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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다시 ‘늦깎이’들을 기다리며

by 낮달2018 2021.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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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 시간에 응답한 늦깎이들의 활동으로 진보는 두터워졌다

▲ 1987년 ‘6월항쟁’의 주력은 청년 학생들이었지만, 그것을 완성한 것은 시민들의 지지였다.

어쩌다가 지역의 전교조 행사나 집회에 가면 낯선 얼굴들이 많다. 공식적인 역할을 떠난 지 십 년이 가까워지진 까닭이다. 그러나 낯선 얼굴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경험은 절대 나쁘지 않다.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조직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40대 초중반의 단단해 뵈는 활동가들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들 가운데엔 20대 후반부터 꾸준하게 일해 온 친구들도 적지 않다. 얼마 전에 만난 한 후배 여교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될 만큼 성큼 자란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막내 시절의 그를 기억하면서 나는 그들을 중견 교사로 길러낸 세월을 생각했다.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가 된 사람들 가운데 소수가 노동조합에 가입한다. 그들 가운데는 제 발로 찾아와 가입하는, 이른바 ‘운동 물’을 먹은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망설임 끝에 활동가들의 권유를 받아 어렵게 가입하는 친구들도 있다.

 

물론 10년도 전의 이야기다. 대학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들은 가입과 동시에 꽤 열심히 활동한다. 조직 활동의 경험이 있으니 적응도 잘하고 자기주장도 강한 편이다. ‘똑똑하고 대가 차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그러다 보니 경력에 비겨 빨리 부서장 등의 역할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참교육 일꾼’이 된 ‘늦깎이’ 교사들

 

반대로 대학 때 학생운동은커녕 시위 한번 참여해 보지 않은 숫보기 교사들 가운데 자기 고민이 있는 친구들이 활동가 주변에 모였다. 이들은 합법화 이전에는 주로 ‘후원회원’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의 외곽을 형성했다. 지역의 노조 사무실에 들어오면서도 쭈뼛쭈뼛 안절부절못하는 이 어리보기 교사들은 그러나 자기 고민을 나누고 대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진성 조합원, ‘참교육 일꾼’으로 성장했다.

 

1989년의 대량 해직 사태와 1999년 합법화를 전후해 조직의 정체기가 있었다. 이때부터 앞서 말한 친구들의 선택도 엇갈리기 시작한다. 초반에 꽤 열심히 일하던 ‘운동권’ 출신의 친구들은 어느 시기부터 잘 보이지 않다가 다른 시군으로 전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는 더는 ‘조합원’이 아니다.

 

회의에 나와서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친구들, 의견을 물으면 ‘뭐, 아는 게 있어야지요.’ 하면서 손사래를 치던 저 숫보기 교사들은 어느 날부터 ‘운동권’이 떠난 자리를 메워낸다. 이른바 ‘맨땅에 헤딩’하듯 조직의 결정을 우직하게 따르면서. 이들은 말하곤 한다. 머리가 안 되니 몸으로 때워야지요.

 

물론 이 두 경우는 일종의 ‘경향성’일 뿐 일반화할 수 있지는 않다. 대체로 교원노조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절대다수는 ‘운동물’과는 거리가 먼 숫보기들이 많았다. 그리고 조직의 부침이나 성쇠와 무관하게 이른바 조직의 ‘깃발’을 지킨 사람들도 역시 이들이다. 이들을 붙잡은 것은 저들의 ‘빠삭한 이론’도 ‘과학적 전망’도 아니고 단지 자신이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었다.

▲ 1989년 전교조 창립 시기에 경찰에 연행되는 교사들. 이들도 대부분 늦깎이였다.

어려운 시절에도 변함없이 깃발을 지켜냈던, 주말마다 되풀이되는 행사와 집회에 개근하던 이들 숫보기 교사들이 전교조의 힘이고 희망이었다. 자신이 받을 불이익보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던 이들 활동가는 뒤늦게 교육운동에 뛰어든 늦깎이들이었다.

 

이들은 조직적 전망을 갖춘 명민한 이론가가 아니라, 조직의 결정을 개인의 안위나 이해보다 우위에 두는 성실하고 우직한 활동가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활동력을 결정 짓는 게 ‘머리’가 아니라 ‘가슴’ , 곧 ‘품성’이란 사실을 확인하면서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되씹곤 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連帶)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중에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늦깎이’의 풀이는 네 가지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승려가 된 사람’이 중심의미고 나머지는 ‘주변 의미’인 셈이다. 우리는 대체로 2와 3의 의미로 이 낱말을 쓴다. 2가 중심의미에 더 가까운 말이라면 3은 ‘깎다’의 뜻을 ‘깨달음’으로 넓힌 말이라 할 수 있다.

 

늦깎이는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현실과 그 모순을 깨닫고 배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뒤늦은 참여나 결정에 대한 책임을 역시 몸으로 다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쉽게 변하지 않고 진국으로 자신의 선택을 지켜나가는 까닭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래서는 안 된”, 역사를 바꾼 ‘늦깎이’의 힘

 

월간 <작은책>의 강연(2010년 7월)에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가 한 얘기도 같은 의미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 밝히고 진보적인 활동을 벌여온 이 학계 원로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오롯이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늦깎이’의 힘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저더러 운동에 늦게 입문한 늦깎이라고 얘기하는데, 늦깎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세상살이를 다 겪고 나서 늦게 깨달았으니까요. 오히려 젊었을 때부터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해까닥 변하는 걸 너무 많이 봤습니다.”
     - 오세철 교수 강연 <늦깎이는 변하지 않는다> 중에서

 

우리 사회에 늦깎이라 이름 붙일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뒤늦게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던 통일 늦깎이 문익환 목사는 그 이전과는 다른 통일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고, 역사의 고비마다 변화의 실마리를 푼 이들 역시 무명의 ‘늦깎이’들이었다. [시 전문 읽기]

김광규의 ‘늦깎이’는 그런 ‘뒤늦은 깨달음과 깨우침’을 노래한 시다. 형제로 태어나도 ‘장군’과 ‘사병’으로 갈리고, 남매 사이도 ‘회장댁 사모님’과 ‘근로자’로 나뉜다. 역시 ‘인생은 때로 그런 것’이고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형제 남매의 갈리는 삶은 ‘동포’로 확대되면서 ‘더러는’ ‘관리’와 ‘월급쟁이’와 ‘아주머니’로 갈리고 또 ‘더러는 우리 손으로 지은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야 화자는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언제나 달라지며 그대로 있는/역사는 어차피 이긴 사람의 편’이라는 걸. 그를 달라지게 하는 것은 ‘그러나 진 쪽의 수효는 항상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이대로 끝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의 ‘생각’이 ‘몸’으로 이어지면서 비로소 역사 발전의 물꼬가 트였다. 독재를 무너뜨린 혁명과 항쟁의 기억 그 깊숙한 곳에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한 늦깎이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깨어 있는 시민’, 혹은 늦깎이들

 

2008년을 달군 촛불시위도 평범한 시민과 주부들의 ‘이래서는 안 되겠다’라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때 서울 도심을 가득 메운 사람들 역시 늦깎이들이었던 셈이다. 지난해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달려간 수백 대의 ‘희망 버스’ 역시, 노동자들의 해고와 절망이 ‘나의 것’일 수도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의 결과라고 보아도 무방할 터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깨어 있는 시민’이 곧 사회와 삶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늦깎이들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역사의 물길을 돌린 것은 이들 깨어 있는 시민, 늦깎이들의 향배였다. 2012년 대선으로 우리 역사는 또 한고비를 넘겼다. 2013년 새로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나는 자신의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깨달은 시민들, 그 ‘늦깎이’들이 그려나갈 세상을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2013. 1.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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