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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118

야은 길재, 삼은 가운데 우뚝한 ‘절의의 상징’ [선산 톺아보기 ⑨] 야은 길재를 기리는,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야은 길재(1353~1419)를 기리는 빗돌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는 오태동, 남구미 나들목 근처에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빗돌은 1587년(선조 20)에 인동 현감으로 있던 겸암(謙唵) 류운룡(1539~1601)이 길재의 묘역을 정비한 뒤 주변에 사당과 오산서원(吳山書院)을 창건하고 그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인동현감으로 있던 류운룡이 세운 낙동강 강변의 지주중류비 1585년에 인동 현감으로 부임한 류운룡은 3년 차인 1587년(선조 20)에 길재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한 역사(役事)를 벌였는데 이 빗돌은 그것을 매조지는 일이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오산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사액 되었으나, 대원군의 서.. 2022. 3. 11.
그 도서관에 의로운 ‘소와 사람’의 빗돌이 함께 있다 [도서관의 문화재 ①] 구미시립 봉곡도서관의 의우총과 정려각, 구황불망비 도서관에 가면 ‘문화재’가 있다고 하면 어리둥절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경북 구미에 있는 시립도서관 여섯 군데 중 세 곳이 그렇다. 원래 다른 데 있던 빗돌인데, 도시개발로 제 자리를 잃고 옮겨온 것들이다. 지자체마다 이들을 따로 모아 관리하는데, 박물관이 없는 도시라, 도서관 뜰에 이들을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들 오래된 빗돌이 전하는 서사를 따라가 본다. 지난 2007년에 문을 연, 우리 동네의 구미시립 봉곡도서관 구내에는 돌비가 셋이나 서 있다. 두 기는 고종 연간에 흉년으로 굶주린 이웃을 위해 곳간을 열어 이들을 구제한 이를 기린 빗돌이고, 나머지 하나는 ‘의로운 소의 무덤’, 곧 ‘의우총(義牛塚)’ 비석이다. 개의 경.. 2022. 3. 11.
구미사람들과 북봉산, 그리고 ‘새마을’ 대청소 북봉산과 새마을 대청소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자리 잡는 대로 뒷산도 다녀오고, 인근 재래시장 따위를 한 바퀴 돌아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움직일 만하면 한파가 찾아오곤 해서 나는 고작 인근 할인점 구경 정도만 했었다. 그래도 옮아온 지 한 달이 지나자, 조금씩 이 도시의 공기와 정서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사 오고 사나흘쯤 후에 인근의 목욕탕에 들렀다. 규모가 꽤 큰 온천이었는데 설 대목이라서인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목욕하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는데 목욕탕을 나서면서 그 정체를 깨달았다. 나는 저도 몰래 우리 식구들이 즐겨 찾았던 안동의 학가산 온천과 이 욕탕을 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균연령 34세, ‘젊은 도시’ 구미 규모는 안동 쪽의 것이 크다. 그런데 .. 2022. 3. 2.
[선산 톺아보기 ⑧] 청백리 짚신 건 선돌, 이제 무심히 지나는 바위 되었네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입석(立石)은 우리말로 ‘선돌’이라고 부른 돌기둥이다. 학술적으로는 “선사시대에 땅 위에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한 큰 돌을 하나 이상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 등으로 삼은 돌기둥 유적”이라고 정의한다. 입석은 선사시대에는 주로 고인돌[지석묘(支石墓), dolmen] 주변에 세워 묘의 영역을 나타냈다. 역사시대에 와서는 마을 입구에 세워 귀신을 막거나 경계를 표시했고, 토착 신앙과 합쳐져 장수를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비보풍수(裨補風水)와 인동입석 출포암 안동 입석은 진평동 627-4번지, 진평동사무소 맞은편에 있다. 원래 3기가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는 2기만 남았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 입석이 ‘출포암(出捕岩)’이라 .. 2022. 2. 23.
[선산 톺아보기 ⑦]‘주화매국’ 화강암에 새긴 척양(斥洋)의 의지 [선산 톺아보기 ⑦]구포동 구미 척화비(斥和碑) 구미 척화비는 구포동 산 52-1번지에 있다. 2020년 9월 첫 방문 때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갔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빗돌은 구미시 구포동의 구미 3공단에서 구미 2공단으로 넘어가는 솔뫼 고개의 도로변에 있지만 비탈에 드러나지 않게 돌아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이 1871년에 서울과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1871년, 서울과 전국 각지의 길가에 세우도록 한 빗돌이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는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 2022. 2. 21.
시장은 ‘태극기 집회’에, 시민들은 ‘촛불’로 모이다 오늘(2월 11일) 5시 30분부터 구미역 광장에서 스물두 번째 촛불이 켜졌다. 서울은 ‘15차 범국민행동의 날’인데 구미 촛불이 스물두 번째가 되는 이유는 8월 26일부터 시작된 ‘한반도 사드 배치 반대 구미 시민 촛불문화제’가 7차례에 걸쳐 먼저 베풀어졌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 ‘구미맘(mom)’들이 밝힌 사드(THAAD) 반대 촛불] 시민이 지킨 스물두 번째 촛불 매운 날씨에도 역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백여 명 남짓이다. 42만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보잘것없는 숫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뜻으로 나온 이들이다. 김천 사드대책위에서 보내주었다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오리털 파카를 꼭꼭 여민 시민들의 열기도 만만찮았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집회는 얼마간 고양된 가운데 계속.. 2022. 2. 17.
[선산 톺아보기 ⑥] 절의의 도학자 야은 모신 서원과 조선 귀족 김사철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金烏書院) 처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찾은 건 2013년 2월이다. 2012년 구미로 학교를 옮기고 1년 후였다. 선산읍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오서원 이정표를 보고 망설이지 않고 차를 돌린 것이다. 서원에 관해 최소한의 정보도 없는 상태의 깜짝 방문이었는데, 나는 서원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애걔걔, 하고 서둘러 발길을 돌렸었다. 오래 안동에 살면서 인근의 서원과 정자를 적잖이 돌아본 터수라, 내게는 고건축물에 대한 어떤 정형의 이미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소수서원 등의 유명 서원 건축이 보여준,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에도 지울 수 없는 ‘퇴락’의 이미지다. 나는 서까래나 추녀, 대청과 툇마루, 분합문과 문설주 따위에 묻은 손때처.. 2022. 2. 14.
[선산 톺아보기 ⑤] 구미 의우총 이야기, 소의 의로움이 이와 같았다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가끔 들르는 우리 동네의 구미 시립 봉곡도서관 구내에는 돌비가 두 기 서 있다. 하나는 고종 연간에 세운 구황불망비(救荒不忘碑)고 다른 하나는 ‘의로운 소의 무덤’이라는 ‘의우총(義牛塚)’ 비석이다. 개의 경우는 ‘의견(義犬)’, 또는 ‘의구(義狗)’라 하여 무덤으로 기리는 예가 있지만, “웬 소?” 싶으면서도 무심코 지나다닌 지 여래 해가 지났다. 의견 설화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은혜를 갚는 개에 관한 설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로 전국에 분포해 있다. 그중 가장 지배적인 유형은 ‘들불을 꺼 주인을 구한다는 유형’, 이른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이다. 술에 취한 주인이 들판에서 잠들었는데 불이 나자, 개가 제 몸을 .. 2022. 2. 10.
[선산 톺아보기 ④]‘짝퉁’ 이름의 구미 대둔사, 보물 넉 점을 품고 있다 [선산 톺아보기 ④]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대웅전과 건칠(乾漆) 아미타여래좌상과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등 보물이 세 점이나 있다는 대둔사(大芚寺)가 옥성면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도 한동안 나는 길을 나서지 못했다.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옛 이름이기도 한 대둔사가 구미에 있다는데 어쩐지 그게 무슨 짝퉁인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미덥지 않아서였다. 차일피일하다가 길을 나선 건 2020년 8월 말이다. 날씨가 꽤 더웠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음이 내킨 것이다. 내비게이션을 앞세우고 절집을 찾아가는데, 상주로 가는 국도를 타고 가다가 국도를 버리고 샛길로 들어섰다. 샛길도 잠깐, 내비게이션은 야트막한 산길로 가잔다. 야트막하다고 느낀 건 착시, 차는 꽤 가파른 산길을 위태롭게 타야 했다. .. 2022. 2. 7.
[선산 톺아보기 ③] 무관 출신 문인 박영, 송당학파로 영남 학맥을 잇다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 정사 선산읍 신기리에 있는 송당정사(松堂精舍)를 찾은 것은 지지난해 8월 말이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갔는데, 이쪽 지리에 어두워 선산인지는 알겠는데 선산 어디쯤인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 야트막한 언덕에 수더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정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관에서 영남 사림 학맥을 이은 문인으로 송당정사는 조선 중기 무신이자 문인인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이 1496년(연산군 2년)에 낙향하여 낙동강 강가에 세워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강학(講學)의 공간이다. 1860년대에 중건된 송당정사는 2016년 9월 경상북도의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송당 박영의 본관은 밀양. 조부는 안동 대도호부사 박철손, 부친은 이.. 2022. 2. 5.
선산(善山) 톺아보기 - 프롤로그 왜 ‘구미’ 대신 ‘선산’ 인가 ‘구미시민’이 된 지 한 주일이 지났다. 구미는 내 고향인 인근 칠곡군 석적읍 옆 동네니 내가 이 지역으로 돌아온 것도 두루뭉술하게 ‘귀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를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자락은 한편으로 이 지역을 굳이 ‘객지’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한끝과 만난다. 1970년대 초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구미읍이었다. 구미가 시로 승격된 것은 1978년이었고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이다. ‘선산군 구미읍’이었던 시절이 옛말이 되면서 ‘선산(善山)’은 ‘구미시’의 조그만 소읍으로 떨어졌다. 구미로의 ‘귀향’? 내 기억 속의 ‘구미’가 특별한 의미를 새.. 2022. 1. 26.
역사를 기억하는 법…, 성주읍성과 백년설 노래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주읍성’ 읍성(邑城)이라면 퍼뜩 떠오르는 건 고창읍성·순천 낙안읍성·서산 해미읍성 등 지금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읍성이다. 그러나 “마을이나 도시 같은 중대 규모 거주지를 치안, 행정, 방위의 목적으로 방벽으로 둘러친 성곽형 방어시설”로 정의되는 읍성은 한중일 삼국뿐 아니라 중동과 유럽 등에서도 두루 발견되는 시설이다. 성주읍성 복원과 함께한 성주역사테마공원 원형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일부 성곽 등이 남아 있는 읍성으로는 한양 도성(都城)을 비롯하여 부산의 동래읍성, 울산의 언양읍성, 경기도의 수원 화성, 전남의 강진읍성, 전북의 고창읍성, 경남의 사천읍성, 경북의 경주읍성과 청도읍성 등이 있다. 성주에도 물론 읍성이 있었다. 그것은 읍내를 안고 흐르는 이천(伊川) 주변의 왕.. 2022.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