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일곱 김형석 교수와 강골의 투사 오종렬 선생
<공무원연금> 5월호에 김형석 교수의 글 한 편이 실렸다. ‘그분의 충고’라는 짧은 수상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 백수를 앞둔 철학자가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1920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아흔일곱 살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다. 맏형님이 사다 놓은 게 분명한 그의 수상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통해서다. 제목에도 한자를 섞어 쓴 그 책을 나는 아무의 도움 없이 읽어냈다. 내용은 희미하게 떠오르는데 주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글이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같은 출판사(삼중당)에서 문고본으로 나온 이 책을 다시 샀는데 그걸 다시 읽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나는 그의 글을 다시 읽지 못했다. 1960년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영원과 사랑의 대화> 이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저서가 없었던 것일까.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여러 지면에 소개된 그의 기사나 인터뷰를 읽으면서 나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을 철학 교수로 산 그는 지난해와 올 상반기에만 신간과 개정판 등 4권의 책을 냈다. 그 중 <예수>(2000)와 <어떻게 믿을 것인가>(1995)는 절판된 책을 다시 냈는데 <예수>는 1만 권 이상 팔렸다. [관련기사 : “예수는 혁명가…교회가 곧 기독교라는 생각은 위험”, ‘어떻게 믿을 것인가’ 개정판 김형석 명예교수 “지금의 교회, 교리만 있고 윤리의식은 없어”]
백수에 가까운 상노인이 쓴 기독교 관련 서적이니 진부한 신앙고백을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수의 ‘혁명가적 정신’을 강조하는 그는 책을 통해서 ‘교회 안에 기독교 정신’이 없고 한국 교회의 비정상적인 ‘교회주의’를 걱정하고 있다.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해 온 이 철학자는 지금도 하루 두 차례의 강연을 하고 원고지 40장 이상의 글을 쓴다고 한다. 1985년 연세대에서 정년을 맞은 뒤 15년 동안 강연하고 글을 쓰다가 80세가 되어 쉬려고 하니까 재미도 없고 건강도 나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활동하니 어느덧 30년이 지났다고.
그의 삶을 간단히 “늙었지만 의욕이나 기력은 점점 좋아짐. 또는 그런 상태.”를 뜻하는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낱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나이에 비겨서 건강이 좋고 활기가 넘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가 꾸준히 영위하고 있는 것은 장년에 못지않은 지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아흔일곱 김형석 교수의 노익장
<공무원연금>에 실린 글은 마흔을 앞둔 시절을 회고하면서 어느 원로 교수가 해준 충고를 회고하고 있다. 세배를 갔다가 새해 계획을 묻기에 ‘방송이나 강연 일은 줄이고 학교 일에 열중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 노교수가 따로 불러서 ‘사회가 요청하는 일은 거절하지 마라, 그게 애국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그 노교수의 충고대로 열심히 사회활동을 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아흔일곱 살, 그 나이까지 살 수 있는 사람도 절대 많지 않다. 그뿐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그렇게 살라고 권하기도 쉽지 않다. 그건 자칫하면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가 해온 사회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해온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겠다. 한 달에 스무 번 이상 강연을 하는 일은 아무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글을 읽고 나서 잠깐 정년을 남겨두고 서둘러 퇴직을 해 얻은 여유를 누리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우리 같은 무명소졸의 삶을 감히 선생의 삶과 비길 일은 없다. 그러니 그걸 기준으로 자신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고령의 철학자가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삶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퇴직하는 시기가 일러지는 것은 단순히 삶의 태도와 관련되는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일자리의 문제이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처럼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정년 이후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제기된 정년 연장 논의가 무색해질 만큼 일자리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교직도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지역에 따라 평균 연령이 높은 곳은 다소 다르긴 하지만 50대 중반만 되면 자연스레 활동적인 지위나 역할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본인의 희망에 따르는 형식이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그런 추세가 강제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체력이든 아이들과의 눈높이를 맞추는 문제든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게 되면서 자신의 위치를 뒤로 물리는 게 비난받을 일은 절대 아니다. 굳이 정년을 채우지 않고 서둘러 학교를 떠난 것은 그런 현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나는 우정 생각한다.
그런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맡는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들의 용기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뭔가 미진한 느낌을 떨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체력적 한계나 눈높이의 부조화를 뛰어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서 있는 자리와 그 구실
나는 30대 초반에 시작한 노동조합 활동을 40대의 막바지에 접었다. 역시 내 활동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였다. 나는 지쳤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평조합원으로 돌아왔다.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도 대충 그 나이에 일선에서 물러났으니 특별히 내가 너무 이르게 활동을 떠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우리 연배를 이은 친구들이 지금 50대 중반이 된 후배들이다. 이들은 우리에 비하면 훨씬 오랜 기간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이미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도 이들은 여전히 현역에 버금가는 활동을 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 명퇴한 선배 교사 한 분을 모시는 자리를 만들려고 날을 받는 과정에서다. 버릇대로 금요일이 어떠냐고 했더니 한 친구는 지역 시민단체 회의 때문에, 또 한 친구는 ‘공부 모임’이 있다고 했다. 회의와 공부 모임…. 금요일을 피해 날짜를 정하고 나는 잠깐 자신과 이 친구들과의 거리를 생각했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더 활동적이고, 또 어떤 이들은 이르게 활동을 떠난다. 그게 자연스러운 순환이라면 그걸 시비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이 떠났다고 해서 마음까지도 떠나와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거듭하는 것은 여전히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흔여덟 노구를 이끌고 지금도 현역인 오종렬(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선생님 같은 분을 생각하면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법외노조가 되면서 현장 복귀를 거부한 전교조의 전임 활동가들은 모두 직권면직이 되었고, 복귀한 간부들은 시국선언 주도 혐의로 징계에 넘겨졌다.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오는 6월에 퇴직 조합원들의 모이는 행사가 있다기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게 말하자면 내게 주어진 구실인 셈이다.
2016. 5. 17. 낮달
7년 전에 쓴 글인데, 내가 김형석 교수를 잔뜩 오해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아흔일곱 그의 노익장이 놀랍다면서, 일찌감치 지쳐 나가떨어진 자신을 돌아보고, 일흔여덟 노구를 이끌고 투쟁의 현장을 누비고 계신 오종렬 선생을 떠올렸었다.
그가 예수의 ‘혁명가적 정신’을 강조하는 책을 통해서 ‘교회 안에 기독교 정신’이 없고 한국 교회의 비정상적인 ‘교회주의’를 걱정하는 걸 보면서 그가 예사롭지 않은 지성을 지닌 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이해한 김형석 교수는 그냥 ‘노익장’에 불과했었던 것 같다.
2021년에 그가 보였던 ‘흑백논리’를 비판한 이는 언론학자 손석춘 교수다. 그는 김 교수가 문재인 정부를 “사회주의적 경제관을 절대시하는 과오”를 범한다거나 “150년 전 계급투쟁의 폐습을 계승”한다는 주장을 펴온 사실을 들며 그가 ‘흑백논리’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흑백논리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 : 101세 철학자의 끝 모를 흑백논리]
당시 나는 김 교수가 100세를 넘기면서 판단력이 흐려졌거나, ‘묻지 마 보수’가 되었나 하고 넘겨 버렸다. 어쨌든 그가 더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도 김 교수는 <중앙일보> 칼럼(20대 일본 유학서 깨달은 것 “왜 열심히 일해야 하나” 3월31일)과 <동아일보> 칼럼(과거의 연장으로는 국가적 후진성 극복 못 한다, 4월7일)에서 이른바 ‘이상한 철학’을 시전한 모양이다. 손석춘 교수의 칼럼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7년 전에 내가 썼던 ‘노익장 철학자’에 대한 소감을 철회하고자 한다.
중앙일보 칼럼에서 그는 일본 유학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기에 게으른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살았구나, 하는 죄책감이었다”고 썼다. 그는 “당시 우리 민족은 너무 나태했다”고 단언한다. 대체 그는 물론 중앙일보도 역사의식이 마비된 걸까. 그가 일본 유학할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을 벌였다. 우리 민족이 너무 나태했다? 일제에 강제 동원된 동포들이 고통스레 일할 때 조선인은 일하지 않는다고 깨닫는 ‘철학’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당시 민중들은 착취와 수탈에 맞서 일제에 항거했다.
예서 그치지 않는다. 노동조합에 색깔을 칠한다. 박정희가 “공산국가의 노동조합은 정권을 쟁취할 때까지는 파업과 반정부 투쟁을 한다는 사실과 정권을 쟁취한 후에는 절대로 파업이나 정치비판은 못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허락하지 않았”단다. 야만적 노조 탄압의 정당화다. 칼럼마다 문재인이 “친북좌파”라는 그는 “국민의힘 정부와 국민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겁”다고 강조한다. 결론은 “적게 일하고 많이 놀기 위한 인생이 아니”란다. 눈여겨볼 것은 윤석열이 노동시간과 대일 굴복 외교로 지탄받는 상황에서 이 글을 썼다는 점이다.
[관련 기사 : 손석춘 칼럼-103세 철학 교수의 참 이상한 철학 중에서]
2023. 9.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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