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을 찾아서
하나 마나 한 얘기지만 소설은 허구(fiction)다. 그것은 단순한 ‘현실의 모사나 재현’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하는 현실의 ‘재구성’이고 ‘재창조’이다. 그 재구성된 현실이 도저한 삶보다 뒤처지는 일도 없지 않지만, 이 개연성 있는 허구는 때로 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현실과 허구와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기도 한다.
또 작가가 창조해 낸 인물과 그 삶은 마치 현존 인물처럼 우리 주변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기도 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살았던 땅과 거리 등에서 그들의 흔적과 체취를 날 것 그대로 느끼기도 한다.
남도의 벌교나 보성 등지를 여행하면서 <태백산맥>의 독자들은 김범우뿐이 아니라 염상구가 활보했던 거리와 기찻길 따위를 아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터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 속에 전개된 허구의 삶은 현실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비로소 사람들의 삶과 일상으로 녹아들기도 한다. 우리 문학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서구문학에서 어떤 작가들은 작품 속에 자기 작품이나 다른 작가의 주인공들을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인 것처럼 등장시키기도 한다.
남미의 작가 마르케스는 <백 년의 고독> 속에 다른 작품의 주인공인 ‘마마 그란데’(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얘기를 하는가 하면, 쿠바 작가 까르뻰띠에르의 주인공 빅또르 우게스(빛의 세기)를 불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그런 문화가 퍽 부럽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소설이 구현하는 허구의 세계가 그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들에게조차 자연스럽게 현실로 이해될 수 있는 문화다.
남도에서 <태백산맥>의 따끈따끈한 자취를 찾을 수 있다면 경남 하동에서는 박경리 선생의 역작 <토지>의 세계를 날것 그대로 익숙하게 만날 수 있다.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가 바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악양면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몸에 받은 땅’이라고 일컬어진다. ‘웬 경상도 땅에 악양(岳陽)’인고 하니, 중국 땅 악양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지명들도 줄줄이 소중화(小中華)다. 평사리 앞 섬진강 강변 백사장은 ‘금당’이고, 그 안에 있는 호수는 ‘동정호’인 것이다. 이름이 씁쓸하긴 하지만 섬진강 강변은 아름다웠다.
평사리를 찾은 건 지난 1월 13일, 아내와 함께한 보길도 여행의 귀로에서였다. 바람이 바늘같이 매웠다.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이 시렸다.
평사리를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방문은 19년 전의 일이다. 1988년, 여름방학, 근무하고 있던 고교의 학생 두 녀석과 함께 지리산 산행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이틀쯤을 지리산에서 보낸 우리는 그때, 배낭을 힘겹게 메고 땀으로 멱을 감으며 버스를 타고 평사리에 들렀는데, 마을 들머리에 세워진 짚 지붕을 얹은 농막에 짐을 부려놓고 쉬었던 기억만이 애매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시간을 넘어, 아내와 나는 내비게이션의 인도를 받아 승용차를 타고 평사리로 곧장 들어갔다.
평사리는 하동군이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을 한옥 14동으로 구현하고 조선 후기 민중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초가집, 유물 등 드라마 세트도 만들어 놓아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되어 있었다. 비탈진 산기슭에 띄엄띄엄 선 초가들이 마치 방문객들을 이전 세기(世紀)로 안내하는 듯했다.
<토지>는 시간상으로는 동학혁명과 갑오개혁 직후인 1897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 공간적으로는 평사리를 비롯해 한반도와 일본, 만주 등 동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삼으면서 격변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한민족의 삶과 역사를 다루고 있는 대서사시다.
1969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 작품은 26년 만인 1994년에 총 5부, 16권으로 완결되었고 여러 번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토지>는 작가가 말한 대로 최서희 일가와 평사리의 무지렁이 백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땅의 근대사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민족의 생활사 속에서 풀어나간 작품이다. 이 위대한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은 60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입김을 불어 넣었고, 그들은 마치 이웃처럼 정겹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작가가 배경을 이 땅으로 설정했을 뿐 평사리에는 최 참판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작인(作人)들도 없다. 평사리에 소설의 공간을 재현해 낸 것은 소설이 발표되고 나서다. 나중에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여기 세워진 세트가 쓰이기는 했겠지만, 애당초 허구의 인물과 허구의 공간들이 마치 살아 있는 인물과 장소로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소설의 힘’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래 떠나왔던 고향에 들어온 것처럼 우리는 마을에 재현된 지난 세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마을의 왼쪽으로 치우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타작마당 너머에 물레방앗간이 있다.
얼음과 고드름을 매단 채, 물레방아는 멈춰 있었다. 원작에 물론 물레방앗간 따위는 없다. 그러나 물레방앗간은 자연스레 원작의 삼신당과 겹쳐진다. 삼신당이든 산신당이든 그게 그거 아닌가.
우리는 마치 틈입자처럼 조심스럽게 방앗간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최참판댁의 비극을 모의하는 김평산과 귀녀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고, 강 포수와 귀녀가 벌이는 강두매의 수태의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노비 신분이라는 열등감과 양반에 대한 원한 때문에 야차가 된 여인, 귀녀는 그러나 강 포수의 헌신적인 옥바라지에 감동하여 모든 죄를 뉘우치고, 옥중에서 두매를 낳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귀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인간의 선성(善性)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는지 모른다.
이어지는 상민들의 집은 이용과 칠성이, 영팔의 초가삼간이다. 얼기설기 구부정하게 이어진 돌담 너머 오래된 초가지붕은 잿빛이었고, 얌전히 닫힌 부엌문 옆에 방문이 열려 있다. 무던한 아낙 판술네가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긴데 날 선 바람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웃에 이용의 집이 있다. 이용은 작가가 가장 애정을 갖고 창조해 낸 인물이 아닌가 싶다.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온몸으로 지켰던 사람, 인간의 도리를 위해 모진 고통을 견뎌내면서도 허물어지지 않았던 상민 이용. 하여 그와 월선의 운명적인 사랑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되었다.
최참판댁은 마을 가운데 위쪽에 있다. 솟을대문 너머 이 만석지기 양반집은 두꺼운 몸피를 뽐내고 있었다. 사랑채의 누각에 오르니 평사리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사리의 너른 들판, 하동을 거쳐 진주로 가는 길섶이 모두 참판댁의 땅이었으리라. 누각 한 편에서 최치수의 밭은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상전의 호령에 장작개비를 안고 줄달음을 치는 소년 길상의 모습이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별당은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의 꽤 큰 건물이었다. 마루에 난간을 둘렀고, 앞뜰에 섬까지 꾸며놓은 연못이 있었다. 이부(異父) 시동생과 불륜의 사랑에 빠져 달아난 여인의 거처로 보기에는 너무 밝고 넓어 보였다. 김환(구천)에게 신비한 진달래꽃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이 여인은 그러나 소설 속에서 회상과 꿈속에서만 등장했던 듯하다.
솟을대문에 이어진 행랑채가 길었다. 돌이부터 삼수까지 숱한 하인들이 넘치는 욕망을 추스르지 못해 몸부림치던 곳, 형수를 사랑하게 된 구천이의 절망과 고독이 서린 곳, 김 서방과 박수동 등 충직한 하인들이 고단한 삶을 마감한 곳이다. 행랑채 어디쯤이 고방일까를 어림해 보다가 참판댁을 나섰다.
김평산의 집 사립문 옆에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게 남편이 살인죄로 처형되자 열부(烈婦)의 길을 간 함안댁이 목을 맨 나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좁은 마당에 고인 햇살, 가난한 장독대가 안쓰러웠다. 이 부부가 남긴 혈육은 각기 제 어버이의 성품과 기질을 물려받았다. 김두수가 된 거복이는 꼼짝없이 평산을, 유년기의 아픈 추억을 형벌처럼 간직했던 한복은 어머니 함안댁을 닮은 것이다.
해방은 평사리에도 왔다. 최서희는 별당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고 김상현이 봉순에게서 낳은 딸 양현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반세기, 50년이 흘렀다. 토지개혁이 있었고, 전쟁이 지나갔고, 숱한 독재 정권이 명멸해 갔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삶은 고단하다.
김평산의 집 앞 골목에 일흔은 되어 보이는 안노인 한 분이 스티로폼과 방석을 깔고 좌판을 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 바늘 같은 바람을 견디면서 노인은 도회로부터 이 산골 마을을 찾을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평사리 앞, 하동에서 구례로 가는 19번 국도 옆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길 양쪽에 가지런히 선, 옷 벗은 벚나무 가로숫길은 아름다웠다. 강은 이 조그마한 마을을 스쳐 간 고단한 이 땅의 근대사, 그 곡절 많은 시름을 안고 시방도 청정한 푸른 빛으로 그 긴 몸을 뒤채고 있었다.
나룻배도 사공도 보이지 않건만, 월선을 만나러 하동 장(場)으로 가는 이용의 외로운 뒷모습이, 거기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여인, 기화(봉순)의 소복한 모습이 어른거린다. 가만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평사리의 목청 좋은 소리꾼, 서금돌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들려올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와 존엄은 변하지 않았다. 땅과 그것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숱한 곡절과 상처로 섬진강처럼 굽이친다. 한 작가의 26년 동안의 고행이 빚어낸 문학 작품의 세계로부터 현실로 돌아오는데 시차 적응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이 바로 거기 있으리라 생각하며 우리는 평사리를 떠났다.
2007. 2.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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