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남부지방의 ‘수금포’(삽)는 네덜란드어 스콥(schop)이 어원
정진규·정희성, 두 시인의 ‘삽’
문태준이 엮고 잠산이 그린 <애송시 100편 - 어는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를 뒤적이다가 정진규(1939~ ) 시인의 시 「삽」을 발견한다. 시는 ‘삽’이란 ‘발성’이 좋다는 시인의 탄성으로 시작한다. ‘땅을 여는 연장인데’도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소리를 거두어들인다’ 함은 받침인 ‘ㅂ’ 소리가 ‘끝이 닫히는 소리’라는 말이겠다.
시인은 두 번 그 삽을 쓰겠다고 말한다. 한번은 ‘너를 파고자’, 또 한번은 ‘내 무덤’을 짓고자.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거두어들일 때 쓰겠다는 부분이 서늘하게 마음에 닿아온다. 그렇다. 죽음은 그렇게 한 ‘삽’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지. 문득 마음 한쪽에 ‘마른 볏짚’으로 삽자루를 문지르는 농부의 실루엣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삽은 괭이나 호미처럼 농민들의 삶의 일부다. 삽은 ‘일구고 파고 치’는 데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농기구다. 비슷한 기능의 오래된 농기구로 가래가 있지만,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삽을 쓴다. 집마다 끝이 뾰족하거나 각진 모양의 삽 하나쯤은 걸려 있게 마련인 것이다.
삽은 노동자들에게도 고단한 삶의 표상이다.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바로 그런 노동자의 삶을 노래했다. 80년대 노동시보다 한 세대 앞선 시다. 흘러가는 것이 어찌 강물뿐이랴.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강변에서 삽을 씻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쓸쓸한 사나이의 삶도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흐르는 물에 삽을 씻’는 것은 신성한 노동을 준비하는 ‘제의적 행위’다. 동시에 그것은 삶의 청정을 지향하는 성찰의 몸짓이기도 하다. 저무는 시간과 삶, 그는 삽을 씻으면서 ‘슬픔도 퍼다 버린다’. 노동의 삶에 깃들인 슬픔을 씻어 내는 ‘정화(淨化)’다. 시인은 현실의 분노와 고통을 ‘삽을 씻는 행위’를 통해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전편에 반복되는 시구 ‘우리가 저와 같아서’는 화자의 삶이 우리의 삶과 속절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환기해 준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절규하는 대신 절제된 화자의 목소리는 현실을 담담하게 그리며 삶의 궁극적 가치를 묻고 있다. 더러는, 거기서 모순된 현실 앞의 무력감과 비애를 읽어내기도 하지만.
schop > 스콤푸 > ‘수굼포’
내 고향인 경북 남부지방에서는 ‘삽’을 ‘수금포’로 불렀다. 나중에 경북 북부지방에 와 살게 되면서 안동 인근 지역에서는 이 말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금포’의 어원은 몇 가지 설이 있다. 삽이 처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었을 때의 상표 이름이라는 ‘수건표’ 설과 영어 ‘스쿱(scoop)’에서 왔다는 설과 네덜란드어 스콥(schop)이 어원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수건표’ 설은 삽자루 아래에 붙은 타원형 상표를 주목한다. 이 상표의 그림에 밀짚모자를 쓴 농부가 수건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있다는 것인데, 이 ‘수건표’ 삽이 당시에 가장 좋은 삽이었다는 것이다. ‘수건표’가 와전되면서 ‘수금포’가 되었다는 이 설은 그럴듯하긴 하지만 민간어원설에 가깝지 않나 싶다.
제각각 영어 스쿱(scoop, 국자)과 네덜란드어 스콥(schop, 삽)이 일본을 거쳐 변형되면서 수금포가 되었다는데 이 두 설 가운데서 훨씬 설득력이 있는 설이 ‘스콥’ 설이다. ‘국자’가 ‘삽’이 되는 것은 좀 엉뚱해 보이니 말이다.
서구의 개화 문물은 대부분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일본이 개항 이전부터 교류해 왔던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컵’을 가리키는 ‘고뿌’가 컵을 뜻하는 네덜란드말 ‘kop’을 일본어식으로 읽은 ‘콧뿌’를 빌려 쓴 말인 것처럼 ‘수금포’는 네덜란드어 스콥(schop)에서 일본어 ‘스콤푸’를 거쳐 ‘수굼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죽 ‘수금포’라 써 왔지만, 사실은 ‘수굼포’로 쓰는 게 맞는 셈이다.
이 말은 일본어 ‘스콤푸’에서 온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네덜란드어로 ‘삽’을 뜻하는 ‘스콥(schop)’에서 차용한 말입니다.
- 한국어원학회
4대강과 ‘삽질’
삽은 농부는 물론이거니와 막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없어서는 아니 되는 연장이다. 그래서인가, ‘삽’은 어느 날부터 ‘개발’을 상징하는 낱말로 쓰이기 시작한다. 공사를 시작하는 것을 일러 ‘첫 삽을 뜨다’라는 식의 관용구가 만들어진 것이 그 좋은 예다.
삽이 접미사 ‘-질’을 만나서 ‘삽질’이 된다. ‘-질’은 “(도구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 도구를 가지고 하는 일’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요즘 매우 의미심장한 비유로 쓰이곤 하는 ‘삽질’의 뜻은 두 가지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다.
이명박 정부 들면서 곳곳에 ‘삽질’이 계속되고 있다. 멀쩡한 강을 파헤치는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뭉뚱그려 ‘삽질’이라 하고, 거기 쓰이는 이 요긴한 연장 ‘삽 한 자루’는 권력의 마인드에 대한 비유어로도 쓰인다. 한편으로 ‘삽’과 ‘삽질’은 7·80년대의 개발과 토목건설 패러다임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진규·정희성, 두 시인의 시를 거듭 읽는데 객쩍은 의문 하나가 고개를 치켜든다.
사람들은 ‘4대강’에 행해지고 있는 삽질을
①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떠내는 일,
② 별 성과가 없이 삽으로 땅만 힘들게 팠다는 데서 나온 말로, 헛된 일을 하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
가운데 어느 것으로 이해할까.
2010. 2.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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