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36

쑥갓 맛을 새로 배우고 익히다 잘 안 먹던 쑥갓을 새로 먹으며 맛을 익히다 벗 세한도는 나를 두고 ‘미식가’라고 이른다. 글쎄, ‘맛있는 음식을 가려 먹는 특별한 기호를 가진 사람’이라는 본뜻으로라면 나는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그게 단지 ‘입이 좀 까다로운 사람’이거나 ‘맛에 좀 예민한 사람’이라는 의미라면 동의할 수 있다. 입이 까다로워서 어릴 적부터 잘 먹지 못하는 게 많았다(이는 미식가의 자질에 한참 못 미치는 특성이다). 비린 것을 꺼려서 젓갈을 넣은 김치(우리는 이를 ‘젓지’라고 했다)를 먹지 않았고, 읍내의 국수 공장에서 빼 오는 소면(‘왜국수’라고 했다)도 비린내가 나서 잘 먹지 않았다. 나는 향에 예민하다 무엇보다 나는 향신료(香辛料) 맛에 예민한 편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향신료를 많이 쓰는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의 .. 2021. 6. 2.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며 아흔일곱 김형석 교수와 강골의 투사 오종렬 선생 5월호에 김형석 교수의 글 한 편이 실렸다. ‘그분의 충고’라는 짧은 수상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 백수를 앞둔 철학자가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192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아흔일곱 살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다. 맏형님이 사다 놓은 게 분명한 그의 수상집, 를 통해서다. 제목에도 한자를 섞어 쓴 그 책을 나는 아무의 도움 없이 읽어냈다. 내용은 희미하게 떠오르는데 주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글이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같은 출판사(삼중당)에서 문고본으로 나온 이 책을 다시 샀는데 그걸 다시 읽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나는 그의 글을 다.. 2021. 5. 17.
은퇴 전후, 아내의 우울 남편의 퇴직과 아내의 우울 17일을 좀 거시기한 기분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했다. 그런데 25일은 좀 심상하게 맞았다. 아내가 입원했다가 이틀 만에 퇴원하는 바람에 그걸 달리 곱씹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전날 밤 나는 연금공단으로부터 ‘3월 연금 지급 예정 내역 안내’라는 제목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당월 연금소득세와 연금주민세까지 공제하고 난 금액은 마치 현실감이 떨어진 숫자 같아서 내가 받을 돈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지나가듯 연금이 들어왔다고 얘기했는데 다행히도 아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넘어갔다. 이제 아내도 이걸 현실로 받아들여야겠지, 하고 나는 우정 대범하게 생각하려 했다. 아내의 눈치를 예민하게 살피게 된 건 요즘 들어서다. 지난 설 연휴 때부터 앓기 시작한 독감 후유증으.. 2021. 3. 29.
‘자유인’으로 첫발 내딛기 퇴직, 자유인으로 출발 어쨌든 2월 한 달은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마다 두서가 없어서 몸과 마음이 두루 어정쩡하고 애매했다. 딱 부러지게 어떻다고 하지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도 못하는 요령부득의 시간이 속절없었다. 3월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새날을 맞을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일요일 오후엔 머리를 깎았고 다음날 아침엔 공중목욕탕을 다녀왔다. 해마다 새 학년도를 앞두고 만날 아이들을 그리면서 준비하던 일상을 나는 자유인으로 맞이할 날에 고스란히 되풀이한 것이다. 금오산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마지막 토요일엔 금오산 어귀를 찾았다. 얼음 사이에서 봄을 부르는 꽃, 흔히들 복수초(福壽草)라 부르는 얼음새꽃을 찾아서였다. 이 꽃을 검색하다가 경북.. 2021. 3. 4.
가시지 않는 통증, ‘수지침’ 세트를 꺼내다 어깨 통증 때문에 잊었던 ‘수지침’을 떠올리다 1989년 여름에 해직되었다가 1994년 봄에 복직했던 동료들 사이엔 해직 기간의 ‘3가지 성취’가 이야기되곤 했다. 첫째가 운전면허 취득이었고, 둘째가 컴퓨터 공부, 셋째가 수지침(手指針) 공부였다. 4년 반에 이르는 해직 기간은 비록 교단에서 배제되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걸 익힐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글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걸 이루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나도 거기에 낄 수 있었다. 1991년 1월에 운전면허를 땄고, 해직 기간에 286에이티(AT) 컴퓨터를 장만하여 부지런히 컴퓨터를 공부했고, 연수를 통해 흉내를 낼 정도의 수지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1989년 겨울에 우리는 이삼일쯤 말미를 내어 서울에.. 2021. 1. 7.
겨울나기 ‘내복’과 차표 ‘사고’ 내복 입기, 그리고 차표 실수를 몇 차례 저지르다 이번 겨울을 나면서 여느 겨울과 달라진 것은 간간이 내복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내복을 벗어버린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복을 입으면 따뜻해서 든든하다기보다는 답답한 느낌이 컸던 것은 한창때여서 그랬을 것이다. 그 무렵엔 옷을 입어도 맵시가 통 나지 않는다며 내복을 입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군 복무 시절엔 멋보다는 방한이 더 요긴한 문제여서 지급받은 겨울 내의를 절도록 입고 지냈다. 겨울을 나면서 내의를 빨아보면 서너 번씩 헹구어도 아크릴 사(絲)의 갈색 내복에선 땟물이 끝도 없이 우러나올 정도였다. 제대하고 나선 다시 내복과 멀어졌다. 아예 안 입은 것은 아니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내복을 챙겨 입곤 했지만, 그런 날이 겨우내 몇 .. 2021. 1. 2.
병, 혹은 ‘몸의 배신’? 노화와 함께 찾아오는 병, 몸의 배신일까 11월의 첫 주말인데 근 열흘째 나는 두문불출 중이다. 지난달 27일 산을 오르다 오른쪽 종아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10일에는 경주 남산 답사를, 12일에는 서울을 다녀올까 하는데 그때까지 다리가 말끔히 낫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좀 답답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란스러웠던 시간을 넘기고 간신히 생활이 가지런해졌다 싶어진 게 10월이었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넘게 산을 다녀오고, 음식 조절을 하면서 체중도 얼마간 빠졌고 아내도 예전의 평상심을 되찾았다. 독감 예방접종과 건강검진 지난겨울의 막바지에 둘 다 호되게 독감을 앓았던지라 아내는 올겨울엔 꼭 독감 예방접종을 하자고 했다. 보건소에서 실시하는 예방접종 소식을 확인한 뒤 19일에 우리는 보건소를 찾았다. 민간 .. 2020. 12. 28.
딸애의 생일 미역국을 끓이다 여행 떠난 아내 대신 딸의 생일 미역국을 끓이다 요즘 남편들은 아내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는 게 ‘기본’이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 ‘기본’도 못하고 살았다. 글쎄, 서툰 솜씨로 억지로 지어낸 음식이 제맛을 못 낼 게 뻔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새삼스레 시류를 좇아가는 것도 마뜩잖아서였다. 난생 처음 미역국을 끓이다 배워서라도 해 볼까 물으면 아내는 단박에, ‘됐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편하게 받아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선물을 하거나 얼마간의 돈을 넣은 봉투를 주는 걸로 그날을 넘겼고, 미역국은 딸애가 끓이곤 했다. 아내가 지난 월요일에 교회 일로 캄보디아로 떠나고 나서 일이 겹쳤다. 지역 농협에서 판매하는 김장용 배추를 사놓아야 했는데 그건 해마다 우리 내외가 새벽에 나가 함께 해 온.. 2020. 11. 22.
꽃은 ‘때가 되어야 핀다’ 다시 만난 ‘나의 산’, 북봉산 지난 8월에 산 아래로 돌아와서 북봉산을 다시 만났다. 5년 전에 만났던 산이지만 지금 내게 북봉은 옛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산은 옛 산이로되 예전의 그 산이 아니로다.”이다. 북봉산이야 물론 5년 전이든 지금이든 똑같이 거기 있는 산일 뿐이다.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산이 변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내가 그 ‘산에게로 갔다’ 변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이다. 무엇이 묵은 산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을까. 다섯 해 전에 만난 그 산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스치는 산에 지나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거기 오르긴 했지만, 그 산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나는 자신과 이으려 하지 않았다. 변화는 다시 그 산자락에 남은 삶을 부리고, 서재 이름을 ‘북봉재(北峯齋)’라고 붙이면.. 2020. 9. 30.
내가 일할 때는 아내가 차마 요구하지 않았던 일 [퇴직 이후, 생활의 복원] 재활용 쓰레기 배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들거나 재활용 쓰레기를 가득 담은 수레를 밀고 가는 남자들을 만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출근 시간에 쓰레기봉투를 쓰레기장의 폐기물 보관 용기에 서둘러 집어넣고 종종걸음을 치는 젊은 남자를 보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제 더는 집안일이 여자 몫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하는 일이 된 것이다. 퇴직하기 전에만 해도 내가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내가 바빠서 손이 모자라거나, 내가 하던 작업을 정리하느라고 가끔 쓰레기장에 들르는 일이 고작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손수 버린 기억은 따로 없다. 뒷날, 아내는 '종일 일하다 들어온 이한테 그거까지 해 달라고 하기가 거시기해서' 차마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 2020. 7. 17.
‘아내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에 숟가락을 걸치다 [퇴직 이후, 생활의 복원] 나의 시간이 가고 아내의 시간이 왔다 2016년 2월, 32년간의 교단생활에서 물러났다. 정년이 남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걸 깨닫고 주저 없이 학교를 떠났다. 물론 그건 남은 동료들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4년, 생계를 위한 노동과 그것이 규정하는 일과에서 벗어나 나는 완벽한 ‘자유인’이 되었다. ‘완벽한 자유인’이 되었다, 고 생각했지만 내가 얻은 것은 자유라기보다는 ‘일상’과 ‘생활’이었다. 일터에서 돌아와 휴식하는 공간이었을 뿐인 집이 비로소 내 삶의 가장 주요한 공간이 되었다. 퇴직 후 내가 한 일은 내 일상과 생활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나는 늘 일해 가용(家用)을 벌어왔고 아내는 전업주부였다... 2020. 7. 7.
‘노화’가 슬슬 두려워지는가 몸으로 느끼는 ‘노화’, 그리고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를 ‘안 본 지 꽤 되었다’라고 쓰다가 헤아려보니 반드시 그런 게 아니다. 이른바 ‘본방을 사수’한 드라마는 ()과 () 정도였던 것 같다고 쓰는데 다시 얼마 전에 이성민이 주연한 () 역시 거기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드라마 선호’가 노화의 증거? 딸애가 서울에 있는 제 남동생에게 내 근황을 전했더니 녀석이 그랬단다. 아버지께서 드라마를 즐기시는 것 같은데 그건 노화나 여성화의 한 증상일 수 있다고. 그럴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드라마를 즐겨 본다’라고 쓰는 게 훨씬 사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일부러 텔레비전을 피하지 않는 이상, 딸애가 ‘드라마의 여제(女帝)’라 부르는 아내와 생활하면서 드라마를 아주 안 .. 2020.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