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가 익다
내 고추 농사가 반환점을 돌았다. 지난 8월 초순께 마지막으로 물을 주고 난 뒤, 지난 16일 개학 때까지 녀석들은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했다. 하긴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드문 시기였으니 목이 타는 일은 없었겠다.
7월 말께엔 빨갛게 익고 있었던 녀석은 하나뿐이었는데, 보름이 지나는 동안 새끼를 친 듯 네댓 개가 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씩 자고 나면 녀석들의 뺨에 어린 붉은 기는 골고루 펴지면서 시나브로 더 고와지는 중이다.
고추 키는 더 자라지 않는다. 흙의 문제인지 보살핌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달린 열매는 길쭉하지 않은 대신 배가 볼록한, 아주 속이 꽉 찬 놈들이다. 익는 과정도 눈에 조금씩 보인다. 짙은 풀빛이 뭐랄까, 멍든 것처럼 검은 빛이 도는 우중충한 빛깔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붉은 빛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이다.
한 포기는 좀 비실비실하다. 잎마름병인지 계속 잎이 가장자리부터 말라 들어가 보는 대로 잎을 잘라 주었더니 기운이 달리는 듯 몇 개의 실한 열매를 단 가지가 힘겨워 보인다. 땅이 척박해진 듯해서 서랍 속의 요소 비료를 한 줌 뿌려주었더니 한편에선 새로 하얗게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 꽃이 새로 열매를 맺는 건 기대하지 않으려 한다. 어차피 수확할 때가 다 된 듯하니 말이다. 물을 계속 주는 게 옳은지 잘 모르겠다. 물기 없이 말려 버리는 게 익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열린 열매만 제대로 익혀서 올 농사를 마칠까 싶다.
뒤늦게 제대로 된 무더위가 몰려왔다. 개학하면 저절로 2학기가 시작되는데, 무더위가 그런 시간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스물네 명, 내 반의 큰아기들은 좀 차분해진 듯하다. 한 아이는 기숙학원을 다녀왔고, 두 아이는 학교 보충수업 대신 집에서 독학했다.
한 녀석은 오랜 고민 끝에 인문계(문과)로 전과를 결정했다. 이과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문과로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계열마다 다른 교육과정에 적응해야 하고, 지나간 인문 과정은 따로 공부해야 한다. 내 고추 농사가 반환점을 돈 것처럼 이 아이도 1학기를 마치면서 자기 삶을 새롭게 갈무리한 셈인가.
늦어도 이달 안에는 고추를 딸 수 있겠지. 그게 얼마가 되든 아이들에게 선을 뵈고 이 농사를 마무리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흙을 파며 쏟아진 빗줄기 덕분에 열매에 잔뜩 묻은 흙을 닦아내면서 작황이 좋아서 고추 금이 작년만 못하다는 뉴스에 시름겨운 고추 주산지 영양과 청송의 농민들을 생각한다.
2007. 8.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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