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의 결정으로 한국의 서원 9개소가 우리나라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미 다녀온 데는 써 놓은 글로 대신하고 뒤늦게 다녀온 서원 이야기는 새로 쓰는 등, 틈나는 대로 서원 순례기를 펼쳐갈까 한다. [관련 글 : ‘한국의 서원(書院)’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① 경북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사설 교육기관’이다. 이른바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의 기능을 고루 갖춘 이 사학은 초기에는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등 긍정적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서원은 혈연과 지연,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 경향을 보이며 붕당의 소굴이 되는 등의 부정적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고종 때에 대원군에 의해 모든 특권이 박탈되고, 정비되면서 쇠퇴하였다.
서원의 이익집단화에 이바지한 것이 ‘조정에서 서원의 현판을 내리고[사액(賜額)] 전토를 주는’ 사액서원이었다. 이 사액서원은 부속 토지의 면세, 노비의 면역 등의 혜택을 받아 경제적 기반을 확대했고 군역을 피하고자 하는 양민을 노비를 받아들여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는가 하면 서원전(書院田)을 늘여가면서 국고 수입을 감퇴시키는 등 폐단이 아주 컸다.
지난 6일, 소백산 죽계구곡을 돌아 나오는 길에 들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바로 최초의 서원이면서 처음으로 사액도 받은 서원이다. 이 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회헌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지(宿水寺址)에 세우면서 시작된다. 순흥 백운동에 고려 유학을 중흥한 회헌의 옛집이 있었던 까닭이다.
처음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으나,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해 조정에서 사액과 전토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년(명종 5) 백운동서원에 친필로 쓴 액(額: 현판)과 서적을 하사함으로써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었다. 사액과 함께 서원에 학전(學田)과 노비를 주고 이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의 특권을 주었다.
‘소수(紹修)’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란 뜻인데 학문에 대한 국가적 장려를 목적으로 시작된 지원이 후일 관학의 쇠퇴는 물론, 국가 재정과 자원의 궁핍을 불러오고 만 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소수서원의 뒤를 이어 전국 곳곳에 사액서원이 세워지는데 이는 당시 관학이 흐트러지고 성리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한 데다 퇴계, 율곡 같은 대학자들이 서원 건립에 앞장선 데 힘입은 것이었다.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사학(私學) 소수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마흔일곱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태 전에 들렀을 때와 달리 입장료는 물경 3천 원이다. 그간의 물가 인상을 고려하더라도 과하다 싶은데, 이웃한 선비촌과 소수박물관을 패키지로 묶은 요금이라 한다.
서원의 입구 주변에는 평균 300년에서 500년 넘게 묵은 소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다. 이른바 ‘학자수(學者樹)’다. 이 적송이 빽빽하게 들어선 조그만 언덕이 영귀봉(靈龜峰)으로 신령한 거북이 엎드린 모양이라는데 ‘거북’도 ‘봉’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는다.
서원 입구 소나무 숲 오른편에 보물 제59호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가 있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사당인 문성공묘 담장 앞에는 목탑의 흔적도 남아 있다. ‘숭유척불’의 위세 당당한 이데올로기 앞에 허물어진 절집이 배겨날 재주는 없었을 터이다.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초암사와 죽계구곡(竹溪九曲)을 거쳐 서원을 끼고 흐르는 죽계천(竹溪川)은 만만찮은 곡절과 한을 품은 시내다. 백운동에 회헌의 사당이 세워진 다섯 해 뒤에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순흥 안씨의 세거지(世居地)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순흥부는 불타 폐부가 되었고, 숱한 백성들이 무참히 타살되었다. 피가 죽계천을 적시고 흘러, 십 리 아래 ‘피끝마을(안정면 동촌리)’까지 이어졌다 하니 이 조그만 고을을 덮친 참화의 크기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원 입구 오른쪽의 정자, 경렴정 맞은편의 ‘경(敬) 자 바위’에는 ‘백운동(白雲洞)’ 석 자 아래 ‘경(敬) 자’가 새겨져 있다. 정축지변 후, 희생당한 부민들의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자, 주세붕 선생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 자를 파고 그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위혼제(慰魂祭)를 지냈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소수서원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달린 강학당이 답사객을 맞는다. 보물 제1403호인 강학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으로 배흘림기둥에다 사방에 둘러놓은 툇마루 뒤에 방을 둔, 전청후실(前廳後室)의 특이한 양식이다.
창건 이후 350여 년 동안, 이 서원에서 공부한 이는 임란 때 경상우도 순찰사를 지낸 학봉 김성일을 비롯하여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 등 퇴계 문하생 대부분과 유생 4천여 명이다.
강학당 왼쪽에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하여 대부분 서원은 중국과 같이 ‘학교는 앞에, 사당은 뒤에’ 세웠지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로 서쪽에 사당을 세웠다. 서쪽을 상위로 삼는다는 우리 전통 위치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른 것이다.
사당에는 회헌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셨고, 후에 안보와 안축(경기체가 ‘죽계별곡’의 지은이), 주세붕 선생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담장 앞에 숙수사지 목탑의 흔적인 초석이 남아 있다.
강학당 뒤에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가, 우측으로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서원의 원장 등 스승의 집무실이다. 학구재와 지락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 칸이다. 10명에서 30명까지의 유생들이 기거한 건물이라기에는 좀 작지 않나 싶은 검박한 건물인데, 건물의 입면이 한자인 ‘공(工) 자’형으로 지은 것은 공부 잘하라는 뜻이라 한다.
직방재 뒤편에 선 영정각에는 회헌 영정(국보 111호)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되어 있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서원인데 소장 문화재가 만만치 않다. 영정각 오른편은 대숲인데, 그 아래 화단에 작약이 지고 있었다.
서원의 뒤편의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관을 거르고 오른편 중문을 나서면 만나는 탁청지(濯淸池)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조성한 연못이다. 수면을 빽빽이 덮은 건 연잎, 이 길쭉한 사각형 연못의 이름은 맹자와 초사(楚辭)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탁청지를 지나 죽계천을 건너는 다리를 넘으면 2004년께 문을 연 선비촌이다. 전통사상과 생활상의 체험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만 7천여 평에, 도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와가 7동, 초가 5동 등을 재현한 선비촌 주변에 기타 민속시설과 저잣거리를 꾸몄다. 맨 오른편 산 아래엔 소수박물관이 문을 열고 있다.
저잣거리와 선비촌에는 관광객들이 부산하게 왕래하지만, 정작 잘 다듬은 목재 부재로 깔끔하게 재현한 와가나 초가에는 사람은 물론 삶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 21세기의 화려하고 현란한 디스플레이 기술로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과 마을에 사람과 생활의 냄새를 배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선비촌 풍경
사진 촬영을 금한 박물관은 뜻밖에 전시 유물도 괜찮았고, 전체적인 짜임새도 실팍했다. 죽계구곡을 다녀온 후라 지쳐 있어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시내 너머 서원을 건네다 보면서 내려가면 청렴정 맞은편에 취한대(翠寒臺)가 있다.
취한대는 퇴계가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지은 정자다. 빽빽한 적송 숲속의 이 정자는 건너편의 아름다운 정자 경렴정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양샌데도 별다른 꾸밈새가 없는 검박한 구조 탓인가, 외려 경렴정보다 더 넉넉해 보인다.
취한대를 지나 서원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못 미쳐 인근 마을 사람들의 서낭당이 있다. 소나무 몇 그루로 둘러싼 돌무더기 주변에 새끼 금줄을 둘렀다. 원래 영귀봉에 있었으나 서원의 제지로 지금의 자리로 옮아온 것이라 한다. 유생의 본산인 서원의 위세도 민중들의 소박한 민간 신앙을 어쩌지 못한 것이다.
징검다리는 이름만 징검다리지, 바위라 해도 될, 만만찮은 크기의 자연석을 네모나게 다듬은 것이다. 정축지변에 흘린 이 고을 사람들의 피로 씻어낸 시내, 죽계천은 세월과 역사 너머로 무심히 흘러간다. 징검다리를 건너 우리는 다시 서원 입구로 돌아왔다. 소나무숲에 핀 섬초롱꽃 너머로 경렴정이 아련히 멀어 보였다.
2007. 6. 10. 낮달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서(序) ‘한국의 서원(書院)’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② 도동서원, ‘엄숙 정제의 예’를 실현한 서원의 전형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③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그리고 ‘만대루’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④ 남계서원, 서원 건축 배치의 ‘본보기’가 되다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⑤ 도산서원, 퇴계의 위상과 명성을 상징하는 공간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⑥ 돈암서원, 호서 지역의 산림과 예학의 산실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⑦ 무성서원-‘유교적 향촌 문화’의 본보기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⑧ 평지 서원 필암서원, 소장 문서도 보물이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⑨ 탁월한 장서 관리, 서원과 독락당에 국보1점과 보물 9점을 남겼다
'이 풍진 세상에 >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동 평사리, 그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서다 (0) | 2019.08.22 |
---|---|
사진과 역사, 영월로의 짧은 여행 (0) | 2019.08.21 |
남명 조식, 경상우도의 ‘의(義)’가 그에서 비롯하였다 (2) | 2019.06.18 |
원주, 허물어진 절터를 찾아서 (0) | 2019.06.18 |
경상도 사람의 전라 나들이 ① 전주 한옥마을 (0) | 2019.06.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