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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은퇴 전후, 아내의 우울

by 낮달2018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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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퇴직과 아내의 우울

▲ 퇴직연금 증서와 월간 <공무원연금>

17일을 좀 거시기한 기분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했다. 그런데 25일은 좀 심상하게 맞았다. 아내가 입원했다가 이틀 만에 퇴원하는 바람에 그걸 달리 곱씹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전날 밤 나는 연금공단으로부터 ‘3월 연금 지급 예정 내역 안내’라는 제목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당월 연금소득세와 연금주민세까지 공제하고 난 금액은 마치 현실감이 떨어진 숫자 같아서 내가 받을 돈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지나가듯 연금이 들어왔다고 얘기했는데 다행히도 아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넘어갔다. 이제 아내도 이걸 현실로 받아들여야겠지, 하고 나는 우정 대범하게 생각하려 했다.

 

아내의 눈치를 예민하게 살피게 된 건 요즘 들어서다. 지난 설 연휴 때부터 앓기 시작한 독감 후유증으로 아직 기침이 떨어지지 않고 있던 아내는 결국 이틀 동안 입원해 염증 치료를 받았다. 한 달 보름을 넘겨 앓고 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가족들도 마음이 편치 않다. 아내가 어쩌다 생기를 되찾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반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을 듯 말 듯 이어지고 있는 아내의 기침을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아내가 앓고 있는 게 ‘독감’이 아니라 ‘마음’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퇴직을 앞두고 일주일 이상을 호되게 앓았던 것처럼 그건 장차 우리가 맞아야 할 변화된 삶을 예고하는 통과의례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장모님을 여의고 그 슬픔을 갈무리하기에도 시간은 다소 모자랐다. 뒷일을 마무리하는 것도 매끄럽지만은 않았는데 내가 퇴직하게 된 것이었다. 미리 정해 놓은 일이었지만 삶의 리듬이랄까, 생활의 중심이 완전히 뒤바뀌는 일이었으니 그걸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동안 아내가 호되게 앓느라 경황이 없을 때는 집안에 냉기가 감돌았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면서 손이 뜨던 집안일도 몸 사리지 않고 해내면서도 솔직히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출근의 부담이 없어진 자리에 집안을 제대로 건사해야 한다는 부담만 남았으니 말이다. 나는 가끔, 우스개로 ‘지옥이 따로 없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일상의 평화를 거스르는 것, ‘돈’인가?

 

그걸 괴롭게 여기고 있었으니 나 역시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이 변화의 깊이를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해온 일을 내려놓는다는 게 단순히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시간이 온전히 내 몫이라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급여가 줄었다(줄 것이라)는 객관적 사실이 일파만파 우리의 생활을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아내의 우울뿐 아니라, 내 일상의 평화를 거스르고 있는 알 수 없는 상수(常數)가 ‘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수입원이라면 오직 매달 들어올 연금이 전부다. 현직에 있을 땐 여러 명목으로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봉급 외에도 보충수업 수당, 복지비가 있었고, 1년에 한 번뿐이지만 성과급도 있었다. 하다못해 어쩌다 가는 출장에도 수당이 붙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구멍이 모두 막혀 버리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고스란히(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적으면 적은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라고 하면서 주어진 조건에 맞추어 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은 일종의 객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장에 그런 상황이 눈앞에 닥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혀 원하지 않을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퇴직 한 달도 되지 않아 우리는 시방 그걸 마치 환상통처럼 지레 앓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에는 몇몇 단체에 후원(기부)을 끊었다. 불요 불급한 지출을 줄이자는 뜻이긴 했지만,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정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나머지 몇 군데 후원만 제대로 유지하는 것만 해도 충분한 일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25일 연급 지급일에 맞추어서 신용카드의 결제 날짜를 바꾸었다. 자동이체로 빠지는 요금이나 보험금 따위의 이체일도 조정했다. 안다. 제 나름의 준비를 엽렵하게 한다곤 하지만 곤경은 때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 은퇴한 남편을 둔 아내가 더 우울하다! ⓒ <한겨레> PDF(3월 29일 10면 )

어저께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스스로 직장을 그만둔 남편을 둔 아내’가 ‘계속 직장을 다니거나 원치 않은 실직을 한 남편을 둔 경우’보다 우울감을 더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계수입 감소가 아내의 우울감 증가의 주된 원인으로 추정됐다.”라는 기사 말이다. [관련 기사 : “자발적 은퇴 남편 둔 부인, 실직 남편 부인보다 더 우울해”]

 

이건 마치 우리 내외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 아닌가. 이어지는 “남편이 정년퇴임을 한 뒤 아내의 집안일에 간섭하면 아내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결국 남편의 은퇴가 불러오는 생활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부부 갈등으로 이어지고 아내의 우울감을 일으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라는 기사도 마찬가지다.

 

‘통과제의’는 그만, 적응기가 필요하다

 

퇴직한 남편이 쓸데없이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잔소리꾼이 되면서 받는 아내의 스트레스 얘기는 주변에서 적지 않게 들었다. 글쎄,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잔소리꾼이 되지 않겠다, 대신 마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손수 하겠다고 나는 정리한 바 있다. 물론 그건, 내 결심이 얼마나 제대로 실행될 것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 내외에겐 얼마간의 적응기가 필요할 듯하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과정으로, 생활로 이해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조건 가운데에서 만족과 여유를 찾으려고 애써야 할 터이고.

▲ 모든 은퇴자가 그러하듯 우리 내외에게도 현실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려는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지루한 ‘통과제의’의 시간을 이제 끝내고 싶다. 알게 모르게 입은 상처도 아물 테니 우리도 이제 '이후의 삶'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마음의 평화가 현실의 긍정에서 오는 것이라면 까짓것, 긍정 못 할 일이 어디 있는가.

 

오늘 아침 잠깐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는 모처럼 생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기침은 좀 어때? 매일 건네는 질문에 아내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좀 좋아진 거 같아요. 나는 마음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4월 중순께 떠날 퇴직 기념 여행을 위해서라도 이제 조금씩 힘을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좋다. 나머지는 담대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자. 남은 날짜를 헤아려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스스로 다짐해 보는 것이다.

 

 

2016. 3.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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