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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경상도 사람의 전라 나들이 ① 전주 한옥마을

by 낮달2018 2019.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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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전주 한옥마을과 경기전, 전동성당

▲ 전주한옥마을에 들어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 '한옥'들이 안동의 한옥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 전주한옥마을에는 현대식 빌딩과 20 세기 초에 지은 한옥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한옥마을 입구.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전주(全州)에 가보지 못했다. 웬만한 도시나 유적지는 빼놓지 않고 다녔던 편인데, 어쩐 일인지 전주와는 연을 맺지 못했다. 전주를 잘 알지 못하니 전주라 하면 떠올리는 게 고작 ‘경기전’이나 ‘비빔밥’ 정도다.

 

영호남, 서로 ‘나들이가 쉽지 않다’

 

사실, 아주 유명한 관광 유적지가 아닌 이상 영남에서 호남 쪽으로 넘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거꾸로 호남에서 영남으로 넘어오는 일도 어렵기는 매일반이다. 무엇보다도 일단 동서로 나뉜 영호남을 잇는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다.

 

전두환의 신군부 시절에 개통한 88올림픽고속도로가 유일하게 영남 내륙과 호남을 잇는 고속도론데, 사실 이 길은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짝퉁’ 고속도로다. 고속도로인데도 좁아터진 2차로(왕복)에 불과한 데는 전국에서 이 도로가 유일하다. (이 도로는 올 하반기에 4차로로 확장 개통한다고 한다.)

 

그러나 영호남 교류가 드문 이유를 어찌 길에다만 물을 수 있겠는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그게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부득이 환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걸 말이다. 인정하든 하지 않든, 비록 조금씩 바래어 가고 있긴 하지만 영호남 사람의 마음속에 그어진 금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늘 겨누기만 하다가 실행에 옮긴 게 지난 5월 초하루다. 아침 8시 전에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다가 대전 근방에서 호남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전주에 이르는 데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남과 호남의 교류를 가로막는 게 단순히 지리적 이유가 아니라는 건 분명한 것이다.

▲ 전주한옥마을에서 말하는 '고택'에는 안동에서와 같은 '고풍스러움'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전주 시내로 들어서 첫 목적지인 한옥마을로 향해 가는데 어느 순간부터 차의 흐름이 둔해졌다. 신호 때문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주말 연휴를 맞은 사람들이 한옥마을 쪽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딸애와 차량 정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말도 아닌데, 왜 이러지?”
“오늘 노동절이잖아요. 연휴가 시작된 거니까요.”
“어디서들 오는 차일까?”
“서울과 수도권에서 오는 걸 거예요. 전주는 접근성이 좋잖아요? 수도권에서도 선호하는 관광지 같아요. 당일로 다녀갈 수 있을 만큼 멀지 않으니까요.”

 

가로수와 가로등에는 세월호 관련 펼침막이 단체와 개인의 실명으로 걸려 있었다. 교사와 사회복지사, 시민의 이름으로 걸린 그 노란 펼침막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호남에 들어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저런 펼침막이 걸리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하고 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거기 ‘한옥’은 ‘경상도 한옥’과는 ‘다르다’

 

정체가 길어져서 지난해 이곳을 다녀간 딸아이에게 차를 맡기고 나는 아내와 함께 천천히 걸어서 한옥마을로 들어갔다. 5월의 그것이라기엔 따가운 햇볕이 목덜미로 쏟아졌다. 나는 오늘 나들이가 기온 때문에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

 

주차장을 지나 한옥마을 어귀로 들어서면서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골목길에 펼쳐진 한옥들이 내가 안동에서 익힌 한옥의 모습과는 꽤 달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게 가로변에 있는 집들이어서 그렇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내가 그렸던 그림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안동과 인근 지역에서 만났던 종택(宗宅)이나 고택(古宅)이라는 이름의 고풍스러운 기와집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누마루를 들이고 편액이 걸린 날렵한 사랑채와 입 구(口) 자 모양의 안채, 중문 너머의 별채 따위로 구성된 지체 높은 양반들의 살림집 말이다.

▲ 길모퉁이 집을 가장 효율적으로 바꾼 가게. 그것은 도시의 변화를 받아들인 한옥이었던 셈이다.
▲ 전주한옥마을에서 이런 고색창연한 한옥을 찾으면 안 된다. 지난 주말에 들렀던 경북 봉화의 만회고택.

전주한옥마을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서울 북촌이나 경주, 안동의 한옥마을들과 달리 전주한옥마을의 한옥은 도심에 몰려 있다. 이 마을은 100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 한옥들은 전통 한옥이 아닌 도시 환경과 구조에 맞게 발전되어 온 ‘도시형 한옥’이라는 것이다.

 

전주한옥마을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라고 한다. 원래 전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전주 읍성의 서문 밖에 살았다. 성 밖은 주로 상인이나 천민들의 거주 지역이었으므로 1911년 말 전주 읍성의 성곽이 철거되자 일본인들은 성안으로 거주지를 옮겨갔다.

 

주변 풍경에 녹아든 한옥들, 그것도 ‘발전’이다

 

강제 병합 이래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들의 주택도 증가했다. 늘어나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으로 뭉친 양반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전주한옥마을인 것이다.

 

한옥의 모습은 내가 그린 그림과는 전혀 달랐지만 나는 거기 별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고가에 어설프게 손을 댄 것을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인데도 그랬다. 길가의 집들은 대부분 가게로 꾸며서 무엇인가를 팔거나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생뚱맞지 않았던 것은 이 집들이 주변의 풍경들과 잘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고풍스러운 기와집 사이에 낀, 안동 하회(下回)나 경주 양동(良洞)마을 안 가게처럼 어설프지도 생뚱맞지도 않았다. 대부분 집이 비슷한 형식으로 변형해 가게를 열고 있으니 그게 마치 마을의 풍경을 일관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전주의 한옥들은 고풍스럽지도, 안동의 그것처럼 완고한 고집쟁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안동의 한옥들이 날렵함 때문에 다소 약해 보이는 데 반해 전주의 한옥들은 훨씬 실하고 튼튼해 보였다. 투박한 기와에다 집의 규모도 예사롭지 않은 것은 실용성을 구한 결과일 것이었다.

 

민속 마을의 집들이 온갖 생활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집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그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게 마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집과 사람의 삶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삶을 편안하게 해 주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뜻에서라면 다소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전주의 한옥들도 ‘발전’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했다.

▲ 경기전과 전동성당으로 들어가는 태조로. 한옥마을과 경기전의 거리인데도 길에는 활기가 넘쳤다.
▲ 태조로에 있는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관. 문학관은 좁고 허술해 보였다 .

이들 진화하고 있는 한옥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개방적 분위기는 마을에 새로운 활기와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원래부터 부근에 있었던 경기전과 풍남문, 전동성당 같은 문화 유적들과 만남을 통해 ‘전주한옥마을만의 특별한 가치를 형성하고 있다’는데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하고 있었다.

 

한옥마을과 경기전 거리의 활기

 

마을 어귀에서 출발해 소리박물관, 전주전통술박물관, 여명카메라박물관을 지나 경기전으로 가는 찻길로 접어들자 나타난 거리(태조로) 풍경은 그 활기와 생동감을 한눈에 보여 주는 것이었다. 거리 오른쪽으로 경기전이, 그 너머 왼편에는 전동성당이 있고 그 끝의 네거리를 지나면 풍남문이 있다.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봉안하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은 건물이다. 사적 339호. 정전은 따로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조의 어진(국보 제317호)은 전주를 비롯하여 경주·평양·개경·영흥 등 모두 여섯 군데에 봉안되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데는 이곳뿐이다.

 

전주에 이성계의 어진을 둔 경기전을 설치한 것은 전주가 이성계의 본관(本貫)이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지만,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이 전주에 토착한 이래 태조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도 전주의 호족이었다.

▲ 경기전 정전.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 뒤편에 있는 조경묘(肇慶廟)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과 시조 비(妣)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영조 47년(1771)에 건립되었다. 조경묘에는 영조 47년(1771)에 임금이 친필로 쓴 위패가 있다.

 

한때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기도 했던 경기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에 복원되어 지금에 이른다. 규모는 원래 지금보다 훨씬 컸으나 일제 강점기에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나갔다.

 

그러나 경기전은 마침맞게 한옥마을 근처여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경기전을 모르고 온 이들도 마을 한쪽의 경기전에 들를 것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마을과 경기전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제가 절반으로 줄였다고는 해도 경기전 일원은 도심에 있는 생광스러운 녹지 공간이다. 경기전 경내는 연휴를 즐기러 온 방문객으로 넘쳤다. 사람들은 해설사를 따라다니며 해설을 듣거나 끼리끼리 나무 그늘에서 쉬었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태조 이성계가 전주 출신이라서, 경기전이 여기 있어서 전주 사람이 얼마나 득을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도심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라는 것만으로도 경기전의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 경기전 부속채의 경덕헌.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이 일을 맡아보던 곳이다.

경기전 뒤편에는 2011년 완성된 어진박물관이 있는데 시민들은 거기서 여러 가지 체험활동을 즐기고 있었다. 박물관을 돌아 나오면, 경기전의 부속채가 있다. 부속채는 평소에는 경기전을 지키고 제사 때에는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부속채는 경기전의 제사를 맡은 관원들이 있던 수복청(守僕廳), 재계(齋戒)를 맡은 관원들이 재계의식을 준비하는 동재(東齋)·서재(西齋), 전사관이 사무를 보며 제사를 준비하는 곳 전사청(典祀廳),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이 일을 맡아보던 경덕헌(慶德軒) 등이다.

 

임금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정전과 달리 부속채는 하급관리나 관노, 양민이 수직(守直)하던 곳이다. 자연 건물들의 모양새가 매우 검박하다. 더위에 지친 관람객들은 경덕헌 툇마루에 걸터앉아 땀을 식혀 가곤 했다.

▲ 전동성당은 비잔틴 양식(중앙과 좌우의 종탑)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해 지은 건물이다.

경기전을 빠져나오는 길목에서 울창한 숲 너머, 마치 유럽의 오래된 사원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이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사적 제288호 전동(殿洞) 성당이다. 이 성당은 명동성당을 설계했던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1908년 착공하여 1914년 준공되었다.

 

3대 성당으로 꼽히는 전동성당

 

성당은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지어 겉모습이 서울 명동성당과 비슷하다. 비잔틴 양식(중앙과 좌우의 종탑)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해 지은 전동성당은 명동성당, 대구 계산성당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당으로 손꼽힌다.

 

성당 자리는 전라 감영이 마주 바라보이던 곳이다. 여기서 정조 15년(1791)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 때는 유항검·유관검 형제가 육시형을, 윤지헌·김유산·이우집 등이 교수형을 당했다.

 

유명 관광코스가 되어 버린 성당 안팎은 들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분주하게 성당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떠난다. 사람들이 경기전의 어진을 다만 흥미로 바라보았듯 성당에 서려 있는 순교의 역사 따위에는 무심한 것이다.

▲ 전주 풍남문. 전주 읍성의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남문이다.

성당을 지나 네거리 저편에 풍남문(豊南門)이 있다. 순종 때인 융희 원년(1907년), 도시계획의 하나로 전주 읍성의 성곽과 성문을 철거했는데 유일하게 남문만 보존한 것이다. 보물 제308호.

 

원래 명견루(明見樓)였는데 영조 43년(1767)에 불탄 것을 재건할 때 관찰사 홍낙인(1729~1777)이 풍남문이라 이름을 붙였다. 풍남이란 ‘풍패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이는 전주를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풍패(豐沛)는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거기에 빗댄 것이다.

 

풍남문에서 다시 경기전 쪽으로 되돌아가는 네거리(풍남문 교차로) 한쪽에는 세월호 관련 시민단체의 농성 천막 몇 동이 보였다. 온통 노란빛의 펼침막이 세월호 인양과 대통령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 풍남문 교차로 한쪽에는 세월호 관련 시민단체들의 농성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세월호는 아직도 현재형이다 .
▲ 태조로 길가의 화단에는 하얀 샤스타 데이지꽃이 청초했다.

가로수와 성당의 정원수 사이로 전동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틈새로 태조로 길가에 핀 샤스타 데이지 하얀 꽃이 청초했다. 그것은 교차로에 걸린 노란 펼침막들과 아련하게 오버랩 되고 있었다.

 

불과 두어 시간을 돌았을 뿐인데, 햇볕이 따가워 우리는 지쳤다. 지척에 있다는 오목대(梧木臺)도 이목대(梨木臺)도 생략했다. 점심을 먹으려 맛집이라는 두어 군데의 유명 음식점을 찾았다가 식당 밖까지 서 있는 줄에 질려 포기하고 변두리의 한정식집에서 끼니를 때웠다. 여행을 하면서 ‘먹는 문제’가 얼마나 만만찮은 일인가를 절감하면서.

 

우리는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의 ‘편백 숲’에 들렀다가 해가 지기 전에 예약한 펜션에 들었다. 인터넷검색으로 살폈을 때는 ‘괜찮은 곳’이었는데, 실제로는 낡은 데다가 ‘고객 서비스’가 별로 준비되지 않은 시골 펜션이었다.

 

비록 식사와 숙소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나는 이번 ‘전주 나들이’가 불만스럽지만은 않았다. 난생처음 찾은 도시인데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언제 짬이 나면 느긋한 답사 계획을 짜서 다시 찾으리라고 나는 자신에게 약속했다.

 

 

2015. 6. 6. 낮달

 

[경상도 사람의 전라 나들이 ②] 군산(群山) 겉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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