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경북의 ‘샤이(shy) 박근혜’
“어쨌든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주권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가져온 것은 틀림없어.”
얼마 전, 누나와 형 등 우리 동기간 만남에서 정치 현안이 화제가 되었을 때 내가 거듭한 얘기다. 실제로 나는 ‘주권자’ 앞에다 우리가 사는 ‘영남’이나 ‘대구·경북’을 끼워 넣고 싶었지만, 속내가 너무 드러나는 것 같아서 자제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이 국정농단 사태 이후 대구에서 밝혀진 촛불의 규모는 우리가 기왕에 지니고 있었던 이 지역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선입견을 뒤바꿀 만한 것이었다. 전국적 파장을 지닌 의제라도 고작 일이백 명이 고작이었던 집회의 규모가 천이 되고, 만이 되는 걸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4남매의 엇갈린 선택, 혹은 TK의 ‘샤이 박근혜’
물론 나는 그게 이 지역 사람들의 일반적인 변화라고 볼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대세를 침묵으로 긍정할 뿐,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숨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 때인가부터 ‘박근혜가 안됐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런 숨겨진 정서의 노출이었다.
그러나 2박 3일간 이어진 이 만남을 끝내면서 나는 내 생각을 상당 부분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샤이 트럼프(Shy Trump)’ 못지않은 ‘샤이 박근혜’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많고 촘촘하게 이 지역의 정서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찍 세상을 버린 맏형님 아래 일흔이 넘은 누님이 둘, 세 살 터울의 작은형과 나까지 4남매가 대구의 큰누님 댁에 모인 것은 지지난 주말이었다. 1년 8개월 동안 자전거를 타고 아시아,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온 작은형을 만나는 자리였다. 시댁의 상사 때문에 포항에 왔던 수원의 작은누나도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동생들을 만난 큰누나는 물론이고 모두에게 반갑고 정겨운 만남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부터 시작된 음주 방담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흩어져 살긴 하지만 누나와 남동생들이 만나 밤새며 할 얘기가 무궁무진한 것은 아니니 자연스레 시사나 정치 문제가 화제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참, 나라 꼬라지(꼬락서니) 우습게 됐지. 박근혜 때문에.”
“그러게, 말이야.”
현실의 ‘추인’으로 시작된 출발은 순조로웠다. 진보 성향의 형은 말할 것도 없고, 수도권에서 살면서 어느새 야성이 몸에 익은 작은누나는 물론, 대구를 떠나본 적이 없는 티케이(TK) 본류였던 큰누나까지도 그런 현실을 일단은 받아들인 것이다.
편한 동기간이었으니 거리낌 없이 마구 내뱉는 우리의 말투가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나 큰누나는 가끔씩,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 일방적으로 욕만 할 일은 아니라며 정색을 하기도 했지만, 마무리는 늘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했던 두서없는 방담에서 나는 잠깐 멈칫했던 것 같다. 유력한 대선 주자를 일러 ‘북에다 몽땅 다 줄 것’이라 단정한 매형이나 우리의 화제에 끼어 조금 다른 결을 선보였던 누나의 사위, 그러니까 생질서(甥姪壻)의 속내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앓고 있는 고종형의 병문안을 갔다가 우리 집에 와 이어진 후반전에 기어코 사달이 났다. 우리는 주변의 보수적 이웃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극우적 태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논리에서 비롯되는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란 ‘묻지 마 지지’에 포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따위를 말이다.
그러자,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을 생각해 간밤에는 마음을 삭였던 큰누나의 인내가 폭발한 것이었다.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떻게 줄곧 남 욕만 하고 있나, 불편한 사람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냐……. 내가 중간에 얼버무려서 고비는 넘겼지만 몇 해 만에 만난 동기간끼리 낯을 붉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에 빠져야 했다. 형과 작은누나는 큰누나의 분노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나는 되레 우리가 같은 이유로 공격을 받는 쪽이라면 어떠했겠느냐고 말해 두 사람을 달래고 말았다. 그러면서 나는 여전히 우리 지역의 정치적 정서가 쉽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예감에 등허리가 서늘해져 왔다.
이웃들 가운데 극심한 보수편향을 보이는 이들의 논리는 사실 ‘논리’라고 할 수도 없다. 이들은 한 번만 더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게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걸 천연덕스럽게 진실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요지부동이어서 정반대의 논리 앞에서는 오히려 강화될 뿐이다.
이들은 아직도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를 ‘유언비어’ 때문이고, 특정 대선주자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를 김정은에게 팔아먹는다’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이 주로 뉴스도 제대로 보지 않는 노인 등 소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지(무식)는 죄악이야. 그게 이 멀쩡한 21세기를 70년대로 되돌려 놨거든.”
우리 역시 별로 다르진 않지만,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리고 거기 기반한 정치적 입장이 특정 세력과 인물에 대한 맹목적 지지로 이어지고, 그것이 오늘의 엽기적 정치 상황을 배태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나는 이들이 보여주는 정서가 소수의 것이 아니라 이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화된 정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의 편견처럼 학력이 낮거나 소득이 적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에는 공무원도 있고, 자영업자, 기업인도 있으며, 유명 학원 강사도, 대학교수들도 있었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우 편향은 그들을 티케이로 묶는 공통분모였다. 생각의 바탕은 비슷했고 다른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정치적 ‘입장’ 따라 왜곡되는 공감 능력
이번 국정농단 사태 말고도 이들의 정서와 심리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세월호에 대한 인식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 1천일이 지났지만 진실 규명은커녕 실종자 수습조차 끝내지 못한 상황과 정부가 노골적으로 벌였던 방해와 유족들에 대한 폄훼 따위에 이들은 눈을 감는다.
대신 그 슬픔이 불러오는 ‘사회적 피로’를 이야기하고, 유족들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그들이 받게 될 보상을 질시하는 모순적 태도로 보여준다. 부모로서 유족들이 겪는 슬픔에는 눈을 감으며 그들의 과도한 요구와 불신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박근혜 책임론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월호 유족들이 지나친 혜택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온건한 어조지만 생질서의 이 반문 속엔 정부 여당이 지난 시간 동안 유족들에게 집요하게 내어 온 흠집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게 드러난다. 박근혜 정부는 참사의 진실 규명을 원하는 유족들을, 과도한 배상과 요구로 일관하는 이들로 몰아온 것이었다.
이들의 공감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모자라거나 뒤떨어질 리는 없다. 죽음을, 그것도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버이의 마음은 이들에게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세월호의 슬픔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태도엔 찬바람이 이는 것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치를 떠는, 국가를 측근들의 영리 기업처럼 운영한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판하기보다는 그가 온 국민의 지탄받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불쌍하다’, ‘안됐다’라 여기는 심리의 근저에는 비판 세력들의 공격이 과도하고 부당하다는 믿음과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자리 잡고 있다.
거듭 확인하건대 인간의 공감 능력은 보편적인 정서에서 비롯한다. 우편향에 선 이들의 공감 능력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학습된 애증의 결과로 말미암은 정치적 파당성이 이런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왜곡하는 것이다.
물론 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들과 반대편에 선 촛불 시민들도 특별히 공감 능력이 더 많거나 부족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가짜로 들통 난 권력에 대해 느끼는 연민은 촛불 시민들이 세월호 희생자에게 느끼는 애틋함과 방향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말이다. 무엇이 이 평범한 시민들의 감정을 극과 극으로 나누었을까.
‘정치적 믿음’에 대한 신경학
최근 미국에서 보고된 ‘뇌 이미지 연구’가 이에 대한 신경학적 설명이 될 수 있겠다. 이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정치적 믿음에 도전하면 개인 정체성과 위협에 대한 감정적 반응과 관련된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한다.[관련 기사 : 왜 사람들은 정치적 믿음이 도전을 받으면 마음을 닫아버릴까?]
“뇌에서 경보가 울리고, 사람은 아주 깊은 개인적, 정신적 수준에서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마음을 닫아버리고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그 어떤 논리적 증거도 무시한다. 이런 증거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킬 뿐이다.”
“정치적 믿음은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압도적인 반대 증거가 있어도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두둔하곤 한다.”
“정치적 믿음은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적 집단에 중요하다는 점에서 종교적 믿음과 비슷하다.”
“우리가 깊이 간직한 믿음에 대한 반대 주장을 대했을 때 기분이 상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합리화하거나, 증거나 증거의 출처를 무시하거나, 우리의 주장을 강화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없앤다.”
- 이상, 위 ‘기사’에서 인용
단지 다르게 학습되고 고착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는 극단으로 갈렸다. 이 서로 다른 인식과 태도가 그들의 선악 구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입장은 격렬하게 부딪치고 그 파열음은 우리 사회의 통합에 치명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
‘가짜 대통령’과 ‘대한민국 며느리 박근혜가 울고 있다’ 사이
‘박근혜 퇴진 대구 시민행동’은 오늘(1월 21일) 대구 시내의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에 ‘가짜 대통령 생가터’라는 표지판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대회’에선 대통령이 대관절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강변하면서 “대한민국 며느리 박근혜가 울고 있다”고 개탄한다.
두 입장 사이의 괴리는 너무 멀고도 깊다. 이 화해할 수 없는 균열 속에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고, 그 결과에 따라 대선이 치러지고 새로운 권력이 선출될 것이다. 누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꾸려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길이 절대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도 전국에서,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을 기각한 법원의 판단에 분노하고, 8주기 용산참사를 추모하고자 모인 수십만 시민들이 밝힌 촛불이 영하의 벽두를 수놓았다.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자는 노란 리본의 물결도 넘실댔다.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가는 촛불 시민의 몫만이 아니다. 그것은 탄핵에 반대하면서 태극기를 들고 모인 시민들, 이른바 ‘샤이 박근혜’에게도 똑같은 무게로 지워진 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2017. 1.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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