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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우리 반 고추 농사 (Ⅳ)

by 낮달2018 202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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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가 익다

▲ 교무실 앞 베란다에 내놓은 가추 화분에 고추가 빨갛게 익기 시작했다.

내 고추 농사가 반환점을 돌았다. 지난 8월 초순께 마지막으로 물을 주고 난 뒤, 지난 16일 개학 때까지 녀석들은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했다. 하긴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드문 시기였으니 목이 타는 일은 없었겠다.

 

7월 말께엔 빨갛게 익고 있었던 녀석은 하나뿐이었는데, 보름이 지나는 동안 새끼를 친 듯 네댓 개가 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씩 자고 나면 녀석들의 뺨에 어린 붉은 기는 골고루 펴지면서 시나브로 더 고와지는 중이다.

 

고추 키는 더 자라지 않는다. 흙의 문제인지 보살핌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달린 열매는 길쭉하지 않은 대신 배가 볼록한, 아주 속이 꽉 찬 놈들이다. 익는 과정도 눈에 조금씩 보인다. 짙은 풀빛이 뭐랄까, 멍든 것처럼 검은 빛이 도는 우중충한 빛깔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붉은 빛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이다.

 

한 포기는 좀 비실비실하다. 잎마름병인지 계속 잎이 가장자리부터 말라 들어가 보는 대로 잎을 잘라 주었더니 기운이 달리는 듯 몇 개의 실한 열매를 단 가지가 힘겨워 보인다. 땅이 척박해진 듯해서 서랍 속의 요소 비료를 한 줌 뿌려주었더니 한편에선 새로 하얗게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 꽃이 새로 열매를 맺는 건 기대하지 않으려 한다. 어차피 수확할 때가 다 된 듯하니 말이다. 물을 계속 주는 게 옳은지 잘 모르겠다. 물기 없이 말려 버리는 게 익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열린 열매만 제대로 익혀서 올 농사를 마칠까 싶다.

 

뒤늦게 제대로 된 무더위가 몰려왔다. 개학하면 저절로 2학기가 시작되는데, 무더위가 그런 시간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스물네 명, 내 반의 큰아기들은 좀 차분해진 듯하다. 한 아이는 기숙학원을 다녀왔고, 두 아이는 학교 보충수업 대신 집에서 독학했다.

 

한 녀석은 오랜 고민 끝에 인문계(문과)로 전과를 결정했다. 이과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문과로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계열마다 다른 교육과정에 적응해야 하고, 지나간 인문 과정은 따로 공부해야 한다. 내 고추 농사가 반환점을 돈 것처럼 이 아이도 1학기를 마치면서 자기 삶을 새롭게 갈무리한 셈인가.

 

늦어도 이달 안에는 고추를 딸 수 있겠지. 그게 얼마가 되든 아이들에게 선을 뵈고 이 농사를 마무리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흙을 파며 쏟아진 빗줄기 덕분에 열매에 잔뜩 묻은 흙을 닦아내면서 작황이 좋아서 고추 금이 작년만 못하다는 뉴스에 시름겨운 고추 주산지 영양과 청송의 농민들을 생각한다.

▲ 수확한 고추가 제법이다.

 

2007. 8. 19. 낮달

 

우리 반 고추 농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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