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비료로 죽은 모종, 다시 심다
우리 반 교실 앞 통로에다 고추 모종 네 포기씩을 심은 화분 두 개를 갖다 놓은 건 지난 4월 24일이다. 모종을 사며 함께 산 의심스러운 ‘복합비료’가 문제였나 보다. 처음 일주일 가까이는 싱그럽게 자라는 듯하더니만 연휴 끝에 돌아오니 잎이 마르면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집에 가져가 화분에 심은 고추에서는 진딧물이 끊기 시작하고……. 결과적으로 처음 심은 고추는 실패였다. 미련을 끊고 뽑아 버리고, 새 모종을 심었다. 지난번에는 화분 하나에 네 포기를 심었는데, 아무래도 달다(경상도에서 ‘간격이 좁다’는 뜻으로 쓰는 말인데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싶어서 세 포기로 줄였다. 처가에서 얻어온 쿰쿰한 냄새가 나는 퇴비를 적당히 흙을 헤집고 넣어주고 며칠이 지났더니 단박에 잎이 짙어지고 줄기가 실해지는 듯했다.
그간 작문 시간에 현대소설 발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짐짓 고추의 생장에 견주어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넉넉하게 거름을 주어 북돋운 고추가 바로 꽃과 열매를 맺듯 충분히 준비하여 작품을 제대로 삭인 사람의 발표는 거칠 게 없다. 요컨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은 흙과 풀꽃이 온몸으로 가르치는 진실이다…….
꽃이 다투어 피기 시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흙 속에 넣어주었는데 시나브로 분해되기 시작한 거름 냄새가 열어놓은 창문을 넘어 큰아기들의 후각을 간질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름이란 향기롭지 못한 만큼 기름지다고 보면 된다. 썩으면서 유기물을 무기물로 바꾸는 이 분해 과정은 부득이 불유쾌한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원성이 아주 드높았던 건 아니었지만, 일단 화분을 피신시키기로 했다. 한 학급 건너서 교무실이고, 교무실 앞에는 베란다가 있다. 종일 햇빛이 비치는 곳이고 다른 반 아이들의 ‘손이 탈’ 염려도 없는 데라 바로 옮겼는데 하루가 다르게 고추는 푸르러 갔다.
고추꽃은 대체로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하얀 잎만 보기 쉽다. 그러나 꽃술까지 드러낸, 그것의 본색은 상당한 기품이 엿보인다. 꽃이 다투어 핀다는 사실을 알려도 아이들은 대체로 심드렁하다. 그러나 처음으로 꽃이 진 자리에서 아기 고추같이 작고 앙증맞은 열매가 얼굴을 내민다는 소식을 전하자 아이들은 그제야 반색을 했다.
현재 열매를 맺은 놈은 두 포기다. 나머지에는 개화가 한창이다. 그런데 걱정은 열매를 맺은 포기의 잎이 시방 가장자리부터 오그라들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잎마름병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 마음은 더 답답하다.
요즘 아이들은 계속된 강행군과 날씨의 변화에 얼마간 지친 기색이다. 고추가 제대로 자라나 아이들의 마음을 얼마간 유쾌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일부터 학교는 석탄일과 체험학습, ‘놀토’를 묶어 나흘간의 연휴에 들어간다. 연휴 동안에 따로 물을 주어야 하나 마나, 하고 나는 지금 공연한 고민을 하고 있다.
2007. 5. 23.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텃밭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반 고추 농사 (Ⅳ) (0) | 2020.06.18 |
---|---|
우리 반 고추 농사(Ⅲ) (0) | 2020.06.18 |
우리 반 고추 농사(Ⅰ) (0) | 2020.06.17 |
[2017 텃밭 일기 ①] 기어코 농약을 치고 말았다 (0) | 2020.05.18 |
밭, 혹은 ‘치유’의 농사 (0) | 2019.06.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