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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임정 답사] 임정, 초모 공작으로 광복군 창설작업에 본격 나서다

by 낮달2018 20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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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치장(綦江), 광복군의 밑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

▲ 충칭시 치장구의 기강. 강변에 임정 청사가 있었으나 지금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셋째 날, 우리는 류저우역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5시간쯤 걸려 쭌이(遵義)에 도착했다. 인구 800만의 이 도시는 1935년 1월, 중국공산당의 장정(長征) 도중 열린 ‘쭌이 회의’로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아 이후 장정을 이끌게 된 곳이다. 중국공산당 권력의 한 축이었던 보구(博古) 등 볼셰비키 그룹은 이 회의에서 패전을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다.

 

4월 초순 떠나 월말에야 치장에 도착

 

우리는 쭌이에서 묵고 다음 날 쭌이 회의장을 둘러본 뒤, 바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72굽이 산길’을 돌아 치장으로 내달았다. 류저우를 떠나 치장까지 오는데 이동 시간만 따지면 7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39년 4월 초순, 임정과 식구들이 국민당 정부에서 보내준 버스로 구이저우성(貴州省) 성도인 구이양(貴陽)까지 오는 데만 무려 열흘이나 걸렸다.

 

길도 길이었지만, 차편이 말썽을 부려 버스 여섯 대가 구이양에 들어오는데, 나흘이나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동 비용이 바닥나서 충칭에서 돈을 보내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구이양에서도 사흘이나 머물러야 했다. 임정 살림을 맡고 있던 정정화가 이를 알고 그간 저축해 둔 200원을 내놓아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 구절양장의 72굽이 산길. 이 고개를 넘으면 치장이다.

우리는 잘 정비된 72굽이 산길을 넘는데 한 시간가량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1939년 당시 임정과 식구들이 구절양장의 고개를 넘는 건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굽잇길을 넘으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가늠하느라 마음을 졸인 게 가족뿐이었을까.

 

그러구러 임정과 식구들이 치장(현재 충칭시 치장구)에 도착한 것은 4월 말이었다. 치장은 쓰촨성의 남쪽 끝에 있는 도시, 쓰촨성과 구이저우성의 접경에 있어 곧장 삼십여 리만 오르면 충칭에 닿는, 충칭의 외곽이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나 7년여 만에 마침내 충칭(重慶) 관내에 들어온 것이었다. 코앞에 충칭이 있으니 이제 장정은 끝났는가 싶었을 것이었다.

 

임정이 치장에 임시사무처를 연 것은 다음 달인 5월 3일이었다. 임정 식구들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백여 명이 묵을 수 있는 집 한 채를 얻었고, 시내에 가까운 강가에 따로 방 몇을 얻어 청사와 단신 국무위원의 숙소로 썼다.

▲ 임정이 치장에 머물 당시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2002). 그러나 이 건물을 재개발로 사라져 버렸다. ⓒ 독립기념관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을 발표했다. 이는 중일전쟁이 깊어가면서 고조된 항일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 요구와 중국 국민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통신’은 과거 투쟁이 통일 단결과 민족혁명의 전략을 담아내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향후 두 진영은 민족해방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김구와 김원봉이 손을 잡지만 협동전선은 다시 좌초

 

‘통신’에서는 자주독립 국가의 건설·민주공화제 건설·국가적 위기에 기업의 국유화·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와 매매금지 등 10개 항목의 정치강령도 밝혔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단체의 통일 조직 방법으로 ‘연맹조직론’이 아니라 ‘단일당 조직론’에 합의하고 1939년 8월 27일 치장에서 7당(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모여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통일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연맹조직론을 주장하는 민족전선 소속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없다면서 통일회의를 탈퇴함으로써 통일회의는 유회되고 말았다. 조직방식을 같이한 나머지 5당이 논의를 이어가면서 9월 22일에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며칠 뒤 민족혁명당이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기 민족유일당운동과 1932년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그리고 양대 연합체의 결성과 이를 통합하려는 일련의 민족 협동전선 운동은 또다시 좌초된 것이었다. 이 실패는 결국 한인의 자율적 조정 능력에 대한 회의로 이어져 국민당 정부가 이들에 대한 지원정책을 재검토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환송식(1939.11.17.) 김구를 중심으로 둘째 줄 맨 왼쪽이 부대장 김동수, 오른쪽 맨끝이 대장 나월환이다.
▲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들. 대장 나월환, 부대장 김동수, 공작조장 이재현, 대원 안봉순 ⓒ 국가보훈처 등

1939년 11월, 충칭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이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되었다.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하이,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 30여 명으로 조직된 전지공작대는 대장에 나월환(1963 독립장), 부대장에 김동수(1963 독립장)를 선임했다.

 

11월 18일 전지공작대는 시안으로 떠나 이후 류저우와 충칭 등지에서 광복군 결성을 위한 한국 청년들의 초모(招募) 공작대로서 활약하였다. 1940년 5월부터 중국군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에 배속된 김동수 등 대원들이 일본군 점령지역에 들어가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하여 1940년 말 약 100여 명에 달하는 대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이들은 이듬해 1월 광복군에 편입, 제5지대(지대장 나월환)로 편제되었다.

 

광복군 창설에 첫발 떼다

 

한편, 임정은 치장에 도착하면서부터 독자적으로 전시체제에 대비하려는 조처를 마련하는 한편,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창군(創軍) 작업은 군사특파단 구성 파견으로부터 첫발을 떼었다. 임정은 1940년을 전후하여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화북지역에 거주하는 약 20만 명에 이르는 한인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고자 한 것이었다.

 

임정은 군사 간부들을 주축으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군무부장에 조성환(1962 대통령장), 황학수·이준식(1962 독립장)·나태섭(1977 독립장) 등을 선임, 군사특파원을 구성하고 이들을 시안(西安)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시안을 중심으로 초모 공작을 벌이면서 광복군 창설작업이 본격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 광복군 초모차 시안으로 파견된 군사특파단. 이들이 초모 공작을 벌이면서 광복군 창설작업이 본격 추진되었다. ⓒ 보훈처 등

임정은 중국 정부에 광복군 창설에 관한 양해와 협조를 요청하는 교섭을 전개하였다. 중국 영토에서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양해와 승인을 얻어야 했고, 병력과 재정 확보도 시급했다. 임정이 중국국민당 주석 장제스에게 광복군 성립계획을 제출한 것은 1940년 3월 2일이었고, 장제스가 광복군 조직을 허락한 것은 4월 11일이었다.

 

백범은 중국국민당의 담당자들에게 ‘광복군의 편성이 중국의 항일전에 유익’함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접근했다. 그는 화북(華北)지역 점령 일본군 중에 한적(韓籍) 사병이 많고 이들 중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려는 청년들이 많은데, 이들을 일본군에서 빼내면 중국의 항일전에 유익할 것”이라는 논리로 광복군 편성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는 주효했다.

 

한중, ‘광복군의 지위’에 이견

 

순조롭게 진행되던 광복군 창설작업은 ‘광복군의 지위’를 두고 한중 양국 간 이견을 드러냈다. 임정은 광복군 예속 문제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할’로 두되, ‘중국 군사 최고 영수가 중한연합군 총사령의 자격으로 통솔 지휘’하는 형태를 주장했다. ‘군사 활동은 중국 군사 당국의 명령을 받되,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자주권)은 임시정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앞서 결성한 조선의용대가 자주권을 확보하지 못한 점을 반면교사로 삼은 거였다.

 

그러나 중국 측은 한국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야 하고 각지에 파견한 인원도 각 해당 지역 군사 장관의 통제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중국과 한국의 지위가 다르므로 ‘광복군과 중국군이 연합군’일 수 없다고 일축했다. 그것은 타국땅에서 군대를 창설하려는 망명정부가 감내하기 어려운 수모요, 비애였다.

 

낯설고 물선 타국땅에서도 망명자의 삶은 이어진다. 새로 태어나는 삶은 드물지만, 흔한 것은 죽음이다. 어느덧 나라 잃은 지 30년이 지나면서, 풍찬노숙의 삶을 마다치 않은 노장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항일전쟁에 나가거나 공습으로 목숨을 잃는 것도 비통한 일이지만, 오직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모진 세월을 버텨온 노장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1939년 4월 26일, 백범의 모친 곽낙원(1859~1939, 1992 애국장)이 인후증(咽喉症)으로 세상을 떠났다. 류저우에서 병이 위중해지자, 맏이 인(寅)이 모시고 충칭으로 왔으나 때가 늦어 달리 손을 쓰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었다. “총과 칼을 들지 않고도 그토록 씩씩하게 굳세었던 분이었다. 어린 창수를 백범으로 만든 분”(정정화 <장강일기>)은 여든 살을 일기로 그렇게 눈을 감았다.

 

치장으로 온 지 1년이 채 되기 전인 1940년 3월 13일에는 임정 주석 석오(石吾) 이동녕(1869~1940, 1962 대통령장)이 급성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한 지 서른 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 풍찬노숙한 세월 스물한 해, 그는 마지막 일곱 번째 임정 수반을 맡고 있었다.

 

이동녕은 구한말 독립협회에 가담해 구국운동을 전개한 이래 임종의 순간까지 독립 전선에 있었다. 그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이었고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1914)의 주역이었다. ‘무오독립선언’(1918)에 참여했고, 1919년 상하이 임정 수립 때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었다. 11대(1925)와 13대(1929)에도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았다.

▲ 치장의 이동녕 주석 주거지. 석오는 여기 살다가 7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아래는 치장구에서 외벽에 설치한 표지판을 확대한 것 .
▲ 이동녕 주석의 장례식은 1940년 3월 17일 임정의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원내는 석오 이동녕. ⓒ 위키백과

곽낙원에 이어 주석 이동녕도 떠나고

 

일흔한 살, 해방을 맞을 수 있는 다섯 해의 수명이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김구는 “일곱 살 아래의 백범이 선생님 대우를 깍듯이 했던 분”(장강일기)인 석오의 타계를 안타깝게 추모했다.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백범일지)

 

석오의 장례는 3월 17일 임정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 남겨진 장례식 풍경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거칠게 다듬은 커다란 묘비에 새긴 글씨 ‘주석 이동녕 지묘’도 슬프다. 그의 유해는 1948년 봉환되어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치장에는 현재 임정 청사 터가 남아 있지 않다. 2008년 도시개발정책에 따라 임정 청사가 있던 타만가(街) 83번지 일대가 대규모 주상복합 단지가 조성된 탓이다. 비록 자국과 항일연대를 이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지만, 중국 당국이 그 점을 배려하여 임정의 유적을 보존해 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임정 이동녕 주석의 거주하던 곳이 타만가에서 멀지 않은 기강(綦江) 강변 언덕에 단층 건물로 남아 있다. 외벽에 걸린 ‘한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구거 유지’라는 표지판만이 80년 전, 노장 독립운동가의 삶과 죽음을 환기해 줄 뿐이다.

 

임정 재무부 차장으로 일하던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 1963 독립장)와 그의 부인 최선화는 1938년 딸 제시(濟始)를 낳고 8년간 일기를 썼다. 그 <제시의 일기>에서 최선화는 “이삼일 내리던 비는 멎었으나, 봄바람이 심히 부는 날”인 석오의 장례식 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임정의 원로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이 시간에, 철모르는 제시는 밤낮 노래 부르며 봄기운과 같이 잘 자라고 있다. 죽음과 삶이란 것이 이런 것인지, 생명이 생기고 사라질 때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목격한다. 그렇게 해서 시대가 바뀌고, 또 다른 삶이 흘러가고 있다.
    - 최선화, <제시의 일기> ‘1940년 3월 17일, 일요일, 사천성 기강’

 

1940년 가을에 임정 청사가 충칭으로 옮겨가면서 식구들도 새로 건설되는 한인 마을, 충칭의 난안(南岸) 투차오(土橋)로 옮아갔다. 최선화가 쓴 대로 시대가 바뀌고 또 다른 삶이 흘러가면서, 임정은 새로운 항일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9월 15일, 임정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가 ‘한국광복군 창군 선언문’을 발표한 것은 그 위대한 첫 걸음이었다.

 

 

2021. 2. 24. 낮달

 

1차 답사(2015.1.23.~1.27.)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①] 후미진 중국 골목에 한국인이 줄을 서는 이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②]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③] 37살의 나이 차… 백범과 중국 여인의 ‘특별한 동거’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④]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⑤] 중국에서 본 한국인 묘, 비석에 새긴 이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⑥] ‘난징의 능욕’,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2차 답사(2020.1.9.~1.14.)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⑦] 황푸군관학교, 한인 청년을 조련한 ‘혁명의 요람’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혁명 열기 속 국경 넘은 사랑도 익어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⑨] 광복군 전신 청년공작대, 34명 청년들이 이뤄낸 반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⑪] 충칭의 5년, 화시탄 물결 따라 사랑과 죽음도 흘러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⑫] ‘홀로서기’ 끝 광복군, 일본의 항복으로 길을 잃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⑬] 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잊을 수 없는 장면

 

 

 

광복군의 밑돌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아십니까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임정, 초모 공작으로 광복군 창설 작업에 본격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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