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내린 상서로운 강설
개학 첫 주, 해마다 되풀이되는 가장 길고 힘든 주일이 계속되고 있다. 수업하고 돌아오면 소소한 일거리가 끊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낯선 아이들은 복도를 지나며 씩씩하게 인사를 해대지만 정작 어느 녀석이 어느 녀석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다.
다시 2학년이다. 나는 잠깐만 망설였다. 이번엔 구체적으로 문과반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과반이 한반 늘면서 문과의 끝 반인 4반을 맡았다. 아이들은 서른셋. 작년의 스물다섯에 비기면 여덟 명이 많을 뿐이지만. 교실이 꽉 찬 느낌이고, 사흘째지만 아이들 얼굴을 익히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이웃 반에는 저희가 중1 때 특별활동을 하면서 얼굴을 익힌 아이가 몇 있지만, 우리 반엔 나와 연이 있는 아이가 전혀 없다. 어저께 아이들 자기소개서를 읽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알고 지내던 후배 교사의 아이가, 몇 해 전 담임했던 아이의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혹은 언니와의 인연이 자식과 동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이 소도시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서른셋, 아이들은 좀 긴장한 듯 불안해 보인다. 새 학년으로 올라와 낯선 교사들과 급우들을 만난데다가 진급에 따른 공부의 부담 따위를 의식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은 마치 방목장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다 축사로 돌아온 망아지들 같아 보이기도 한다.
첫 시간에 학급 운영의 원칙이나 방향 등을 알아듣도록 설명했는데도 아이들은 불안한 탐색의 눈길을 쉽게 거두지 않는다. 대부분 아이들은 ‘괜찮다’고 하는데, 몇몇 아이들은 그런 불안을 고스란히 자기소개서의 ‘담임에게 바라는 것’에 담았다.
“성적차별이 없었으면…….”
“첫인상이 무서워요.”
“엄격하실 것 같다.”
“관심을 가져 달라.”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해 달라.”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 주었다. 사족이다. 아이들은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사람을 파악해 버리니. 또 그런 이야기도 했다. 이제야 어떻게 담임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루가 여삼추라는 말이 실감 나는 날들이다. 작년 이맘때도 때아닌 눈이 내렸는데, 올해도 어김없다. 3월 3일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길가의 눈은 녹아 버렸지만, 교정의 나무에 쌓인 눈은 모처럼 넉넉한 풍경을 연출해 주었다. 아이들이 든 고운 빛깔의 우산 행렬도 새로웠다.
이 시간의 순환과 반복에 나는 잠깐 어리둥절하다. 지난해처럼 올 한 해를 따뜻하게 여는 서설(瑞雪)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내 친구는 이 무렵의 찌뿌둥한 몸과 마음을 ‘개학 증후군’이라 불렀지만, 나는 지난해보단 훨씬 가볍다. 일찌감치 작정을 끝낸 탓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올해가 담임으로서 맞는 마지막 해가 될 것이다. 글쎄, 마지막이라고 해서 무어 달라질 게 있겠는가. 그건 나의 문제일 뿐이고 아이들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 월말엔 다시 제주도로 간다. 이태 동안 못다 한 제주에서의 아쉬움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두고두고 근심해 볼 참이다.
2009. 3. 5.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교단(1984~2016)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삼월 (0) | 2021.03.07 |
---|---|
다시 시작이다, 2013학년도 (0) | 2021.03.06 |
광고 두 개 (0) | 2021.03.03 |
교장의 ‘자격’을 생각한다 (0) | 2021.02.23 |
‘시니어’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당신들에게 (2) | 2021.02.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