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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2122

[2008] 미안하다. 내 고추, 가지야 늦은 봄에 파종하고 나서 ‘척박한 땅’이라고 천대하며 내버려 두었던 땅이다. 자연 임자들의 가꾸고 다독이는 손길은 멀어졌다. 다락같이 오른 기름값도 한몫했다. 밭에 한번 가봐야지 않으려나? 내버려둬. 자라면 다행이고 안 되면 그만이지, 뭐. 내외는 번갈아 가며 타박을 했다. 하긴 제대로 줄기도 실해지기 전에 힘겹게 열매를 매단 녀석들이 안쓰럽긴 했다. 빈약한 줄기와 잎 쪽에 새까맣게 붙은 진딧물을 없애려고 농약을 사서 분무기로 뿜어준 게 한 달쯤의 전의 일이다. 고랑에 불붙듯 번지고 있는 바랭이를 뽑느라 진땀을 흘리다 만 게 한 보름쯤 되었다. 바랭이를 뽑으면서 위태롭게 달린 고추 몇 개를 따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텃밭은 서글프기만 했다. 그리고 어제, 좀 느지막하게 밭에 들렀는데 맙소사. 한발 .. 2020. 6. 19.
[2008] 고추밭, 그 후 얼마 만인가, 그저께 아내와 함께 고추밭을 다녀왔다. 그러려니 하긴 했지만 고추밭은 좀 그랬다. 동료가 심은 두 이랑은 반 넘게 시들었는데, 그나마 우리가 가꾼 이랑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밭에 대왕참나무를 심은 동료에게서 얻은 모종이 시원찮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우리가 시장에서 사다 심은 고추 모종은 키는 작지만 비교적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먼저 심었던 고추 모종은 웃자라 줄기도 잎도 부실한 상태에서 꽃이 피면서 자기 성장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몇 포기는 고추 열매를 맺었다.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상태에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은 마치 어린 나이에 배가 부른 소녀를 보는 것처럼 안쓰러웠다. 고추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땅인데도 고랑마다 이어지고 있는 바랭이의 기습은 .. 2020. 6. 19.
[사진] 소백산 죽계구곡 주변 소백산 죽계구곡(竹溪九曲) 지난 6월 6일, 아내와 함께 소백산 죽계구곡(竹溪九曲)을 다녀왔다. 초암사와 성혈사를 들른 건 물론이다. 나오는 길에 소수서원을 들렀고, 블로그에다 그 답사기를 썼다. 뒤늦게 죽계구곡 얘기를 써서 어제 기사로 올렸다. 기사를 스크랩해 오려다가 링크하기로 한다. 기사에서 블로그로 담는 스크랩은 글꼴이 작아지면서 전체적 분위기가 옹색해지는 듯해서다. 한갓진 답사기에 불과하지만 한 이틀쯤 짬을 내서 끙끙거린 결과물이다. 성혈사 얘기는 더 쓰고 싶었는데, 자료를 검색하다가 늑대별 님께서 몇 년 전에 쓰신, 훌륭한 기사가 있어서 포기했다. 늘 다녀와서야 보지 못한 것, 빼먹은 걸 깨닫는다. 며칠 전 정겨운 술자리를 나눈, 미리 공부하고 명승과 유적을 찾는 ‘이 땅에서 잘 놀기’의 주인.. 2020. 6. 18.
우리 반 고추 농사 (Ⅳ) 고추가 익다 내 고추 농사가 반환점을 돌았다. 지난 8월 초순께 마지막으로 물을 주고 난 뒤, 지난 16일 개학 때까지 녀석들은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했다. 하긴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드문 시기였으니 목이 타는 일은 없었겠다. 7월 말께엔 빨갛게 익고 있었던 녀석은 하나뿐이었는데, 보름이 지나는 동안 새끼를 친 듯 네댓 개가 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씩 자고 나면 녀석들의 뺨에 어린 붉은 기는 골고루 펴지면서 시나브로 더 고와지는 중이다. 고추 키는 더 자라지 않는다. 흙의 문제인지 보살핌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달린 열매는 길쭉하지 않은 대신 배가 볼록한, 아주 속이 꽉 찬 놈들이다. 익는 과정도 눈에 조금씩 보인다. 짙은 풀빛이 뭐랄까, 멍든 것처럼 검은 빛이 도는 우중충한 빛깔이 되.. 2020. 6. 18.
우리 반 고추 농사(Ⅲ) 장하다, 고추야! 교무실 베란다에 내다 놓은 내 고추 화분에 퇴비를 넉넉하게 묻어 주었더니 시퍼렇게 잎이 짙어지고 줄기가 실해지면서 다투어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얘긴 일찌감치 한 바 있다. 두어 포기에서 잎마름병인지, 이파리가 말라 들어간다고 근심했더니, 줄줄이 댓글을 달아주신 고참 농사꾼으로부터 마른 잎은 아까워 말고 잘라내어라, 더 자라기 전에 지지대를 세워 주어라, 벌레 잡는 데엔 설탕물도 쓸 만하다는 등의 노하우를 배웠다. 이틀 후에 학교 뒷산에서 다듬어 온 나무로 지지대를 세우고, 물이 잘 빠지도록 벽돌 두 개로 화분을 괴고 유실된 흙도 조금 보충했다. 어차피 화분이 놓인 곳은 한데니 예고 없이 내리는 비에도 끄떡없도록 채비를 한 셈이다. 그게 필요할까 어떨까 고민하다가 에라, 해서 나쁘지는 않.. 2020. 6. 18.
다시 불려나온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 왜곡하는 일본 “학대·차별 없었다”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95세 강제징용 피해자의 남은 소망은 조선인 강제 노동의 역사적 현장인 군함도(하시마)가 다시 뉴스에 불려 나왔다. 일본이 이 섬에 대한 ‘역사 왜곡’을 시도하자 외교부에서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하면서다. 외교부의 항의는 일본이 2015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할 때 한국인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알리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것이었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 당시 일본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서양의 기술이 일본 문화와 융합해 급속한 산업국가가 형성된 과정을 시계열적(視系列的)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보편적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본이 등재.. 2020. 6. 17.
우리 반 고추 농사(Ⅱ) 복합비료로 죽은 모종, 다시 심다 우리 반 교실 앞 통로에다 고추 모종 네 포기씩을 심은 화분 두 개를 갖다 놓은 건 지난 4월 24일이다. 모종을 사며 함께 산 의심스러운 ‘복합비료’가 문제였나 보다. 처음 일주일 가까이는 싱그럽게 자라는 듯하더니만 연휴 끝에 돌아오니 잎이 마르면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집에 가져가 화분에 심은 고추에서는 진딧물이 끊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처음 심은 고추는 실패였다. 미련을 끊고 뽑아 버리고, 새 모종을 심었다. 지난번에는 화분 하나에 네 포기를 심었는데, 아무래도 달다(경상도에서 ‘간격이 좁다’는 뜻으로 쓰는 말인데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싶어서 세 포기로 줄였다. 처가에서 얻어온 쿰쿰한 냄새가 나는 퇴비를 적당히 흙을 헤집고 넣어주고 며칠이 지났더니 단박에.. 2020. 6. 17.
우리 반 고추 농사(Ⅰ) 신록(新綠), 고추 심기 4월도 막바지다. 중간고사가 가까워지면서 아이들은 일제히 ‘열공’ 모드로 들어갔고, 며칠 동안 출제 때문에 끙끙대다 다시 맞는 날들이 어쩐지 수상하고 어수선하다. 한 학기가 ‘꺾여서’인지 다소 숨 가쁘게 달려온 두 달간의 팍팍한 시간이 불현듯 막연해진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기분도 없지 않다. 그래서인가, 블로그를 살피고 돌보는 일도 시들하고 심드렁해졌다. 모두들 바쁜 모양인지 오블도 대체로 그런 분위기로 느껴진다. 이웃들 집을 한 바퀴 도는 일도 뜨악해지고, 퇴근해서는 아예 컴퓨터 근방에도 가지 않기도 했다. 학교 주변에서 만나는 신록이 그나마 변치 않는 감격을 선사해 준다. 학교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언덕길 오른편은 조그만 숲인데 이 숲은 시방 .. 2020. 6. 17.
고 김관홍 잠수사의 ‘진실’과 산 자의 ‘부끄러움’ ‘구해내지 못한 아이들’ 곁으로 떠난 민간 잠수사 김관홍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그 죽음을 아파하게 될 유족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때로 망자의 삶이 환기해 주는 어떤 ‘삶의 진실’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때로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선 자리와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 김관홍(1973~2016)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2016년 6월 17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아내와 세 아이를 남겨두고 마흔셋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김관홍의 ‘진실’과 산 자의 부끄러움 김관홍은 세월호 참사 발생 7일 만에 수중 선체 수색 작업.. 2020. 6. 16.
‘박정희 고향’ 구미에서 첫 민주당 시장 탄생 ‘보수의 본산’ 구미는 왜 민주당 시장을 선택했을까 6·13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압승을 거두고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참패했다. 그것은 전국적 상황이지만 유일하게 참패를 면하면서 보수의 ‘성지’임을 거듭 확인한 동네가 대구·경북이다. 대구 시장과 경북도지사에 자유한국당 후보가 당선하면서 기초단체장도 대부분 석권한 것이다. 부산·울산·경남이 뒤집히고 대구·경북에서도 민주당이 선전한다는 뉴스가 이어지면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파란’에 대한 기대가 부풀긴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역사나’였다. 교육감도 보수 후보가 당선했는데, 대구는 단일화에 실패한 두 진보 후보가 당분간 시민들의 원성과 매를 감수해야 할 듯하다. 경북은 안동, 김천, 울진, 봉화에서 무소속 후보가 당선했지만, 이들은 대부분 .. 2020. 6. 15.
우리 시대의 부음, 떠도는 죽음들 개인적 슬픔과 불행 너머 ‘시대의 부음’들 에는 ‘궂긴 소식’이란 이름의 부음란이 있다. ‘궂기다’는 ‘(완곡하게) 윗사람이 죽다’(표준국어대사전)라고 하는 뜻의 우리말이다. 이 난에는 사회 저명 인사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게재를 요청하는 일반인들의 부음도 실리는 것 같다. 숱한 죽음이 거기 실리지만 대부분은 나와 무관한 것들이다. 그나마 낯이나 귀에 익은 이름이면 아, 그이가 죽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나와 무관한 죽음이란 세상에 넘치고 넘친다. 망자를 알든 모르든 그 죽음은 숱한 죽음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무슨 애달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8일 자 신문을 읽다가 나는 문득 한 작가의 부음을 읽었다. 소설가 임동헌 씨. 나는 등허리로 서늘하게 지나가는 전율을 희미하게 느꼈.. 2020. 6. 15.
감자 캐기, 그리고 노략질 기행 장모님의 감자 수확 돕기 어제 처가를 다녀왔다. 고추 하우스 옆에 갈아놓은 장모님의 감자를 수확하기 위해서다. 안노인이 일손도 없이 땡볕에서 감자를 수확한다고 애를 쓰실 것 같아서 아내는 일찌감치 준비했다. 일손을 돕는 것도 돕는 것이지만, 햇감자를 넉넉하게 얻어올 수 있으리라, 하는 것도 가외의 목적이다. 어정거리다 좀 늦게 밭에 나갔더니 그새, 아내와 장모님은 감자를 거의 다 캐놓았다. 거름도 거름이거니와 손을 대지 않아서……. 감자 씨알이 형편없다고 노인은 말씀하시지만, 줄기를 뽑으면 여러 개의 씨알이 거짓말처럼 허연 몸뚱이를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유쾌하다. 이 갯밭에서 이 구근식물이 굵어져 온 시간을 나는 잠깐 생각했다. 감자 씨알은 모두 제각각이다. 주먹보다 굵은 놈부터 아이.. 2020.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