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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동행(同行)

by 낮달2018 2021.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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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20년 전의 제자들

▲ 1984년 봄 소풍. 흥덕왕릉이었나, 사진이 바랜 만큼 세월과 기억도 바랬다.

공교롭게도, 하기야 이 세상에 공교롭지 않은 일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꼭 한 달 만에 두 명의 옛 제자를 만났다. 이미 불혹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이자 지어미인 여제자를 만난 감회는 남다르다. 과장해 말하면, 내 ‘과거’가 그들의 ‘현재’에 맞닿아 있으니 말이다.

 

두 아이는 내가 초임으로 근무했던 경주지방의 한 여학교에서 내리 세 해를 내게서 국어와 문학을 배웠던 소녀들(!)이었다. 신입생과 초임 교사로 만나 졸업할 때까지 담임으로, 담당 교사로 만났으니, 그 인연의 무게가 만만찮은 셈이다. 그 시절의 갈피마다 서린 내 열정과 과잉의 의욕, 숱한 오류와 실패와 잘못을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러나, 따뜻하게 떠올린다.

 

스물아홉의 혈기방장한 청년이 열일곱 소녀를 만났다면 그들이 만들어 내는 교감의 모습이 어떠하리라는 건 미루어 상상할 수 있겠다. 나는 아마 필요 이상으로 의연하고 냉정한 척, 아이들을 바라보려 애썼고, 그래서 정작 넉넉하게 그들의 고민과 아픔 따위를 헤아릴 수 있는 여유를 갖지는 못했던 것 같다.

▲ 졸업 앨범에 실린 우리 반 수업 광경. 그때만 해도 사진첩도 흑백이었다.

그런데도 그 아이들은 나를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스승으로 깍듯이 예우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미고 가꾸는 꿈을 얼마만큼이나 북돋우고 어루만져 주었던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졸업한 이듬해, 나는 그 여학교를 떠나 고향 인근의 남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대학으로, 일터로 떠난 그 애들이 어른이 되고, 한 지아비의 지어미로, 아이들의 어머니로 성장해 가는 동안 나도 꽤 곡절 많은 삶의 과정을 겪었다. 새로 옮긴 학교에서 이태를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야 했고, 이후 5년여의 공백을 거쳐 경북 북부 지역의 시골 학교에 복직하기까지 고단한 행로 곳곳에서 만난 그 아이들의 격려와 사랑을 잊을 수 없다.

 

2000년도를 지나면서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것을 저마다의 삶이 갖는 무게로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따로 연락할 만한 수단을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을 뿐. 소식 두절의 사연은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굽이[曲]를 갖고 있는가.

 

지난 7월 18일, 안동에서 한 제자를, 8월 18일에는 친구의 문병 차 들른 밀양, 비 오는 밀양 강변에서 또 한 제자를 만났다. 앞의 친구는 연락을 받고서, 뒤의 친구는 내가 연락해서였다. 우리는 반가이 손을 마주 잡았고, 마치 며칠 만에 만난 이웃처럼 차분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10년이나 15년 만의 상봉에 어울리는 과장된 목소리도, 몸짓도 전혀 없었던 그 만남의 시간 동안, 우리는 격의 없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무명의 삶이 가진 결이란 언제나 그만그만한 것, 우리는 함께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각각의 삶이 교직(交織)해 내는 여러 빛깔의 무늬들이 몇 개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고 있었다.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여기에다 어찌 다 이를 수 있겠는가.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서 우리는 삶이, 그것들이 빚어내는 기쁨과 슬픔의 얼굴을 나누면서 스승과 제자의 지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등해졌다. 추억은 언제나 고통과 슬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시간을 뛰어넘어 그것을 공유한 사람을 동등한 시선과 눈높이로 사로잡아 버린다.

 

두 아이와 나는 그저 평범한 작별 인사로 헤어졌다. 따로 만날 날이나 안부 통화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돌이켜보건대, 그들은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의연했고, 의젓했고, 당당하였다. 간간이 짓는 엷은 미소와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심한 듯한 눈길 속에 삶에 대한 이해와 너그러움이 따스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겪고 돌아온 누이의 초상을 느끼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조금씩 퇴행하고 늙어가지만, 그렇게 잃는 만큼 슬기로워짐이 우리를 위무하는 게라고 나는 말했고,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아니다. 늙어가는 만큼만 슬기로워질 수 있다면 이 나이 듦은 축복이 될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편이 정직하겠다. 두 아이를 만나고 나서 나는 얼마쯤 젊어졌을지도 모르겠다.

 

 

2005. 8. 21. 낮달


* 실명을 쓴들 무엇이 어떠랴만, 나는 ‘두 아이’로 그들을 표현했다. 삶 앞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어찌 그들뿐이랴. 눈 맑고 밝은 이 땅의 여인들이 모두 그들일 터이다. 한 아이는 ‘정영’이고, 다른 아이는 ‘양순’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겹고 낯익은 이름처럼 ‘당차고,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연찮게 시작한 얘기로 몇몇 이웃들에게 꼼짝없이 ‘로맨티시스트’로 공인(?)을 받았다. 이태 전에 옛 제자들을 만나고 쓴 글인데, 새로 읽으니까 좀 덜 떨어진 ‘로맨티시스트’ 대접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첩을 뒤졌더니 몇 장의 사진이 나왔다. 1985년의 사진은 없었다. 공연히 그 일 년이 잃어버린 시간 같기도 해 허전해진다. 나는 인물 사진은 잘 쓰지 않는 편이다. 대체로 이 공간이 사적 기록이긴 하지만,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없어서다. 다른 사람 사진 쓰는 건 더 부담이 크다.

 

옛 사진이긴 하지만, 허락 없이 올리는 걸 저 친구들은 너그러이 받아들이리라 믿는다. 바랜 사진을 스캔해 올리는데 20년이 넘었는데도 거기 선 아이들의 이름이 입안에서 뱅뱅 돈다. 한 해만 지나면 작년에 가르쳤던 녀석들 이름을 거짓말같이 잊어버리고 마는 때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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