물인데 어째 식감이 예전 같지 않았다. 너무 삶아 물러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는 입에서 뱅뱅 도는 말을 삼켜버렸다. 아주까리 나물 맛이야 거기가 거길 터, 변한 건 내 입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저께 며칠 전 주문한 책 몇 권을 받았다. 퇴직 신청을 하면서 이제 책 사 읽는 것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2021. 3. 2.
[임정 답사] 임정, 초모 공작으로 광복군 창설작업에 본격 나서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치장(綦江), 광복군의 밑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 셋째 날, 우리는 류저우역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5시간쯤 걸려 쭌이(遵義)에 도착했다. 인구 800만의 이 도시는 1935년 1월, 중국공산당의 장정(長征) 도중 열린 ‘쭌이 회의’로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아 이후 장정을 이끌게 된 곳이다. 중국공산당 권력의 한 축이었던 보구(博古) 등 볼셰비키 그룹은 이 회의에서 패전을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다. 4월 초순 떠나 월말에야 치장에 도착 우리는 쭌이에서 묵고 다음 날 쭌이 회의장을 둘러본 뒤, 바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72굽이 산길’을 돌아 치장으로 내달았다. 류저우를 떠나 치장까지 오는데 이동 시간만 따지면 7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39년 4월 초순, 임정과 식.. 2021. 3. 1.
<친일 인명사전>과 교과서 서울시교육청의 의 관내 중고교 배포 관련 논란 서울시교육청이 관내 중고등학교에 (아래 ) 배포에 나서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14년 말, 서울시의회는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을 보급하기로 하고 예산을 책정했다. 이미 을 보유하고 있는 학교를 뺀 583개 중고교가 배포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당 소속 시의원들까지 동의하여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예산은 1년 넘게 집행되지 못했다. 이른바 ‘보수를 참칭하는 극우세력’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를 넘겨 예산이 불용 처리되게 되자, 서울시교육청은 구입 예산 교부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도 보수 진영에서 딴지를 걸었다. 예산 교부 방침이 알려지자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보수 학부모단체들이 ‘정치 사전’ 운운하며 배포에 제동을 걸었다. 여기에 .. 2021. 3. 1.
‘닭도리탕’과 ‘토시’, 혹은 ‘상식의 허실’ 일본어 논란 낱말 ‘닭도리탕’ 얼마 전, 작가 이외수가 ‘닭도리탕’은 일본식 이름이 아니라는 의견을 트위터에 올려 논란이 되었다. 그는 한 누리꾼의 주장을 좇아 ‘상식의 허실’이라며 이 주장에 동의를 표시한 것이다. 예의 누리꾼이 편 주장의 근거는 “외보도리(오이를 잘게 썰어 소금에 절인 뒤 기름에 볶아 만든 음식)에서 보듯이 ‘도리’는 순수 우리말로 ‘잘라 내다’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일백수 십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유명인사의 의견이니 논란이 아니 될 수 없다. 국립국어원이 공식 트위터를 통해 논란에 대한 의견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닭도리탕’의 ‘도리’가 일본어 ‘とり’에서 온 것이라 보고, 이를 ‘닭볶음탕’으로 다듬었습니다. ‘도리’의 어원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알.. 2021. 2. 27.
그런 ‘애국’은 싫다 타율적으로 강제하여 관철하는 ‘국기 사랑’ ‘애국(愛國)’은 특정 시기, 국가나 민족에 대한 개인의 심리나 태도를 결정짓는 매우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국권 피탈기의 항일 투쟁과 한국전쟁 시기의 전쟁영웅들이 펼친 전설적 무용담의 원천은 다소 성격이 다르긴 하겠지만 ‘애국’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상시에 ‘애국’ 또는 ‘애국심’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나라를 떠나봐야 비로소 ‘애국자’가 된다거나, 국가 대항의 운동경기를 응원하면서 애국과 비슷한 감정을 겪게 되는 게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애국’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살아가는 일만으로도 바쁘고 힘겨운 보통 시민들도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 특히 일본과의 외교 마찰이나, 대미 관계에서의 예속 상황 등을 확인하면서 .. 2021. 2. 27.
그래도 ‘종이신문’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 넘치는 인터넷, 온라인 신문에도 ‘종이 신문’을 포기할 수 없다 매일 새벽에 현관 앞으로 조간신문이 배달된다. 일어나 문을 열고 신문을 들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부모님 슬하를 떠나 객지살이를 시작하면서 시작된 신문 구독은 에서 1988년에 새 신문 로 바뀌었을 뿐 어언 30년이 넘었다. 한때 지역의 지국이 문을 닫으면서 이웃 시군으로부터 우편으로 를 받아 읽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운 좋으면 당일 치 신문을 받을 수 있지만, 운수 사나우면 다음 날 이미 ‘구문(舊聞)’이 된 신문을 받아야 했다. 집배원이 쉬는 일요일에는 신문을 받아 볼 수 없었다. 다음 날 읽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신문 없는 하루를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신문을 받으면 골골샅샅 광고까지 죄다 읽어내던 시절의 얘기다. 신문 없는 .. 2021. 2. 26.
‘삼성’ 앞에 선 ‘진보언론’ 거대재벌 삼성과 가난한 진보 언론 중앙 일간지들의 광고 게재 거부 김용철 변호사가 쓴 신간 광고가 중앙 일간지에 전혀 실리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를 읽고 나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조중동과 매경과 같은 일간지는 물론이거니와 무료신문 조차 광고 게재를 거부하고 있다는 뉴스 앞에서 웃는 것 말고 달리 어떡하겠는가. 이어서 이 삼성그룹을 비판한 ‘김상봉 칼럼’이 부담이 된다면서 이를 지면에 싣지 않았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는 나는 마음이 짠해졌다. 과문하지만, 나는 이나 등의 진보언론들이 처한 어려움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신의 칼럼을 등에 보내면서 밝혔다는 김상봉 교수의 생각에 깊은 신뢰를 느꼈다. 김 교수는 “이번 일을 두고 경향신문을 비난하기보다는 도리어 진정한 독립언론의 길을 걷도록 .. 2021. 2. 25.
김종한, 덧없는 이미지와 서정성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쓴 시인의 낯부끄러운 친일시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쪼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 아즈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전설(傳說)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소리는 흘러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즈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흐르는구료 -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風景)」, 《조선일보》(1937년 1월) 김종한(金鍾漢·月田茂, 1914~1944)의.. 2021.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