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08] 미안하다. 내 고추, 가지야

by 낮달2018 2020. 6. 19.
728x90

▲ 가망 없는 땅이라고, 척박하다고 한동안 버려두었던 우리 밭, 그러나 고추와 가지는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다.

늦은 봄에 파종하고 나서 ‘척박한 땅’이라고 천대하며 내버려 두었던 땅이다. 자연 임자들의 가꾸고 다독이는 손길은 멀어졌다. 다락같이 오른 기름값도 한몫했다. 밭에 한번 가봐야지 않으려나? 내버려둬. 자라면 다행이고 안 되면 그만이지, 뭐. 내외는 번갈아 가며 타박을 했다.

 

하긴 제대로 줄기도 실해지기 전에 힘겹게 열매를 매단 녀석들이 안쓰럽긴 했다. 빈약한 줄기와 잎 쪽에 새까맣게 붙은 진딧물을 없애려고 농약을 사서 분무기로 뿜어준 게 한 달쯤의 전의 일이다. 고랑에 불붙듯 번지고 있는 바랭이를 뽑느라 진땀을 흘리다 만 게 한 보름쯤 되었다. 바랭이를 뽑으면서 위태롭게 달린 고추 몇 개를 따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텃밭은 서글프기만 했다.

 

그리고 어제, 좀 느지막하게 밭에 들렀는데 맙소사. 한발 앞서 밭에 들어간 아내가 고함을 질렀다. 여보, 밭이 제법 꼴이 돼 가요! 정말, 우리가 가꾸는 고추 이랑은 제법 검푸른 빛을 띠면서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굵어지기 시작한 고추도 때깔과 모양이 제법이었다.

 

▲ 이 모래땅, 가뭄을 이기고 가지는 제 몫의 구실을 다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추 이랑 가녘에 심었던 가지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일렬횡대로 늘어선 가지 대여섯 포기에 제법 굵다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도 녀석은 꽃을 피우고 그리 실하지 못한 줄기로 힘겹게 그 열매를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 수확한 고추와 가지는 금방 광주리에 가득하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건너다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우리는 좀 부끄러웠을 것이다. 워낙 땅이 척박하니 무엇을 기대하겠느냐고 버려두자고, 아예 내놓은 자식처럼 팽개쳤던 내 밭의 고추와 가지 앞에 우리는 민망했다. 같은 입으로 다른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임자를 보면서 녀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보, 조금만 가꾸어 주면 밭이 되겠어. 이렇게 자란 것 좀 봐요. 올핸 늦었지만, 내년에는 제대로 거름 넣고 보살펴 주면 실하게 거둘 수 있겠어요……. 날이 금방 어두워져 왔다. 나는 봉지에 담고 온 금비(金肥) 한 움큼을, 나중에 심어 아직도 대가 약해 뵈는 몇 그루의 고추와 가지 옆에다 뿌리고, 찻집의 수도에 호스를 이어 듬뿍 물을 주었다.

 

▲ 버려두었던 밭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풍성한 수확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냈다. 미안하다, 내 고추, 가지야!

미안하구나, 내 고추, 가지야. 아내와 함께 밭을 떠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주인의 발걸음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도 너희들 혼자 힘으로 이렇듯 실하게 자랐구나……. 대지는 만물의 어머니라는 명제는 수사로 존재하는 진부한 비유가 아니다. 그렇다. 땅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그 황톳빛 속살로 감싸 살려내는 것이다.

 

척박한 모래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작물 앞에서 일상의 감옥에 갇혀 사는 얼치기 농사꾼은 문득 땅의 너그러움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의 기름짐과 거칢이 생래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갈고 일구는 사람의 몫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고야 마는 것이다.

 

 

2008. 7. 7.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