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 입기, 그리고 차표 실수를 몇 차례 저지르다
이번 겨울을 나면서 여느 겨울과 달라진 것은 간간이 내복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내복을 벗어버린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복을 입으면 따뜻해서 든든하다기보다는 답답한 느낌이 컸던 것은 한창때여서 그랬을 것이다. 그 무렵엔 옷을 입어도 맵시가 통 나지 않는다며 내복을 입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군 복무 시절엔 멋보다는 방한이 더 요긴한 문제여서 지급받은 겨울 내의를 절도록 입고 지냈다. 겨울을 나면서 내의를 빨아보면 서너 번씩 헹구어도 아크릴 사(絲)의 갈색 내복에선 땟물이 끝도 없이 우러나올 정도였다.
제대하고 나선 다시 내복과 멀어졌다. 아예 안 입은 것은 아니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내복을 챙겨 입곤 했지만, 그런 날이 겨우내 몇 번이나 될까. 지난 40여 년간 내가 입은 내복은 따져보면 서너 벌도 되지 않을 것이다. [관련 글 : 내복과 담요, 학교의 겨울나기]
무릎이 시리다고 느끼게 된 6년 전쯤부터 내복이 꽤 생광스러운 물건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지만 그걸 챙겨 입는 날은 손꼽을 정도였다. 실제로 바깥에서 지내는 시간이 하루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으니 내복으로 막을 만한 추위를 겪을 새가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지난해 11월 서울의 촛불에 가면서 내복을 챙겨 입었고, 주말마다 베풀어지는 역광장 촛불에 나갈 때는 어김없이 내복을 껴입었다. 두어 시간 동안 찬 밤공기를 쐬는 데는 내복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근 십여 년 전에 사 입은 내복 한 벌밖에 없어서 지난달에는 내복을 한 벌 더 샀다. 매일 입지는 않아도 갈아입을 여벌은 있어야 할 듯해서다.
이제 내복을 입어도 답답한 느낌보다는 든든한 기분이 먼저다. 글쎄, 맵시는 굳이 따질 일이 없고, 한데서 오래 머물러도 추위로 움츠리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오후에 벗을지라도 오전에는 잠자코 내복을 껴입기 시작했다.
내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그걸 챙겨 입는 기준도 생겼다. 그날 온도를 살펴 영하라면 말할 것도 없고, 영상 5도 미만이면 내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는 것이다. 예상보다 온도가 높아지더라도 괜찮다. 역시 ‘겨울나기엔 내복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날마다 굳히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원래 좀 소심하긴 하지만 꼼꼼하다고 할 수는 없고 그래서 차분하게 일을 준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매사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걸 참고하는 편도 아니다. 해마다 학년 초에 지급되는 교무수첩을 제대로 쓴 건 초임 시절 몇 년이 고작이었고, 어느 해부턴가는 그걸 처박아 버렸던 사람이다.
기록하지 않는 대신 믿었던 것은 자신의 기억력이었을까. 어쨌든 살아오면서 기록하지 않아서 낭패를 당한 일도 없다. 50대에 들면서 기억력을 더는 믿을 수 없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그 무렵부터는 ‘중요’한 일과는 무관하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다소 덤벙대는 기질이 있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른바 ‘대과(大過) 없이’ 이날까지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부터 여러 차례 실수가 거듭되었다. 그것도 눈을 번연히 뜨고 말이다.
‘차표 사고’를 세 번이나 내다
공교롭게도 세 번에 걸친 실수는 모두 차표와 관련이 있다. 첫 실수는 지난해 11월, 경주 남산을 답사하는 퇴직자 산행 때 일어났다. 나는 구미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경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하고 시간에 맞추어 터미널에 나갔다.
7시 40분 차표를 사서 플랫폼에 들어가 안내 직원에게 경주로 가는 차는 어디서 타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턱짓으로 자기 뒤편을 가리켰다. 나는 의심 없이 그 홈 앞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는데, 차가 시간이 되었는데도 통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아마 오는 차편이 늦어진 건가 싶어서 조금 더 기다렸는데 어럽쇼, 출발시간이 지났는데도 홈으로 들어오는 차가 없었다. 10분이 지났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다시 아까 그 직원에게 왜 차가 안 들어오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플랫폼 저편에서 막 출발하는 버스를 가리켰다.
열흘 전쯤에 산에 오르다가 오른쪽 장딴지 근육이 찢어져 치료를 받아 막 회복 중이던 때였다. 나는 버스를 향해 뛰다가 포기하고 멈춰 섰다. 다친 부위에 둔중한 통증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기다린 홈을 멀거니 쳐다보았는데, 거기에는 ‘전주’라고 씌어 있었다.
주머니의 차표를 들여다보았더니 거기에도 경주행 홈의 번호가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었다. 도대체 난 무얼 한 건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 늙수그레한 직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뭔 죄가 있는가 말이다. 나는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다음 차를 탔지만 모임 시간에 늦지 않게 댈 수는 있었다.
돌아와 그 얘길 했더니 아내는 혀를 차고 잔소리가 늘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을 뻔히 뜨고 차를 놓쳐요? 어이구, 내가 못 살아. 차표도 확인 안 했우?”
“나중에 보니까, 차표에 홈 번호가 쓰여 있더라고.”
“나이 들어가면서 정신 좀 차리고 사시우. 애들이 웃어요.”
“글쎄, 말이야…….”
두 번째는 대구에서 누나와 형을 만나 4남매가 구미로 오면서였다. 출발시간을 확정하지 못해 여러 차례 시간을 미루다가 모바일 코레일로 승차권을 예약했다. 역으로 가려고 택시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다시 승차권을 확인해 보았더니 맙소사, 2시 50분발이 아니라 2시 5분발을 산 것이었다.
이미 시간은 지났고, 환불해야 하는데, 출발한 차표 환불은 역 창구에서 해야 하고, 그것도 도착 시간 전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맥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 40분께 역에 도착하긴 했지만, 창구 앞에 줄이 늘어져 있어 나는 환불 대신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열차의 입석권을 사야 했다.
마지막은 지난 설날의 케이티엑스(KTX) 승차권 예약 사고(?)다. 내려오는 차표는 구한 아들 녀석이 귀경 차표를 좀 사달라고 해서 인터넷 판매 시작 때를 기다려 접속했다.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땡 하고 바로 접속했는데도 앞에 대기자가 2만8천 명이었다.
2십 분쯤 기다려 간신히 접속했는데 이번에는 표가 없어 못 사고 어정대다 보니 접속이 자동으로 끊어졌다. 그러다가 재접속하여 연휴 마지막 날 아침 8시에 표가 있어서 클릭했더니 자동으로 예약이 되었다. 아이에게 표 샀다고 전하고 며칠 후에 차표를 출력하여 맞은편 벽에다가 꽂아두었다.
연휴 전에 집에 온 아이는 차표를 확인하더니 “연휴 마지막 날(30일)이 아니라, 연휴 시작하는 날(27일) 차표네요.” 했다. 뭐라고, 어디 보자. 내가 출력해 놓은 승차권에는 27일이 선명했다. 아내가 어이없다며 지청구를 했다. 다행히 시간이 있어서 환불했고 예약을 대기해 두었던 아이는 마지막 날 새벽 차표를 살 수 있었다.
나는 겸연쩍어서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라고 눙치고 말았지만, 기분은 영 개운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나는 가장 중요한 어떤 부분을 놓치고도 그걸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글쎄, 이것도 노화의 일부일까. 아직 그럴 때가 아닌데 미리 조심하라고 조짐을 보여주는 것인가.
세 번에 걸친 실수는 정작 기억력 따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떠오른 생각이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건사하기 위해 책상 위 모니터에다 메모지를 여러 개 붙여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앉을 때마다 그걸 들여다보곤 하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이하윤의 ‘메모광’)다는 한 수필가의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어쨌든 지난해 1주갑(周甲)에 이어 올해 나는 새로운 갑자를 향해 시방 나아가고[진갑(進甲)] 있지 않은가.
2017. 2.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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