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주읍성’
읍성(邑城)이라면 퍼뜩 떠오르는 건 고창읍성·순천 낙안읍성·서산 해미읍성 등 지금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읍성이다. 그러나 “마을이나 도시 같은 중대 규모 거주지를 치안, 행정, 방위의 목적으로 방벽으로 둘러친 성곽형 방어시설”로 정의되는 읍성은 한중일 삼국뿐 아니라 중동과 유럽 등에서도 두루 발견되는 시설이다.
성주읍성 복원과 함께한 성주역사테마공원
원형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일부 성곽 등이 남아 있는 읍성으로는 한양 도성(都城)을 비롯하여 부산의 동래읍성, 울산의 언양읍성, 경기도의 수원 화성, 전남의 강진읍성, 전북의 고창읍성, 경남의 사천읍성, 경북의 경주읍성과 청도읍성 등이 있다.
성주에도 물론 읍성이 있었다. 그것은 읍내를 안고 흐르는 이천(伊川) 주변의 왕버들 숲 이름이 ‘성밖숲’이라는 데서 입증된다. 적어도 성은 그 숲 안쪽으로 서 있었던 얘기다. 북문 터만 남아 있었던 읍성 터에 북문을 중심으로 성주읍성을 복원하는 사업(2017~2020)으로 이른바 ‘성주역사 테마파크’가 문을 연 것이다.
성주역사 테마파크 조성사업은 총사업비 96억 원을 투입해 조선 전기 4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성주사고와 조선시대 전통 연못인 쌍도정 등을 재현하고 성주읍성을 재정비했다. 터만 남아 있었던 곳에 기록에 따라 각종 시설을 ‘복원’했다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재현’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듯하다.
벽진 집실의 ‘해동청풍비’에 다녀오다 잠깐 들른다고 했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니, 이게 그냥 빼꼼 들렀다가 갈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한눈에 들어오는 북문과 성곽, 그 앞 비탈에 줄지어 선 비석들 따위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연못에 세운 정자가 ‘쌍도정(雙島亭)’이었다. 조선시대 성주 관아의 객사인 백화헌(百花軒)에 부속된 연못에 있던 정자다. 네모난 연못에 석축으로 둘러싼 2개의 섬을 조성하여 ‘쌍도정’이라 불렀단다. (조선 초기에 고려말 문하시중 이조년(1269~1343)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 경산부(京山府) 관아를 지었고 객사로 삼은 사저를 그의 호를 따서 백화헌이라 했다.)
쌍도정과 비석원
원래 연못의 섬은 대개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 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드러내려 한 개를 조성하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쌍도정은 음양이나 일월을 상징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위치는 경산리 관운사(關雲寺) 앞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쌍도정은 하양 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 ‘쌍도정도’를 바탕으로 전문가 자문을 거쳐 현재 위치에 재현하였다. 그러나 연못가에 나무 한 그루 없는 삭막한 주변 경관 탓에 연못도 정자도 축소한 모형처럼 현실감을 잃고 있으니, 그걸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읍성의 북문으로 오르는 비탈에 왼쪽으로 난 산책길 주변이 여러 기의 비석을 모아놓은 비석원(園)이다. 조선시대 성주의 수령이나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낸 지방관의 선정을 기려 세운 선정비가 중심인데, 비석은 모두 20기다. 굳이 내용을 새겨보지는 않더라도 저마다 다른 형태의 비석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특이한 것은 빗돌 가운데 ‘성산기공비’는 선정비라기보다 이인좌의 난(1728)을 평정한 공을 세운 성주 목사 이보혁(1684~1762)과 지역 인사를 기리는 공적비로 높이가 262cm에 이른다. 또 목사 윤자일의 청덕(淸德)선정비는 드물게 철비다.
비석원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읍성의 북문 ‘성지문(星智門)’이다. 읍성의 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경산지(京山誌)> 등에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형태나 명칭 등은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주’의 ‘성’과 ‘인의예지신’에서 ‘북’을 가리키는 ‘지(智)’를 따서 성지문이라 명명하였고, 문루(門樓)의 명칭은 주민 화합을 뜻하는 ‘민락루(民樂樓)’라 하였다.
성지문과 복원한 성곽
성문의 좌우로 성곽을 복원하였는데, 옹성(甕城: 성문 밖을 반원형이나 ㄷ형으로 둘러쌓은 성곽의 시설)은 없으나 치성(雉城 :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공격하는 시설)을 두었다. 또 여장(女墻: 성곽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총안(銃眼; 총포를 쏠 수 있도록 뚫은 구멍)도 설치하여 옛 모습을 재현하였다.
성지문을 지나 왼쪽으로 오르면 성주 사고다. 1439(세종21)년 설치된 성주 사고와 실록각(實錄閣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로 사고(史庫)를 구성하는 여러 건물 중 하나)은 성주목(星州牧) 관아에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성주 사고와 관천대
1538년(중종33) 11월 6일 화재로 일시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실록각을 세우고 1540년 4월에 재차 실록을 봉안하였다. 이때의 기록에 따르면 사고의 건물을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이 넓게 트였고 2층 건물은 높이 솟아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는 중층 누각 형태의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뒷날, 임진왜란으로 성주 사고가 소실된 뒤 국가 정책에 따라 복원되지 않았다. 성주 사고는 전주 경기전에 복원된 전주 사고와 조선 전기 사고에 대한 연구성과를 반영해 재현하였다.
성주 사고 뒤편의 봉두산 정상에 관천대(觀天臺)가 재현되어 있다. 관천대는 조선시대 천문관측 기구인 간의(簡儀)를 설치하였던 관측시설로 ‘간의대’라고도 한다. 돌로 대를 쌓고 대 위에는 돌난간을 둘렀으며, 그 안에 간의를 설치한다고 하나, 서울 창경궁의 관천대를 본보기로 그냥 모양만 재현한 것이다.
성주역사 테마공원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성지문을 지난 곧은 길로 내려가면 공원은 읍내 시가지의 청사도서관과 성주성당으로 이어진다. 청사도서관은 1983년 전두환을 수행하여 외교 순방 중 미얀마 아웅산 묘지에서 희생된 서석준(1938~1983) 당시 부총리의 생가에 세운 도서관으로 청사는 그의 아호다.
성주 이씨, 그 혈연의 기억
청사도서관 못미처에 선 비각이 충헌각(忠獻閣)이다. 김상헌의 증손이자, 김수항의 아들인 충헌공 김창집(1648~1722)이 신임사화(1721~1722)에 연루되어 성주로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된 뒤, 지역 선비들이 뜻을 모아 세운 유허 비각이다. 비각은 6·25전쟁으로 소실된 뒤 2006년에 복원했다.
청사도서관 쪽에서 거슬러오면 오른쪽, 그러니까 성주 사고와 이웃한 대형 건물이 성주 이씨 중흥 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유허지다. 이장경은 고려 중기의 호족으로 백화헌 이조년이 바로 그의 막내아들이다. 1856년 여기 유허비를 세우고, 1922년에 봉산재(鳳山齋)를 건립했다.
봉산재로 오르는 비탈에 유허 비각이 있고,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보물 ‘서울 이윤탁 한글 영비(靈碑)’ 모형이 세워져 있다. 한글 영비는 성주 이씨 후손인 이윤탁의 아들 이문건이 시묘살이를 하면서 1536년 세운, 국내 유일의 한글 묘비로 ‘영비’라고도 한다.
이 비석에는 일반적 비문 외에 동쪽 측면에 ‘불인갈(不忍碣)’, 서쪽에 ‘영비(靈碑)’라는 제목 아래 한자와 한글로 특이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특히 한글로 새긴 비문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최초의 한글이 새겨진 금석물로, 국내에서는 조선 500년 동안 유일무이한 현존 최고의 희귀한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종일 선생과 백년설, 역사의 기억 방식
‘불인갈’은 묘비 훼손을 금하는 일종의 경고문으로 “부모를 위하여 이 비석을 세운다. 누가 부모 없는 사람이 있어서 어찌 차마 이 비석을 훼손할 것인가? 비를 차마 깨지 못하리니 묘도 또한 능멸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세를 내려가도 가히 화를 면할진저.(爲父母立此誰無父母何忍毁之石不忍犯則墓不忍凌明矣萬世之下可知免夫)”라고 씌어 있다. ‘영비’의 글귀는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것은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이다.
시비 공원에는 이조년의 후손이라며 3·1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옥파 이종일(1858~1925) 선생기(記)’도 세워져 있다. 옥파는 충남 태안 사람으로 천도교 내 비밀조직인 천도구국단장을 지낸 이로 독립선언서 인쇄를 담당했다. 민족 대표 가운데 ‘과격파’로 알려진 그는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제2의 3·1운동을 계획, 실천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한 뒤 지조를 지키다가 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그의 비는 백년설의 노래비에 비겨 초라해 보였다.
영비 주변에는 ‘성산 이씨 시비 공원’이다. 다정가로 불리는 이조년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를 자연석에 새겨놓은 시비들이다. 여말삼은으로 꼽기도 하는 도은(陶隱) 이숭인을 비롯하여 이직(李稷, 1362~1431)의 시조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와 임란 때 참전한 이천년의 7세손 명나라 장수 이여송, 기타 벼슬길에 오른 선조의 한시를 번역하여 새겨 놓았다.
특이한 것은 뜬금없이 백년설(본명 이갑룡) 노래비도 커다란 조형물 형식으로 세워져 있는데, 그도 이조년의 후손이란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 부역자 백년설의 노래비는 성밖숲과 성주고 교정에 이어 세 군데나 된다. 조상이고 혈족이니 ‘친일’ 전력쯤이야 가볍게 뛰어넘을 만하다는 것인가.
농민회와 전교조 등 시민단체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에 성주사람들은 공립 성주고등학교 교정에 백년설의 흉상과 노래비를 세웠다. 부끄러운 식민지역사도 지연과 혈연을 넘지 못한 것이다. 답사의 끝이 어쩐지 씁쓸하다. 일제의 감옥에서 단식으로 순국한 자하 장기석(1860~1911) 선생의 ‘해동청풍비’를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백년설의 세 번째 노래비를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게 설마, 성주 고을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지는 않겠지만.
2022. 1.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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