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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 톺아보기 ㉕] 복원한 읍성으로 쪼그라든 선산이 새로워졌다

by 낮달2018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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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읍성(邑城) 낙남루(洛南樓)와 죽림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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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 토성으로 쌓았던 선산읍성은 조선시대에 석성이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다. 현재의 읍성은 2011년 복원했다.

구미 시내에서 고아읍을 거쳐 916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면 선산읍 어귀인 동부리 1호 광장 사거리에 이른다. 이 네거리에 복원한 옛 선산 읍성(邑城)의 남문과 문루인 낙남루(洛南樓)가 있다. 구미시에서 2002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11년에 완공하였다.

2011년 복원한 선산읍성 남문(낙남루)

선산 읍성의 남문은 조선시대 선산 도호부와 선산군의 관문이었다. 선산 읍성은 고려 말 토성으로 쌓았다가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의 기록에 “선산 부사 조두수가 석축을 하였는데 둘레가 1천4백48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동서남북 4문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 후 “1790~1793년께 부사 박수원이 남문루를 중수하고 단청하였다. 또 1808~1811년에 부사 이재항이 남문루를 수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읍성이 그랬듯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물어졌다.

▲ 옆에서 바라본 선산읍성 남문(낙남루). 문루인 낙남루 양쪽에 총안을 둔 성벽이 있다.
▲ 안쪽에서 바라본 선산읍성 남문(낙남루). 문 안의 천장에는 '주작'인 듯한 동물을 그려놓았다.

읍성은 “지방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서 쌓은 성.”(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하 같음)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 구별된다. 중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읍성이 축조되었으나 우리나라에 읍성이 나타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 읍성의 역사

고조선의 경우 도성인 왕검성(王儉城) 이외에 다른 읍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평안도·황해도 지역에는 낙랑과 대방군 치소(治所)에 토성이 남아 있다. 이 시기에는 현(縣)에도 작은 읍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이들은 관청건물과 지배층이 사는 일부 지역을 토루(土壘)로 둘러싸고 있으며,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지방의 주요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에 쌓았던 산성과 같이 있었던 흔적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이 시기 읍성의 형태와 지형 조건은 확실하지 않으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지방 도시에 축조된 읍성은 조선왕조에 이어졌다. 세종 때부터는 삼남(경상·전라·충청) 지방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의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개축되었다. 이때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을 높이면서 옹성(甕城 : 문의 양쪽에 쌓아 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비하는 것)과 치성(雉城 : 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싹 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해자(垓字 : 성벽의 둘레에 도랑을 판 것)를 시설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 현존 읍성들. 원형이 남은 것은 소수고, 대부분 뒤에 복원한 것들이다.
▲ 성곽의 방어 시설인 옹성과 치성, 그리고 해자. 옹성과 치성은 흔하지만, 해자는 복원한 월성 외에 드물다.

또, 지방 수령들에게는 근무 기간의 지침으로 성을 보수하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또한, 읍성을 쌓고 나서 5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를 삼고, 견고히 쌓으면 상을 준다는 규정도 있었다. 요컨대, 지방 수령에게는 읍성을 견고히 유지하는 임무가 주어졌다는 거다.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정조 때 축조된 화성(華城)이 대표적이며, 이밖에 동래읍성·해미읍성·비인읍성·남포읍성·홍주성·보령읍성·남원읍성·고창읍성(일명 모양성)·흥덕읍성·낙안읍성·진도읍성·경주읍성·진주읍성(일명 촉석성)·언양읍성·거제읍성 등이 있다. [관련 글 : 그냥 한번 와 봤는데진주 시민들이 진심 부럽습니다]

1910년 일제의 읍성철거령으로 사라진 읍성들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06년 경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대구읍성을 철거한 뒤, 1910년 일제가 읍성 철거령을 내려 대부분 읍성이 헐렸다. 일제는 겉으로는 도시 발전과 도로 건설을 명분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장애가 될 만한 방어거점을 무력화하면서 동시에 각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읍성을 없애 정신적 구심을 제거한 것이다.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 남은 읍성은 전북 고창읍성,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정도에 그치는 이유다. 지역의 생활 중심지에 있었던 읍성들은 도시 개발에 따라 성곽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예가 많고, 그나마 남은 예도 성문이나 성벽 일부 구간 정도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읍성이 관광자원이라고 보고 일부 구간을 복원하거나 남은 성벽을 활용하여 공원으로 꾸민 데가 많다.

▲ 선산읍성 남문 앞. 원래 오른쪽에는 비석들을 모아놓았는데, 지금은 영남유교문화진흥원으로 옮겼다.
▲ 선산읍성 남문의 문루인 낙남루. 지붕의 추녀마루에 잡상(장식기와인 흙 인형)을 올려두었다.

선산의 진산인 비봉산(532.1m) 능선에는 성벽이 남아 있으나 평지에는 성벽의 흔적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비봉산성과 읍성의 관련성을 유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읍성(邑城) 조’에 “고려 후기에 이득진이 쌓았는데, 토축(土築)으로 둘레가 2,740자이고, 내부는 9천(泉) 3지(池)로 퇴락한 지 오래이며, 조선 중반기에는 남서로 두 개의 문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는데, 현재는 능선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읍성 주변 죽림사지 삼층석탑, 동학 빗돌

결국 순전히 기록에 따라 복원하였으니 읍성도 남문의 모습도 추정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정면 누각 좌우에 몇 개의 총안(銃眼)이 있을 뿐, 성벽도 따로 갖추지 않았다. 그러나 한적한 소읍, 밋밋한 풍경 가운데 우뚝 선 낙남루의 모습은 점점 쪼그라드는 소읍 선산을 그나마 새롭게 해주는 건물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2016년에는 낙남루에 엘이디(LED) 야간조명까지 설치하여 한밤을 밝혀주고 있다.

길 건너 시장 쪽 군민헌장비가 있는 소공원에 죽림사지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있다. 죽림사(竹林寺)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9 ‘선산도호부 불우(佛宇:불당)조’에 ‘죽림사 구재비봉산(竹林寺 俱在飛鳳山)’이라 기록된, 교리 향교 뒤쪽 비봉산 중턱에 있었던 거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다.

죽림사지 삼층석탑은 1969년, 죽림사 옛터에 오래전부터 무너져 있던 탑의 부재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삼층 몸돌과 지붕돌은 새로 만들었는데 너무 작아서 전체 체감률과 비례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냥 스쳐 지나가기엔 아쉬워 눈길이 머물게 된다.

▲ 선산읍성 옆 소공원에 복원해 놓은 죽림사지 삼층석탑. 3층 몸돌과 지붕돌은 새로 만든 것으로 비례에 맞지 않다.
▲ 죽림사지 삼층석탑 옆 잔디밭에 세워진 동학 갑오농민전쟁 창의 비 등 비석들.

석탑 옆 잔디밭에 웬 빗돌이 여럿 서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선산 갑오 동학농민전쟁 전투지’ 안내비 옆으로 차례로 ‘갑오 전쟁 선산 창의(倡義)’, ‘선산 을미의병 효시지(梟示址)’, 동학의 선산 읍성 전투를 노래한 김용락의 시, ‘영남 의병장’ 비 등이다. [관련 자료(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바로가기]

1970년대 초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구미읍이었다. 구미가 시로 승격된 것은 1978년이었고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이다. ‘선산군 구미읍’이었던 시절이 옛말이 되면서 ‘선산(善山)’은 ‘구미시’의 조그만 소읍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고인이 된 전국농민회 윤정석 의장이 그랬던 것처럼, 구미가 아니라 ‘선산’이 이 지역의 본이름이다. 내가 굳이 ‘선산(구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꼭지를 쓰고 있는 이유다. 선산은 지금은 사라진 유명한 ‘선산약주(藥酒)’의 고향이고, 선산 김씨의 관향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2일 7일에 서는 선산 오일장을 찾곤 한다. 선산은 도시인 구미에 없는 어떤 ‘원형과 본질’을 갖추고 있다고 우정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3. 2.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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