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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그냥 한번 와 봤는데…진주 시민들이 진심 부럽습니다

by 낮달2018 2021.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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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연속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된 역사와 휴식 공간, 진주성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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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에서 만난 만추의 향기는 강렬했다 . 진주에 온 김에 둘러본 풍경이었는데 우리는 진주성에 홀딱 빠졌다.

[이전 기사] 절정 직전의 ‘피아골 단풍’, 그 자체로 완벽한 풍경

 

피아골 단풍을 둘러보고 우리는 하동 최참판댁을 거쳐 진주로 달려와 한 호텔에서 묵었다. 숙소를 진주에 마련했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떠올린 건 진주성(晉州城)이었다. 남강 옆의 그 성, 한쪽에 촉석루와 논개가 몸을 던진 의암이 있는 이 성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여겨서다.

 

진주행 체면치레로 들른 진주성의 ‘반전’

 

처음 진주성을 찾은 건 1988년 지리산 산행에서 돌아오면서였다. 학교를 옮기고, 고2 사내아이를 가르치던 땐데, 여름방학을 맞아 가르치던 학생 둘과 함께 지리산에 올랐다. 첫날은 지리산에서 이튿날은 화엄사 앞에서 야영하고, 사흘째 되던 날 하동 평사리를 거쳐 우리는 진주에 들렀었다.

 

버스로 찾은 진주성, 촉석루 앞에 배낭을 부리고 쉬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새 30년이 흘러서 그때의 까까머리 녀석들은 올해 쉰하나의 중년이 되었다. 십수 년 전에도 아내와 함께 진주성에 들렀는데, 이때의 기억은 더 희미하다. 촉석루 근처에 왔다는 것만 명료할 뿐, 나머지 기억은 죄다 비어 있다.

▲ 진주성의 성벽 둘레길 . 단풍과 대숲이 잘 어울린 호젓한 길을 거니는 시민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
▲ 진주성 성벽으로 가는 길, 저 멀리 북장대가 보인다 . 장대는 성벽의 곳곳에 비치한 장수들의 지휘대다 .

남강을 끼고 있는 진주성은 둘레가 외성은 4km, 내성은 1.7km에 이르는 석성이다.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임란 뒤에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고, 광해군 때 11개의 포루를 설치했다. 진주성은 강제 병합 이후 원형이 훼손되어 내·외성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1983년 복원 정비 이후다.

 

오직 잠을 자려고 찾았다고 하면 진주에 미안한 일, 진주성을 한 바퀴 둘러보는 거로 체면치레를 할 생각이었다. 매표소가 있는 성의 북문인 공북문(拱北門)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에 입장했을 때까지도 나는 진주성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곱게 물든 나무들 사이에 동상 한 기가 서 있었다. 진주대첩의 주역인 김시민(1554~1592) 장군이다. 1592년 11월 7일 왜군 3만 명이 성을 포위하자, 장군은 3800여 명의 관군과 백성들을 이끌고 응전하였다.

▲ 임란 중 한산, 행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인 진주대첩(1592)의 주역 김시민 장군 동상. 그는 왜적을 물리쳤지만,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 2차 진주성 전투로 산화한 7만 순국 선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 진주 창열사(彰烈祠). 주변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슬펐다.
▲ 서장대. 성 서쪽의 장수 지휘대다. 왼쪽 아래에 남강이 흐르고 있다 .

조선 관군은 화차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로 맞선 가운데, 성 밖에서는 곽재우와 최경회의 의병이 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왜군은 결국 이레 만인 11월 13일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호남에 진출하려던 왜군의 계획을 꺾은 이 1차 진주성 전투가 한산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을 이루는 진주대첩이다.

 

진주대첩과 2차 진주성 전투로 죽어간 7만 원혼

 

그러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진주목사 김시민은 11월 12일 왜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다음날 왜군은 퇴각했지만, 그는 11월 21일, 39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 ‘충무’가 내려졌다.

 

그가 죽음으로 지킨 진주성은 그러나, 이듬해 7월 이레간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10만 왜군에 무너졌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7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때 산화한 순국 선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성안에 있는 진주 창열사(彰烈祠)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의 영욕을 감당해야 했던 아픈 한국사다. 성 함락 한 달 뒤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일 때 주논개(朱論介, 1574~1593)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뒷날 그의 애국충정을 기려 사당 의기사(義妓祀)가 촉석루 옆에 세워졌다.

 

이왕 진주에 온 거,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나선 진주성 돌아보기는 영남 포정사(布政司)를 지나 성벽을 따라 성 둘레를 돌면서 반전했다. 우리는 무심히 찾은 진주성이 자신의 내밀한 속살을 우리에게 천천히 드러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단풍이 곱게 든 성안의 나무와 숲이 뿜어내는 만추의 향기가 너무 강렬했다. 맑고 섬세한 햇살이 숲과 성벽의 넓적한 옥개석 위로 부서져 내렸고, 느티나무 잎사귀에 머무는 햇살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성안의 시설물과 곱게 물들어가고 있는 숲이 살갑게 어우러져 있었다. 나무와 숲, 그리고 건물은 마치 정다운 이웃처럼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성벽 둘레를 따라가면 북문의 지휘대인 북장대(北將臺), 복원된 진주성 포진지인 포루(砲壘), 서장대 등이 이어지는데, 서장대 저편으로 새파란 남강이 흐르고 있었다.

 

진주성이 성의 남쪽을 강으로 둔 것은 적잖은 강점이었을 것이다. 진주대첩 당시에 성 밖의 의병 등과 군사 신호로 풍등을 날리고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웠는데, 이것이 남강 유등(流燈)의 기원이다. 올 12월에 개막하는 남강 유등축제는 진주성에서 순절한 7만 병사와 사민의 넋을 기리는 행사이기도 하다.

▲ 성안에 있는 국립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역사 전문 박물관이다. 위는 지금 진행 중인 특별전 <화력조선> 홍보 동영상의 한 장면
▲ 국립 진주박물관 앞에 서 있는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국보. 통일신라시대.

여행자의 ‘진주’와 ‘진주성’ 찬양

 

서장대 아래엔 1984년에 개장한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 국립 진주박물관이 ‘2021 조선 무기 특별전’ <화력조선> 전(9.17.~2022.3.6.)을 열고 있었다. 임진왜란 극복에 이바지한 화약 관련 유물 270점을 모은 전시회를 우리는 흥미롭게 관람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성에, 박물관까지…… 진주 시민이 부럽네.”

“정말 진주에 와서 살고 싶어지는데?”

“정작 시민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데가 있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를걸?”

 

인구 35만의 서부 경남 중심 도시 진주가 정말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진주와 견주면서 우리는 부러움에 찬 탄성을 내질렀다. 그게 만추의 풍경만으로 단순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무턱대고 진주를, 진주성을 찬양했다.

 

약 400여 장을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성안 어디든 렌즈를 들이대기만 해도 한 폭의 풍경이 만들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뷰파인더에 잡힌 성안 풍경들은 하나같이 주변 사물과 어우러져 흔연히 녹아 있었다. 그중 서장대에서 촉석루에 이르는,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풍경은 걸음을 멈추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 서장대 아래서 내려다본 남강. 저 멀리 고층빌딩조차 이 아름다운 전망을 깨지는 않았다.
▲ 박물관에서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 부근. 성안은 어디를 찍어도 한 편의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
▲ 성내 카페 부근의 은행나무. 유달리 맑은 잎이 햇살에 빛났다.
▲ 촉석루로 가는 길의 남강. 짙푸른 청색의 남강은 먼빛으로도 맑아 보였다 .

짙푸른 청색의 남강은 먼빛으로도 맑아 보였다. 가까이 가자, 해맑은 강바닥까지 깨끗하게 드러났다. 강 건너 도심의 고층 빌딩조차도 그 자연스러운 풍경의 흐름과 리듬을 깨지 않았다. 진주성이 한국 관광 100선에 8년 연속 선정된 이유다.

 

지금은 사적 제1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만, 그간 진주성이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1905년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 진주 판관으로 부임한 친일파 박중양(1874~1959)이 성의 일부를 해체하여 성첩(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팔아넘겨 촉석루 한 채만 남기에 이르렀다.

 

진주성, ‘역사가 있는 휴식’ 공간

 

또 1930년대 조선총독부 토지국은 진영 못을 메워 뭍으로 만들면서 진주성 외성과 내성 일부를 헐어 그 공사에 써 버렸다. 결과적으로 일제는 한때 왜군에 참혹한 패배를 안긴 진주성을 노략질해 폐허로 만든 것이다. 6·25전쟁 때 촉석루조차 불타 없어졌다.

 

1960년 촉석루 복원 이후, 진주성 복원사업은 촉석문 중건과 공북문 복원 등으로 이어졌다. 이후 진주성은 성안 민가 700여 동을 보상·철거하고 성 외곽의 정비를 마쳐 오늘에 이르렀다. 5만 평에 이르는 진주성은 이제 명실공히 도심의 휴식·교육 공간이 된 것이다.

▲촉석루. 1960년 복원한 이 대형 누각은 성곽의 남장대를 겸하고 있다.누마루에선 남강과 진주 시내가 보였다.
▲ 남강 의암(오른쪽 바위) 옆에 세운 '의암사적비' 논개의 정열은 기생이라는 이유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에도 실리지 않았다 .
▲ 윤여환의 논개 초상.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썼으나 나중에 바뀌었다.

둘레길의 끝은 촉석루와 의암. 대형 누각 촉석루는 성의 남쪽 장대이기도 하다. 1593년 9만3000명 왜군이 성을 포위하자, 5800명 진주성 결사대는 9일 동안 24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장마로 무너진 성벽으로 왜군이 들이닥치면서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해 조선군은 전멸했다.

 

이때, 경상우병사 최경회(1532~1593), 창의사 김천일(1537~1593), 복수의병장 고종후(1554~1593)는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한 달 후 의암에서 왜장과 함께 강물 속에 뛰어든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후실이었다.

 

논개는 임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실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에도 기생의 정열(貞烈)을 표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빠졌다. 그러나 진주 고을 사람들은 힘을 모아 논개의 넋을 위로하기 시작했고, 사당이 세워진 것은 150여 년이 지난 영조 때다. 순사한 지아비를 뒤따른 여인이 떠난 바위 앞 의암 사적비가 강물 앞에 외로웠다.

 

촉석루 옆 촉석광장에 세워진 계사순의단(殉義壇)은 계사년(1593)에 순절한 충혼들을 위령하고자 세운 단이다. 남도의 아름다운 만추를 즐기던 우리의 진주성 답사는 이 성을 적신 피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옷깃을 여미는 것으로 비로소 끝이 났다.

 

 

2021. 11. 5. 낮달

 

 

 

그냥 한번 와봤는데... 진주 시민들이 진심 부럽습니다

8년 연속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역사와 휴식 공간, 진주성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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