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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딸애의 생일 미역국을 끓이다

by 낮달2018 2020.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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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난 아내 대신 딸의 생일 미역국을 끓이다

▲ 아이는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잘라서 나누어 주었다. 사진은 오래전 아내 케이크. .

요즘 남편들은 아내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는 게 ‘기본’이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 ‘기본’도 못하고 살았다. 글쎄, 서툰 솜씨로 억지로 지어낸 음식이 제맛을 못 낼 게 뻔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새삼스레 시류를 좇아가는 것도 마뜩잖아서였다.

 

난생 처음 미역국을 끓이다

 

배워서라도 해 볼까 물으면 아내는 단박에, ‘됐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편하게 받아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선물을 하거나 얼마간의 돈을 넣은 봉투를 주는 걸로 그날을 넘겼고, 미역국은 딸애가 끓이곤 했다.

 

아내가 지난 월요일에 교회 일로 캄보디아로 떠나고 나서 일이 겹쳤다. 지역 농협에서 판매하는 김장용 배추를 사놓아야 했는데 그건 해마다 우리 내외가 새벽에 나가 함께 해 온 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김장철 배추가 꽤 비쌌다. 농협이 좋은 배추를 싸게 팔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새벽에 나가서 두어 시간 줄을 서야 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나갔더니 올 배추 금은 헐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번호표를 받아 귀가했다가 8시에 나가서 서른 포기를 사 왔다. 크고 실한 배추가 포기에 500원이니 정말 싸다. 새벽잠을 포기하면서까지 농협 배추를 사는 것은 값도 값이지만 배추가 좋아서다. 김장김치의 성패는 배추의 맛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내일이 딸애의 생일이라 들어오면서 제과점에 들러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사 왔다. 들어올 때만 해도 아침에 촛불이나 켜자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 있었다. 마침 아내가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어와 어떡할까 했더니 어렵지 않다, 미역은 있고, 쇠고기 만 원어치만 사서 끓여주라고 했다.

▲ 내가 어설프게 끓여낸 미역국 사진은 백업 과정에서 잃었다.  ⓒ 해외문화홍보원

한번 해 볼까나. 요리를 해 본 일이 드물긴 하지만 조리법대로 따르면 이상한 맛이 될 일은 없을 터였다. 나는 동네 마트에 가서 양지머리 200그램을 사 왔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조리법을 인쇄하여 그걸 보면서 미역국을 끓였다.

 

이미지까지 곁들인 조리법이 아니라 텍스트만 출력해서였을까. 끓여 놓고 나서야 몇 가지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다. 우리 집에선 미역국을 끓일 때 쓰지 않는 마늘을 넣은 것부터 고기와 미역을 볶을 때 국 끓일 냄비가 아닌 프라이팬을 쓰는 바보짓을 했다.

 

냄비에서 고기와 미역을 볶고 거기다 물을 부어 국을 끓이면 될 일을 나는 프라이팬에서 볶은 후 이를 냄비로 옮기는 가욋일까지 한 거였다. 게다가 간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아서 몇 번인가 물과 간장을 넣는 걸 거듭했다. 조리가 끝나고 한 숟갈 맛을 보았는데 좀 요령부득의 맛인 듯해서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딸애가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서 ‘괜찮은데요, 맛있어요.’라고 했을 때는 뭐랄까, 낙방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턱걸이로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듯했다. 딸애가 아비의 첫 요리에 점수를 후하게 준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게 위로가 됐다.

 

아비가 되고 딸이 된 세월

 

딸애가 태어난 곳은 고향의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그 병원의 이름은 ‘자선산부인과’였다. 대학 졸업 전이어서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아이를 낳으려 병원에 갔다고 했다. 요즘 같으면 바로 쫓아갔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그랬다.

 

아비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어른 밑에 살면서 그런 걸 챙기는 게 민망하게 여기던 시절이라 나는 그날 밤 혼자서 잤던 것 같다. 시골이었고, 전화도 없었고, 차편도 마땅찮을 때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찌 그리 띨띨했는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 딸애에게 전해준 생일카드

다음날, 아내가 귀가했을 때야 처음으로 아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곱고 얌전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신기하면서도 아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유난히 똘똘했던 아이는 말도 빠르고 걷는 것도 빨라서 젊은 어버이를 기쁘게 해 주었고 조부모님의 사랑도 독차지했다.

 

세 살 터울의 제 남동생의 백일이 아이의 할아버지 출상이었다. 온 가족들의 눈물 바람 속에 상여가 집을 나설 때 녹색의 나무 대문을 붙들고 눈이 빨개지도록 울어대던 아이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관련 글 : 목수 아버지의 추억]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나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본 글 한 편을 썼다. [관련 글 : 사진첩, 함께한 시간과 가족의 발견] 그러고 보니 어느새 그 까마득한 시절로부터 서른 해가 훌쩍 넘었다.

 

그동안 나는 학교를 떠났고, 60대로 진입했고 어머니도 장인 장모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집안에 부모님 세대 중 살아계신 분은 불과 몇 분의 인척뿐이다. 어느덧 우리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

 

나는 제과점에서 사 온 생일 카드에다 몇 자를 적었다. 부모 자식 사이라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속내를 너나없이 나누지 못하는 때가 적지 않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자식은 또 자식대로 저마다의 아픔과 고독이 있는 법이다. 그걸 서로 모른 척하는 것밖에, 다른 대처법을 몰라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고 있는 때가 좀 많은가.

 

“생일 축하한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네 가능성을 믿고
네가 꾸려갈 ‘너의 삶’을 응원한다.”

 

쇠고기와 함께 사 온 삼겹살을 구워서 아이와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아이는 모처럼 밥 한 그릇을 비웠다.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흐뭇해지는 건 모든 어미 아비의 마음 아닌가. 모레 아내가 돌아오면 셋이서 나가서 맛있는 식사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나는 곱씹고 있었다.

 

 

2017. 11.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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