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선산의 3·1운동 - 선산과 해평, 임은동과 진평동 시위
사람들은 제 고장을 무척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필요한 이해는 ‘맹탕’일 때가 많다. 특히 역사 쪽으로 가면 총론은 그나마 주워섬기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국가 단위로만 배울 뿐, 향토사는 거기 곁들여진 몇 줄의 사실로만 익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지자체가 나름대로 지역사를 새로이 조명하기 시작했지만, 단시간의 노력으로 쉽사리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다. 구미에서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만세 시위를 재현하는 등의 행사가 베풀어지긴 했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3·1운동이 1919년 3월부터 약 3개월가량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200만 이상이 참여한 비폭력운동인데도 일제의 폭력적 진압과정에서 7500여 명이 죽고 1만5천여 명이 다쳤으며 5만 명 이상이 검거된 거족적 항일투쟁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일지 못한다. 그래서 3·1운동은 탑골공원의 33인, 또는 아우내 장터의 유관순 열사 같은 이미지로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관련 글 : 화성 제암리, 1919년 4월 15일]
구미·선산 지역에서의 삼일운동은 지금 구미 시내 두 지역과 선산 지역 두 군데에서 각각 전개되었다. 물론 산발적인 시위의 형식이다.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서 <구미향토문화대전>과 3·1운동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들의 공훈록(국가보훈처)을 참고하여 이를 재구성했다.
진평동 독립 만세 운동-네 차례에 걸쳐 진행
구미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은 구미시 진평동(당시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에서 첫 불을 지폈다. 영남 3·1운동의 효시(嚆矢)인 대구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대구 만세 운동은 3월 8일 서문외(西門外 :지금의 서문시장) 장날에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성경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된다.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대구·뒤에 서문교회 목사를 거쳐 대구대학교 설립, 1990 애국장)이 등사판으로 인쇄한 독립선언서 20장을 감추고 인동교회 목사 이상백(1886~1965)을 찾아왔다. 이상백은 이웃의 이내성(1893~1927)과 함께 이영식의 제안을 받고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상백은 같은 동네의 박명언·이영래·임점석·임용섭·권영해·허도언 등과 상의하여 거사 날을 3월 12일로 잡았다. 이상백과 임용섭은 붓으로 독립선언서를 써서 준비하고, 3월 11일에는 이상백의 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 등이 당일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박명언과 허도언은 집집이 방문하여 만세 운동 계획을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마을 곳곳에 붙였다. 이날 밤 8시경 마을 사람 200여 명이 뒷산에 모였다. 이상백과 이영식은 교대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될 것이라며, 독립을 위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연설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밤이 늦도록 전개된 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이상백을 비롯한 주동자 8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다음 날, 오후 4시께 같은 장소에서 마을 사람 약 20명이 다시 만세를 불렀고, 이날 저녁 9시에 약 30명이 같은 자리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3월 14일 오후 9시께에도 마을 사람들은 같은 장소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사흘 동안 4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일본 경찰은 주동자 33명을 체포했고 이 중 25명을 재판에 넘겼다.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이상백(1990 애족장)은 징역 2년, 이내성(1990 애국장)은 징역 1년 6월, 박봉술(1990 애족장)·이영래·임점석·임용섭(대통령 표창)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또, 박명언(1990 애족장)·권영해(대구·당시 진평교회 목사, 1990 애족장)는 징역 10개월, 그 외 장영직·이윤약·서기옥·장상건·임삼선·박근술·서천수·박순석·김성윤·박삼봉·권경보·임동석·김도길·장준현(이상 대통령 표창)·박금출·장주단·김삼주 등은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상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짠 이내성은 복역 후, 1926년 장진홍(1962 독립장) 선생과 함께 직접적인 대일투쟁을 결의하고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거사 준비에 협력했다. 그는 거사 이후 일경의 추적을 받고 피신하던 중, 1927년 8월 구미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이는 박금출·장주단·김삼주 등 세 분인데 이들이 서훈을 받지 못한 경위는 알 수 없다.
2016년에 진평동 산 8-2번지에 ‘인동 3·12 독립 만세 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 시설물은 인터넷 포털은 물론, 카카오 맵이나 티맵 같은 각종 위치기반 서비스에서도 검색되지 않는다. 진미동 주민센터와 이를 관리하는 구미시 복지정책과에 전화하여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선산 독립 만세 운동-한 번 실패 끝에 장터 시위
선산의 독립 만세 운동은 두 차례 시도되어 한 번은 실패, 한 번은 성공했다. 첫 번째 시도는 3월 9일, 선산면 동부동에 살던 이유암이 진용섭·한팔암·김광수 등과 만나 선산에서 만세 운동을 결의하면서 싹텄다. 이들은 3월 12일 밤, 선산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박완동과 함께 선산공립보통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학생들을 설득하여 다음 날 오후 3시 30분께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 교장이 학생들을 강제 해산함으로써 만세 운동은 실패했다. 일경에 검거된 이유암과 박완동은 재판에 넘겨져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으로부터 보안법 위반죄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선산공립보통학교 독립 만세 운동이 실패한 뒤, 도개면 도개동에 사는 권오환(1892~1957)과 이원길(1893~1920)은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선산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김의경·박희목·전용신 등과 의논한 끝에 선산 장날에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했다.
장날인 4월 12일 오후 6시께 이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자 장꾼 약 50여 명이 호응했다. 만세 후, 이들은 곧 몸을 피했으나, 이날 밤 일본 경찰의 불심 검문에 붙잡혀서 재판에 넘겨졌다.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권오환(1990 애족장)은 징역 1년 6개월, 이원길(1991 애국장)·김의경·박희목·전용신(이상 건국포장)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원길은 복역 중, 1920년 1월 26일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결국 2월 20일 순국하였다. 실패한 선산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유암, 박완동은 각각 보안법 위반으로 복역했지만, 이들에 대한 서훈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1993년 10월, 구미시는 선산읍 동부리 충혼탑 옆에 ‘선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부지 120평에 공적비 13기를 세웠는데,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원길, 권오환, 김의경 선생과 해평 만세 운동의 최재화 선생 등이 포함되었다.
해평 독립 만세 운동 - 주재소로 행진하여 격렬하게 충돌
해평의 독립 만세 운동은 구미·선산에서 펼쳐진 만세 운동 가운데 가장 격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진평동과 임은동의 그것이 마을 뒷산을 무대로 펼쳐졌지만, 해평에서는 시위대가 일제 식민지통치의 물리적 폭압 기구인 경찰 주재소로 행진해 갔기 때문인 듯하다.
해평면 산양동 교회의 전도사 최재화(1892~1962)는 이웃 인동면의 기독교도 박진오와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4월 3일 밤 11시 30분께 최재화는 산양동·송곡동·금호동에서 나온 7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해평의 경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자 최재화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70여 명에 불과했지만, 기세에 놀란 일본 경찰은 공포를 쏘아대며 선산경찰서와 군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선산에서 경찰부장 이하 6명, 대구의 일본 헌병이 오장 이하 3명, 상주의 일본군 수비대 11명이 달려왔지만, 군중들은 해산한 뒤였다.
이튿날, 일본 경찰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동민들 가운데 55명을 체포하였다. 최재화(1990 애족장)는 피신했으나 궐석재판으로 1차에서 징역 3년, 2차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다른 24명은 각각 태형 80대를 받았다.
대구와 상주에서 지원 병력이 올 만큼 격렬했던 시위였는데도 참여자들이 태형 이상의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주모자인 최재화가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제는 시위 참가자들을 단순 참가자로 분류하여 사건을 정리한 대신 궐석재판에서 최재화에겐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 최재화와 함께 운동을 계획한 박진오에 대한 기록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최재화는 이후에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만세 운동 후 피신한 그는 5월, 대담하게 경상북도 내의 조선인 관공리(官公吏)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대구 시내의 조선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폐점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6월에는 애국청년을 모집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게 하고, 또한 청년 지식인 여러 명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0년 7월, 그는 인근 상주에서 체포되었지만, 대구로 호송되는 중에 탈주하였다.
일제는 궐석재판에서 중형을 선고한 그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최재화는 7월, 일본을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은사 김규식의 천거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김구 휘하에서 베이징의 임정 자금 모금책을 맡기도 했으며 임시정부 최고정치회의에 최연소자(27세)로 참가하기도 했다.
1926년 그는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국내 여러 교회의 담임을 맡아 사역했다. 그는 1955년 개교한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의 설립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고향인 산양리 마을 앞에는 1963년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 목사 기념비’가 세워졌다.
임은동 독립 만세 운동-재판기록 남지 않아 서훈자 없어
임은동은 한말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1855~1908)를 낳은 곳으로 왕산의 순국 이후, 그 집안에서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동네다. 왕산의 순국 이후, 허씨 일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지만, 임은동에는 여전히 항일의 기풍이 남아 있었다.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임은동에서 의거를 계획하고 나선 이는 강용준과 유시동이다. 이들은 4월 8일 밤 10시, 300여 명 주민과 함께 임은동 뒷산에서 밤늦도록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소식을 듣고 4월 9일 선산경찰서 경찰 4명과 일본군 수비대 5명, 그리고 인동의 일본군 헌병주재소 헌병 2명이 달려왔으나 주민들은 이미 마을 뒷산으로 피신하여 한 사람도 붙잡히지 않았다. 4월 15일 일본 군인과 경찰이 이 마을을 급습하여 강용준·유시동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 30여 명을 붙잡아 갔다.
그러나, 이들에 관한 재판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들이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대신 마을 뒷산에는 2009년 13도 창의군 참모장을 맡아 서울 진격작전을 벌인 왕산 허위 선생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기독교계 주도, 심야에 전개된 점이 특징
구미 선산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은 진평동과 해평면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도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만세 운동은 면 소재지와 같은 행정 중심제에서 장날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점에 일어났지만, 진평동과 임은동, 그리고 해평면 만세 운동은 심야에 전개된 점도 특이하다.
2020. 2.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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