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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그런 ‘애국’은 싫다

by 낮달2018 202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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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적으로 강제하여 관철하는 ‘국기 사랑’

▲ 국기는 한 나라의 표상으로 '나라 사랑'의 의미로 새겨지기도 한다. ⓒ 오마이뉴스

‘애국(愛國)’은 특정 시기, 국가나 민족에 대한 개인의 심리나 태도를 결정짓는 매우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국권 피탈기의 항일 투쟁과 한국전쟁 시기의 전쟁영웅들이 펼친 전설적 무용담의 원천은 다소 성격이 다르긴 하겠지만 ‘애국’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상시에 ‘애국’ 또는 ‘애국심’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나라를 떠나봐야 비로소 ‘애국자’가 된다거나, 국가 대항의 운동경기를 응원하면서 애국과 비슷한 감정을 겪게 되는 게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애국’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

 

살아가는 일만으로도 바쁘고 힘겨운 보통 시민들도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 특히 일본과의 외교 마찰이나, 대미 관계에서의 예속 상황 등을 확인하면서 분노할 줄 안다. 그 같은 반응은 민족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 전제 역시 ‘애국’이라는 감정의 결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아무도 그걸 ‘애국’이나 ‘애국심’으로 연결 짓지 않는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뻔뻔하고 비열한 태도에 대해서 또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외교적 전횡에 대해서 분노하면서도 자신을 ‘애국자’라고 느끼는 이들은 없다는 얘기다.

 

특별한 신체적·환경적 문제가 없으면, 또는 현행의 징병제도를 피해 갈 만한 권력과 경제력을 갖지 않는 한 모두가 치러야 하는 병역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기간만큼 복무하고 사회로 돌아오지만, 자신의 군 복무 기간을 ‘애국의 시기’로 여기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평균적인 시민의 한 사람이다. 나는 운 나쁘게(!) 군 복무 기간을 33개월로 꽉 채워야 했고, 팔자에 없는 특수부대에 가서 이른바 뺑뺑이를 돌고 왔다. 그러나 그 시간을 애국과 연관하여 본 기억은 한 자락도 없다.

 

입대하는 순간부터 나는 다만 복무 기간을 채우고 사회로 돌아가는 날만을 그리며 살았다. 피할 수 없는 의무를 치르기 위해서 나는 거기 있었을 뿐, 나라와 국민을 지킨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병역의무를 치른 다른 병사들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끔찍한 상상이긴 하지만 만약 복무 기간 중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땠을까. 아마 모두 그걸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의무로 여기고 주어진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을 것이다. 전투 중에 병사들이 보일 수 있는 ‘용감’이나 ‘비겁’은 다른 문제다. 글쎄,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조차 자신의 행위를 ‘애국’으로 의식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도 ‘애국’을, 또는 ‘애국심’을 의식하지 못하여도 사람들은 주어진 국방과 납세, 교육과 근로를 의무를 다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한 나라 존속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통치자 등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도 그들이 누리는 권력에 걸맞은 자기 역할을 통해 ‘애국’ 행위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뜬금없이 ‘애국’을 화두로 변변찮은 사설을 펼친 까닭은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한때 ‘애국’은 진보 진영의 전매특허였다. 학생운동은 물론 사회운동의 가장 강력한 동기였던 그것은 요즘 보수진영의 전가의 보도로 옮겨간 듯하다.

 

애국은 자신들과 다른 세력을 가르는 기준으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진보 세력들이 애국을 말할 때 그들은 소수였지만 자신들의 이해에 대립하는 사람들을 폄훼하는 잣대로 애국을 쓰는 요즘 보수 세력은 다수, 강자의 자리에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정부에서 내놓자마자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는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도 같은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운동은 ‘나라 사랑=태극기’라는 아주 단순한 등식에 바탕을 두고 온 나라에 태극기 물결을 통해서 ‘애국’의 기운을 드높이자는 의도인 듯하다.

▲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자 행인들이 멈춰 의례를 하고 있다. 1978년 서울시청 앞
▲ 1977년 10월 18일 오후 6시 중앙청 앞의 국기하강식 장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문제는 그걸 펴는 방식, 아닌 21세기에 70년대 새마을운동 형식을 답습하려는 데 있다. 이미 규제 완화 차원에서 폐지된 의무를 다시 불러내는가 하면, 다분히 타율적 방식으로 ‘국기 사랑’을 관철하려 하는 것 말이다. 행자부에서 수립한 이 운동의 계획은 가히 ‘범국민적’ 형식이긴 하다.

 

1999년 규제 완화 차원에서 폐지된 민간 건물에 국기 게양대 설치를 의무화하고 주택 신증축 때 국기 꽂이 설치 여부를 확인한다.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아파트 각 동 출입구에 태극기를 걸 수 있도록 하고 관리 비용을 아파트 관리비에서 지출할 수 있도록 한다.

 

학생들은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게양한 뒤 인증 샷을 찍어 학교에 제출하고 일기와 소감문 등을 발표한다. 유치원생도 국기 교육을 받고, 각 교실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지 등도 점검된다. 국기 게양·강하식도 실시된다.

 

나라 사랑과 태극기가 절묘하게 만나게 된 건 영화 <국제시장> 덕분이다.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 계획은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 국기 하강식 장면을 보고 애국심을 강조한 즈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영화에 재현된 70년대적 상황에 대통령의 감명이 깊었던 모양이다.

 

온 나라를 태극기로 뒤덮자고?

 

잘하면 3월 1일을 전후하여 나라 안 곳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감동(?)적인 광경이 펼쳐질 수도 있겠다. 벌써 거리에는 태극기의 물결이 예사롭지 않다. 아파트 관리실도 국기 게양을 부탁하느라 바빠지겠다.

 

나는 애국심과 무관하게 국경일마다 국기를 빼먹지 않고 다는 편이다. 국기를 걷으면서 좌우를 둘러보면 국기를 단 집은 몇 집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는 삼일절부터는 아파트 전체에 국기가 내걸리는 장관이 연출될지도 모르겠다.

 

전 정권과 현 정권 시기에 드러난 역사적 퇴행은 한두 건이 아니다. 하지만 1989년 1월 이후 사실상 사라진 국기 게양·하강식이 조만간 재현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나라 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이 기획한 대로 시행될 때는 말이다.

 

까마득한 70년대의 풍경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유신 독재 시기에 우리는 고교에 다녔고, 무자비한 체벌과 함께 교련 수업을 받았다. 총검술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소총 분해 결합 같은 총기 교육도 받았다.

 

우리들은 금요일마다 군대식 ‘국기 하강식’에 동원되었고, ‘받들어총’ 경례로 조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학생회장 대신 ‘대대장’, ‘연대장’이 지휘하는 이 유사병영체제를 통해 독재정권은 병영국가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7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이 ‘하기식’은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행되었던 것 같다. 여섯 시 사이렌이 울리면 버스도 택시도 정지하고 행인들도 멈추어 섰다. 차도 사람도 애국가 연주가 끝날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마치 역사 발전은 물론 시간마저 멎어버린 시대의 미니어처 같다.

▲ <국제시장>의 이 컷은 &lsquo;애국심&rsquo;과 무관한 컷으로 단지 그 시대의 실상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 이 시대착오적인 ‘나라 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의 성패는 이미 결정된 것과 진배없다. 아무에게도 국기를 다는 일로 애국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법이 그것을 강제한다고 하면 상황이 더 나빠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정부는 ‘나라 사랑 = 태극기’라는 공식 아래 온 나라가 일사불란하게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이는 걸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대대로 ‘애국’과 ‘애국심’을 담보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예의 70년대식 국민통합, 또는 국민 의식 통일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를 만족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2015년도에 시행하려는 ‘태극기 달기 운동’은 80년대 신군부 독재 시기 영화관에서 시행되었던 애국가 연주의 밀레니엄 버전이다. 황지우 시인은 그 암울한 현실과 그로 인한 좌절, 군사 정치 문화에 대한 냉소적 태도와 무력감 등을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노래했다.

 

태극기 달기는 ‘영화관 애국가 연주’의 21세기 버전

 

신군부는 영화 감상에 앞서 연주되는 애국가를 들으며 시민들이 투철한 애국심을 환기하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관객들은 컴컴한 극장에서 화면을 내려다보며 연주되는 애국가를 들으며 ‘낄낄대’고 ‘깔쭉대’기만 할 뿐이다.

▲ 삼일절을 앞둔 시내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2월 28일 구미 .

곳곳에 나부끼고 흐르는 태극기의 물결이 이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안을 줄까. 희망 잃은 청년 세대들에게, 불안 속에 노후를 맞는 베이비붐 세대들에게 국기는, 그것으로 상징되는 나라와 정부는 무엇으로 다가갈까.

 

강제하거나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태극기 사랑은 한편으로 거기 기꺼이 따르는 이들과 심드렁한 이들의 편을 가르게 될지도 모른다. ‘애국’과 ‘비애국’으로 갈리는 이 편 가르기는 ‘피아’를 구분 짓는 또 하나의 분열과 반목의 잣대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형식의 애국이라면, 나는 거기 참여하고 싶지 않다. 나라 사랑 따위를 의식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다하는 절대 다수 시민에 의해서 국가는 존속된다. 굳이 나라 사랑을 의식하지 않고도 소박한 마음은 나라를 지키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5. 2.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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