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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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후배 황 선생과 함께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에 들렀다. 애당초 목적은 해남 미황사였지만, 가는 길에 필암서원도 들르자고 한 것이다. 필암서원은 2019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서원 9곳 가운데,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과 함께 호남에 자리한 서원이라 일부러 찾지 않으면 들를 수 없는 곳이라서다.
정조가 ‘동방의 주자’로 기린, 퇴계와 견줄 만한 성리학자 김인후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운 필암서원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다. <대학>을 천 번 넘게 읽었고 <대학>을 버리고서는 ‘도(道)’에 이를 수 없다고 강조했던 도학자 김인후를 기리고자 1590년에 호남 유림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하서는 일반에 퇴계 이황(1501~1570)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대에 퇴계와 견줄 만한 성리학자였다. 퇴계를 기리는 도산서원이 영남 사림의 본거지라면, 필암서원은 호남 학맥의 본산이었다. 송시열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다 갖춘 사람은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했고 1796년(정조 20년) 문묘에 그의 위패가 봉안됐을 때, 정조는 ‘동방의 주자’라고 기렸다. 하서는 1천600여 수의 시도 남겼는데, 다음 시조는 그 대표작이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 늙기도 절로 하여라.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지방 유림의 청액소(請額疏: 사액을 청하는 상소)에 따라 ‘필암’이라고 사액 되었다. ‘필암’이라 이름한 것은 하서의 고향인 황룡면 맥동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1786년에는 하서의 문인이자 사위인 양자징(1523∼1594, 담양 소쇄원을 창건한 양산보의 아들)을 추가 배향하였다. 필암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호남 학맥의 본산, 세계유산이 되다
오후 2시가 겨워서 잘 정비된 주변 공원 한쪽에 자리한 필암서원 앞에 닿았다. 눈을 돌리면 어김없이 시야가 산에 막히는 영남 내륙에 사는 이들의 눈에 호남의 평야와 널따란 평지는 좀 각별하게 다가온다. 서원은 넓은 들판이 펼쳐진 널따란 평지에 편안하고 호젓하게 앉아 있었다.
문루 앞에는 하마석과 홍살문이 나란하고, 그 오른쪽 한 발 뒤에 수령 200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앞면과 옆면이 각각 세 칸의 2층 누각인 문루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평, 무사하다’라는 뜻을 담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짓고 쓴 ‘확연루(廓然樓)’다.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가 힘차다.
평지에 세운 필암서원은 2층 누각인 ‘확연루’에서만 서원 앞 넓은 들판을 내려다볼 수 있다. 그러나 강당 청절당은 여느 서원과 달리 문루를 등지고 돌아앉았으니 눈길을 줄 곳은 사당뿐이었다. 사방이 막힌 강학 공간에서 서책에 묻혀 지내던 서원의 유생들은 ‘확연루’에 올라서만 비로소 제대로 휴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유식(遊息) 공간인 확연루를 지나면 나란히 선 은행나무 두 그루 뒤로 강학 공간 청절당(淸節堂)이다. 이 강당 건물은 진원현(珍原縣:장성의 옛 이름)의 객사를 옮겨 온 것이다. 청절당이란 이름도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인데, 편액은 송준길(1606~1672)이 썼다. 당대의 명필 윤봉구(1681~1767)가 쓴 필암서원 현판은 처마 아래 걸렸다.
확연루를 등지고 북향한 청절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집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강당 앞에는 동서재인 진덕재와 숭의재가 마주 보고 있는데, 각각 앞면 4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인데, 진덕재는 가운데 두 칸은 대청, 양쪽에 1칸씩 방을 들였다. 숭의재는 마루 없이 온돌방 4칸으로 구성돼 있다.
강당이 사당을 바라보는 이유는 ‘하서 선생에 대한 경의’
대부분 서원의 강당은 문루를 바라보며 서 있지만, 유독 필암서원의 강당만 돌아앉은 이유는 유식 따윈 잊고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인가 싶었다. 진덕재에 쉬다가 나온 여성 해설사는 사당의 하서 선생에 대한 유생의 경의를 담은 거란다. 그것도 말이 되긴 하지만, 서책에 파묻혀 지친 유생의 시선에 잡히는 게 사당의 외삼문뿐이라면 그것도 숨 막힐 일이다.
청절당에서는 다달이 초하루와 보름에는 강회를 열었고, 우수자에게는 종이를 상으로 내렸다.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 외에,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전국 각지의 숱한 선비들이 필암서원에 찾아와 학문을 토론했는데, 그 자취는 갖가지 현판과 기문 등으로 남아있다.
서재 오른쪽에 ‘왕과 조상의 유물을 공경해 소장하라’라는 뜻을 담아 정조가 손수 현판을 쓴 ‘경장각(敬藏閣)’이 있다. 팔작지붕 아래 네 모서리에 3마리 용머리 조각은 거기 임금이 내린 유물이 소장돼 있다는 뜻이다. 30대에 뒷날 인종이 된 세자를 가르친 하서가 세자에게서 하사받은 대나무 그림 ‘묵죽도(墨竹圖)’ 한 폭을 보관한 것이다. 지금 묵죽도 원본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
경장각 오른쪽 내삼문으로 들면 제향 공간 ‘우동사(祐東’祠)다.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에 태어난 김인후 선생’이라는 뜻의 ‘우동사’에는 김인후를 북쪽 가운데, 그 동쪽에 사위인 양자징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우동사는 평소 굳게 닫혀 있어서 나는 담 너머로 우동사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동사 외삼문 오른쪽 담 앞의 빗돌은 ‘필암서원 계생비(繫牲碑)’다. 계생비는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는 비석이며, 제관들은 가축을 검사한 후 제물로 사용할지를 결정하였다. 비석의 뒷면은 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서원에 배향된 인물에 대해 기록한 묘정비(廟庭碑)다. 비석 하나의 앞뒤를 나누어 쓴 것도, 가축을 매어 놓는 비석을 앞에 둔 것도 이채롭다.
평지 서원의 대표, ‘서원 건축 배치의 변주’
서원에 금방 들어온 듯한데, 이내 사당 앞에 이르고 보니, 공연히 허전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 9곳 가운데 대부분은 산기슭에 자리하여 전저후고(前底後高)의 지형을 활용했다. 위계(位階)가 높은 건축물을 높은 지형에 두는 것이 권위를 더하는 것이라고 보고 문루에서부터 묘우까지 건물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차례로, 종적(縱的)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의 대칭적 건물로 배치한 것이다.
거의 평지에 가까운 돈암서원은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후면에 사당을 두었고, 역시 평지인 무성서원도 사당인 태산사만 축대 위에 높이 올렸다. 사당만이라도 위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러나 평지 서원의 대표적인 구조로 알려진 필암서원은 전학후묘의 형식은 따르되 문루를 등진 강당이 사당을 공손히 바라보는, ‘서원 건축 배치의 변주’로 일컬어진다.
청절당 마루 앞으로 사당인 우동사와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를 보관한 경장각이 자리 잡았다. 이는 평지 서원의 입지 조건에서 임금과 사당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하여 사당의 권위를 더한 것이다. 여기에는 하서가 인조의 스승이었던 관계도 고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동사 안 맨 왼쪽에는 전사청이, 흙담 동쪽 밖에는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에는 <하서전집> 649판, <초서 천자문> 18판, <해자 무이구곡> 18판, <백련초해(百聯抄解)> 13판 등 목판 700여 매를 소장하고 있다. 장판각 옆에는 노비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한장사(汗丈舍)가, 청절당의 왼쪽 담 너머에 고직사가 자리한다. 이처럼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 부대시설이 엄격하게 담장을 두어 나뉘어 있으나 모두 크고 작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원의 재산과 노비 등 운영 관련 문서’는 보물
사적으로 지정된 필암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서원의 재산과 노비 등 운영 관련 문서 소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필암서원에는 서원의 임원, 원생, 노비, 서원의 역대 원장들 명단과 서원의 재산 등을 적어놓은 문서들이 남아있는데, 모두 15책 65장인 이 문서들은 ‘필암서원문적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됐다. 특히 노비의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는 국내 하나밖에 없는 노비 족보로서 노비의 출신, 가족관계 등이 담겨 있다.
해설사와 이런저런 서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하고 서원을 나서는데, 뭔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이를테면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기대한 바가 충족되지 못한 듯한 아쉬움 때문일까. 영남에 있는 서원들에 비기면 호남의 서원은 규모도 그렇고, 어쩐지 변방이라는 느낌이 있는 것 같네……. 혼잣말처럼 중얼대는데 이도 또 다른 호남 차별은 아닐까 싶어서 꺼낸 말꼬리를 흐려 버렸다.
20230. 6.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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