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남명 조식, 경상우도의 ‘의(義)’가 그에서 비롯하였다

by 낮달2018 2019. 6. 18.
728x90

[지각답사기 ②]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유적지

▲  덕천서원 . 1576 년 ( 선조  9) 에 창건되었으며 ,  남명의 위패를 모셨다 .

함양과 산청 일대를 다녀온 것은 2008년 벽두다. 1월의 두 번째 주말, 나는 두 친구와 함께 지리산 자락의 화림동 계곡 주변과 단속사, 덕천서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두 편의 글로 갈무리했다. 한 편은 <오마이뉴스> 기사로 쓴 ‘화림동 계곡의 정자 이야기’였고 다른 한 편은 블로그에 올린 ‘단속사 옛터’를 다룬 글이었다.

 

▲ 남명 조식 ( 허권수, 지식산업사 , 2006)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우리는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 덕천서원을 비롯하여 산천재와 세심정, 그리고 선생의 묘소를 돌아보고 귀로에 올랐다. 나는 남명 유적을 다녀온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 남명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어떤 밑천도 내겐 없었던 까닭이다.

 

나는 80년대 중반부터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의 시조 한 편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이가 퇴계와 함께 영남 사림(士林)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라는 것밖에는 마땅히 아는 게 없었다. 나는 남명에 대한 초보적 이해라도 가능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로 하고 거기서 찍은 사진을 오랫동안 묵혀 두었다.

 

남명학연구소장 허권수 교수(경상대)가 쓴 책 <남명 조식>을 산 것은 산청을 다녀오고 꼭 일 년 뒤인 이듬해(2009년) 1월이었다. 책을 뒤적거리다가 묵혀 둔 채 다시 일 년이 지나갔다. 나는 최근 136쪽짜리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제야 뒤늦은 지각답사기를 쓰게 된 것이다. 이 나태와 불성실을 어찌 다 이를 수 있으랴!

 

<남명 조식>은 남명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서술한 책이다. 전문적인 연구서도, 남명의 사상과 삶을 천착한 평전도 아니다. 따라서 <남명 조식>에 서술된 남명의 모습을 기초로 쓴 이 글이 가진 한계를 참작해서 읽어주시기 바란다.  

▲ 남명의 28살 때의 필적. 남명은 원나라 이설암의 글씨를 배웠다. ⓒ 경상대학교

1980년대 초반, 당시 고등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시조 한 편으로 나는 남명 조식(1501~1572)을 처음 만났다. 아는 것보다 과잉 분출되던 열정을 감당하기 어렵던 초임 시절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교사를 응시하던 열일곱 살 나는 소녀들을 앞에 두고 내가 남명을 어떻게 소개했던지는 기억에 없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구나.
아이야 무릉(武陵)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남명이 남긴 10수의 연시조 중 한 수다. 대구 인근에 사는 이들은 시내에 있는 같은 이름을 딴 공원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여기서 말하는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양단수는 ‘두 갈래 흐르는 물’이다. 산 그림자마저 잠긴 지리산의 시냇물, 거기 떠 오는 복사꽃 잎……. 남명은 거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라고 노래한다.

 

지리산 자락의 남명 유적지

 

만년에 지리산 자락 아래 덕산으로 옮겨 후학을 길렀던 남명에게 지리산의 의미는 남달랐던 것 같다. 그는 장중한 천왕봉의 기상과 맑은 덕천강의 흐르는 물을 살아 있는 스승으로 여겼다고 한다. 퇴계가 청량(淸凉)을 사랑하여 ‘나의 산[오산(吾山)]이라 한 것과 비길 만하다.

 

우리가 남명을 만나러 들른 곳은 남명이 만년을 보내면서 후학을 기른 덕산(산청군 시천면 원리)이다. 남명은 여기, 지리산 중산리와 대원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룬 덕천(德川) 가에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후학을 길렀다. 덕산에는 현재 남명을 모신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지리산 자락인 것은 틀림없네. 여긴 풍경이 또 다르구먼.”
“경북은 아무래도 그리 산도 높지 않은데다가 산세도 비교적 밋밋하잖아? 그런데 이쪽은 아무래도 기세가 남달라. 산세도 그렇고 전반적인 느낌이 퍽 낯설지.”
“그런 지형이나 산세, 자연환경이 사람들의 기질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거 아닌가. 남명이나 그 제자들이 저항적, 실천적 삶을 지향한 게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지.”

▲ 남명 조식(왼쪽)과 퇴계 이황 . 경상 좌우도를 대표하는 도학자다 .

경북 사람들은 대개 경남북의 도계를 넘으면서부터 연변의 풍경이 자기 고장의 그것과는 달라진다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챈다. 첩첩한 산 때문에 비좁고 옹색해 보이는 경북에 비기면 경남은 일단 들이 널러 보이고 시원스럽다. 거기다 간간이 만나는 산세가 훨씬 강하고 날카롭다. 그것들은 꼭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어떤 분위기나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남명과 퇴계,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조선시대에는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우도와 좌도로 나누었다. 같은 경상도면서도 두 곳 사이에는 뚜렷한 문화적 특성이 존재했다. 좌도의 중심지는 안동이었고 우도의 중심지는 진주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사상가인 퇴계와 남명은 각각 두 지역에서 태어나 학문적으로 양대 학파를 형성했다.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경상좌도는 인(仁)을 주로 하고, 경상우도는 의(義)를 주로 한다.”고 쓴 것은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전개했던 학문과 삶의 태도를 이른 것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처사’의 삶을 원했지만, 출사를 거듭한 퇴계에 비해 더하고 보탤 것 없이 ‘처사’로서 살았던 남명의 삶이 빛나는 것은 그가 지향했던 의로운 삶 때문이 아니던가.

 

덕천서원 앞에 차를 댔다. 건너편 덕천(德川) 가에 정자 하나가 다소곳하게 섰다. ‘세심정(洗心亭)’ 석자가 뚜렷하다. 이 정자는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 등이 중심이 되어 덕천서원을 지을 때에 함께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제자 하항(1538~1590)이 주역의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聖人洗心)’라는 말에서 취해 붙였다.

 

날아갈 듯 날렵한 자태와 잘 정비된 모습이지만, 정자는 그리 예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의 정자는 여러 번 개축하여 본 모습을 잃은 것이다. 제자 하수일이 정자를 지은 내력을 자세히 밝힌 ‘세심정기(洗心亭記)’가 정자에 걸려 있었다.

▲ 남명이 고향 삼가로 돌아와 지은 정자 뇌룡정. ⓒ <남명 조식> 김한수
▲& 덕천서원 앞의 세심정. 주역의 H성인이 마음을 씻는다(聖人洗心)' 에서 이름을 따 왔다 .
▲ 덕천서원의 솟을삼문인 시정문
▲ 덕천서원 전경 . 중앙에 경의당 , 좌우에 동서재 건물이 검박하다 .

“아니, 남명이 이 고장에서 태어난 건가?”
“아니지. 원래는 남명은 합천 삼가현 사람이야.”

 

덕산에서 만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지만 정작 남명이 태어난 곳은 경상도 삼가현(현재 경남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남명(南冥)은 호다. 4~7세 사이에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옮겨 20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혼인 후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15년여를 살았다.

 

마흔다섯 살 때 고향으로 돌아온 남명은 예순한 살 때 가산을 정리하여 진주 덕산으로 옮기고 산천재를 지어 강학을 시작했다. 그를 좇으려 인근 지역은 물론 서울의 선비까지 덕산에 몰려들었는데 이들이 약포 정탁(1526~1605), 동강 김우옹(1540~1603) 등이다. 나중에 한강 정구(1543~1620), 망우당 곽재우(1552~1617) 등도 문하생이 되었다.

 

남명의 ‘사회적 실천’과 문인들의 의병 활동

 

남명은 평생에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는 이다. 그는 22세 때 생원·진사시와 문과의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會試)에는 실패했으며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리고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닌, 유학의 정수를 공부하는 데 전념했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자기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삼았다.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명(銘)을 새겼다. 이는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여 수양하는 기본으로 삼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 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었다.

 

‘경’을 직접 드러내며 실천하는 ‘의’를 함께 중시하는 데서 남명의 학문, 사상적 태도는 퇴계 이황과 차이를 보인다. 퇴계가 ‘경’의 본원을 찾고자 궁리에 치중하여 문인들과 논변을 벌이는 데 대해 ‘이미 밝혀진 것을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그것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는 태도를 견지한다.

 

당대 현실을 직시하고 개혁하려는 의지는 가지지 않은 채 이론에만 몰두하는 학문의 폐해를 예견하면서, 오직 그 이론을 체득하여 몸소 실천하는 것만이 학자의 바른 태도라고 본 것이다. 요컨대 선생은 자칫 공허하게 될 소지가 다분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기대승(1527~1572)과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논쟁을 벌인 퇴계에게 편지하여,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천리(天理)를 논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행위를 그만두게 하라’고 했다. 이는 심성 논변 자체를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고 경계한 남명의 태도를 바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퇴계가 시사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데 비해 남명이 상소문 ‘단성소’를 통해 훈척(勳戚)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 공격한 것은 현실과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적 특징을 잘 드러낸 것이다. 그는 학문이란 모름지기 반궁실천(反躬實踐)하고 지경실행(持敬實行) 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실제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정인홍·최영경·정구로 대표되는 그의 문인들로 이루어진 남명학파가 지닌 처사적 학풍, 국가의 위기 앞에 살신성인 참여한 점 등은 남명의 학문적 태도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치열한 선비정신을 보여 준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조종도, 김면, 오운, 이로, 이정 등이 모두 남명의 문인이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던 셈이다.

 

남명은 ‘군자의 큰 절개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라 했다. 그가 몇 차례에 걸쳐 임금이 내린 벼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바로 ‘출처(出處)의 대절(大節)’을 중시한 결과였다. 그는 퇴계를 두고 평가하기를 “경호(퇴계의 자)는 왕을 도울 만한 학문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벼슬하는 사람들 가운데 출처의 지조를 지키는 사람에 거의 가깝다”고 했다.

 

1501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난 당대 최고의 유학자 남명과 퇴계 이황(1501~1570)은 비록 그 지향점이 서로 달랐지만, 동시대의 도학자로서의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 1571년에 퇴계의 부음을 뒤늦게 전해 들은 남명은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내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고 슬픔을 가누며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던가.

 

남명은 1572년 2월 8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다. 선조가 보낸 어의가 도착하기 전이었다. 남명은 사후의 호칭을 묻는 제자들에게 ‘처사(處士: 벼슬할 만한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선비)’가 옳다, 그리 쓰지 않고 관작을 쓴다면 자신을 버리는 짓이라 일렀다.

 

선조는 곧 예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고, 고인에게 대사간을 추증하였다. 남명은 운명한 지 두 달 뒤[선비의 장례는 유월장(踰月葬)이라 하여 한 달 이상이 걸린다.]에 산천재 뒷산 언덕에 묻혔다. 광해군 때에는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덕천서원은 남명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뒤인 1576년에 후학들이 세운 덕산서원이 광해군 때 사액 되어 덕천서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사액의 영광은 1868년 대원군에 의해서 훼철됨으로써 헛되이 스러졌다. 현재의 서원이 복원된 것은 1926년이다.

▲ 덕천서원. 남명 사후에 지었고, 광해군 때 사액 되었다 .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복원되었다 .
▲ 남명이 후학들을 가르친 강학 공간인 산천재. 한강 정구를 비롯한 숱한 제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
▲ 산천재. 오른쪽이 단청 없는 검소한 건물, 사랑채다. ⓒ 한국관광공사 사진

왕조시대에 학자로서 받는 가장 큰 영광은 문묘에 종사(從祀: 신주를 문묘 안에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 되는 것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문묘에 종사 된 인물이 모두 18인에 그치는 것은 조정에서 문묘 종사를 쉽게 허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내 ‘문묘 종사’가 거부된 영남 유학의 대종

 

광해군 때부터 영남에서 7번, 충청도에서 8번, 전라도에서 4번, 성균관 등에서 12번, 개성부에서 한 번,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에서 각각 한 번 등 계속 선비들이 상소로 남명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쇠퇴와 몰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덕천서원은 복원된 건물이었지만 80년의 연륜에 걸맞은 예스러운 격조가 만만치 않았다. 시정문(時靜門)으로 들어서면 전개되는 서원 마당이 시원했다. 정면 다섯 칸의 강당인 경의당(敬義堂)과 좌우의 동서재는 그 규모에 비기면 검소하고 소박한 기풍이 넘치는 듯했다. 동재와 서재 옆, 잎 벗은 배롱나무의 모습도 단아하다.

 

인근에 남명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덕산으로 들어오던 해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데 여기서 선생은 오건, 정구, 김우옹, 최영경, 곽재우, 조종도 등의 숱한 제자를 가르쳤다. 기둥에 처음 여기 들어와 살 때의 심경을 읊은 칠언절구 ‘덕산복거(德山卜居 : 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가 주련으로 걸려 있었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느 곳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천왕봉이 상제와 가까워 사랑스럽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나.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 십 리 먹고도 남겠지.

 

알록달록한 단청을 칠한 산천재는 사진에서 본 옛집과는 너무 달라 보였다. 문짝에 칠한 푸른 빛과 기둥에 발라놓은 붉은 기가 도는 단청 때문에 산천재는 어쩐지 경망스러워 보인다. 단청 없는 오른쪽 사랑채가 오히려 검박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주변의 남명 유적지에는 남명의 동상, 시비 등을 세우고 남명학연구원, 남명기념관 따위의 콘크리트 기와집을 높은 담장으로 둘러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남명의 사적을 여느 싸구려 관광지처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현에 대한 선양(宣揚)’의 방식은 여럿일 테지만 이 시대의 그것은 고작 토목의 방식에 머물고 만 것일까.

▲ 남명 묘소로 오르는 산길 . 남명의 장례는 선비들의 유월장으로 두 달 후에 치러졌다 .
▲ 남명의 묘갈명. 대곡 성운이 썼다. ⓒ <남명 조식> 김한수
▲ 남명의 묘소. 산천재 뒷산에 있는 소박한 유택이다.

일행은 아무도 기념관으로 들어가 보자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편 산길로 남명의 묘소에 올랐다. 그 언덕길에는 청미래덩굴이 상기도 열매를 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사진기에 담았고 여행에서 돌아와 그 ‘망개’ 이야기를 블로그에 썼다.

 

남명의 묘소는 소박했다. 봉분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묘역도 그리 넓지 않았다. 문인석 하나 서 있지 않았다. 오석(烏石)의 상석(床石) 하나와 오른편에 세운 묘갈명(정삼품 이하의 관원이나 평민의 무덤에 세우는 비교적 작은 비석)이 다였다. 묘갈명(墓碣銘)은 그의 오랜 벗인 성운(成運, 1497~1579)이 지었다. 그의 묘갈명 마지막 구절에서 성운은 피를 토하듯 읊조린다.

 

하늘이 이분에게 덕을 부여하여
어질고 또한 곧았다네.
그 덕 몸에 간직하여
스스로 쓰기에 풍부하였네.
은택이 널리 미치지 못했으니
시대가 그러했던가, 운명이었던가
우리 백성들 복도 없도다.

 

시대든, 운명이든 한 위대한 도학자를 품고 쓰지 못한 것은 왕조의 지배층이지만, 그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은 백성들의 몫이었던가.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말 없이 산에서 내려와 귀로에 올랐다.

 

 

2010. 8. 8.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