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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⑨ 옥산서원의 장서 관리, 국보1, 보물 7점을 남겼다

by 낮달2018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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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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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내려다본 옥산서원. 왼쪽에 흐르는 시내가 자계천이다. ⓒ 경북매일신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가운데 옥산서원(玉山書院)을 마지막으로 찾게 된 데 다른 이유는 없다. 서원이 승용차로 두 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도내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옥산서원은 아마 내가 난생처음 들른 서원이었을 것인데, 그때 나는 스물아홉, 서원 근처의 여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고, 거기서 열일곱 살 여자애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40년 전 인연 맺은 소읍, 그리고 옥산서원

 

4년간 거기 근무하면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옥산서원에 소풍을 갔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옥산서원과 독락당이라면 인근 흥덕왕릉과 마찬가지로 읍내의 초중고생들이 지겹게 다닌 소풍지였기 때문이다. 농촌 소읍인 안강(安康)에서 서원 같은 사적지는 아마 맞춤한 체험학습 장소였을 것이다.

 

몇 해 뒤에 아내의 할머니가 오셨을 때, 거길 모시고 간 것도 드문 명승지였기 때문이다. 서원에 관한 기억은 한 자락도 없고, 도시락을 먹은 기억만 희미할 뿐인데도  옥산서원을 찾는 데 느긋했던 것은  그곳을 익숙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어서일 것이다.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난 것은 지난 7월 20일, 목요일이었다. 6월부터 벼르고 있었지만, 번번이 일정이 어긋나 결국 7월 염천에야 길을 떠난 것이었다. 서원에 관한 기억이 없기로는 아내도 다르지 않았다. 하긴 1984년부터 4년간 머물렀으니, 지금으로부터 좋이 36~40년 전의 일이다. 기억을 나무랄 수 없을 만큼 숱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중앙고속도로와 상주 영천 고속도로를 거쳐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서원 앞 주차장에 닿은 건 오후 1시가 넘어서였다. 40년이 훌쩍 흐르면서 서원 주변도 정비되고, 건물들도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쳤을 거다. 따갑게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 아내와 나는 주차장 근처를 휘둘러보았지만, 옛 기억은 한 자락도 건지지 못했다.

▲ 주차장에서 시내를 따라 오르면 옥산서원이 나타난다. 사주문 오른쪽의 건물은 마굿간이다.
▲ 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 수량이 많았고, 시냇가에 떡갈나무 등이 울창했다.
▲ 옥산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 담 안에 보이는 건물이 누마루인 '무변루'다.
▲ 옥산서원 역락문 앞의 자계천의 징검다리.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옛 '하마비'가 나타난다.
▲ 옥산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 <논어>의 "논어 첫머리의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이름이다.
▲ 옥산서원 배치도. 서원 안내도를 재구성하였다.

역락문 앞으로는 갖가지 고목과 반석이 어우러진 자계천(紫溪川)이 휘돌아가는 가운데, 옥산서원은 자옥산(紫玉山)을 바라보며 화개산(華蓋山)을 등지고 앉았다. 서원에 모신 인물은 도덕적 이상 국가를 지향한 성리학자로 인근 양동마을 출신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다.

 

도덕적 이상 국가를 꿈꾼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회재는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한 뒤, 1530년 사간으로서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김안로 일당의 몰락 이후 예조·이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는데, 윤원형 등이 일으킨 을사사화(1545) 때 추관(推官:심문관)에 제수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 윤원형 일당이 일으킨 양재역벽서사건(1547)에 무고 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거기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주자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을 정립하여 퇴계 이황(1501~1570)에게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이언적은 1532년(중종 27) 김안로 탄핵으로 파직되어 본처가 있는 양동마을이 아니라 둘째 부인이 사는 여기 자옥산 아래로 돌아와 ‘홀로 즐긴다’라는 의미의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을 세웠다. 여기엔 원래 둘째 부인을 들일 때 지은 안채와 행랑채, 그리고 그의 부친이 지은 초가 정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랑채를 짓고, 이듬해엔 3칸 초가 정자를 옆으로 2칸을 더 달아 지붕을 기와로 바꾸어 ‘계정(溪亭)’이라 하고, 이 마을을 계정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 옥산서원 역락문 앞 자계천 가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노송.
▲ 역락문 앞 자계천의 거대한 너럭바위. 가운데쯤에 퇴계의 글씨를 새긴 '세심대'가 보인다.

1572년(선조 5) 경주 부윤 이제민과 도내 유림의 공의로 이언적의 학행을 기리고자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세웠다. 다음 해에 경주 서악(西岳)의 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위패를 모셔 왔으며, 1574년 ‘옥산(玉山)’으로 사액(賜額) 되었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헐리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유식 공간인 ‘누마루’를 처음 도입한 서원

 

옥산서원은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 배치나 건축양식이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면을 보여준다. 공간 배치는 구인당(求仁堂) 중심의 강학 공간이 앞에, 체인묘(體仁廟)를 비롯한 제향 공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를 따르고 있다.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오른쪽에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이 나타난다. 문으로 들면 좁은 도랑 건너 2층 누마루인 ‘무변루(無邊樓)’가 앞을 가로막는다. 도랑은 자계천 상류에서 서원 북쪽 담장 아래로 끌어들인 물길이다. 옥산서원은 유식(遊息) 공간인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문을 겸하므로 ‘문루’라고도 한다)를 처음 도입한 서원이다.

▲ 옥산서원의 누마루 '무변루'. 서원 건립시에 지은 건물로 보물로 지정됐다. 옥산서원은 누마루를 처음 도입한 서원이다.
▲ 강당 구인당에서 바라본 무변루. 앞면 7칸, 옆면 2칸의 맞배집인데 좌우에 가적지붕을 설치한 특이한 건물이다. 오른쪽은 서재 암수재다.

서원 9곳 중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1543)과 옥산서원보다 늦게 건립(1575)된 도산서원은 누마루가 없다. 그러나 옥산서원에 앞서 건립된 남계서원(1552)은 1840년에, 도동서원(1568)은 1855년에 각각 누마루를 세웠다. 누마루를 세우는 게 일종의 서원 건축의 경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1572년 옥산서원 창건 시에 함께 세워진 무변루는 주변의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서향이다. 앞면 7칸, 옆면 2칸의 맞배집인데 좌우에 가적지붕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은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층은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둔 뒤 다시 좌우에 누마루를 구성하는 매우 독특한 평면이다.

 

한석봉과 김정희 등 조선 명필이 쓴 편액들

 

가적지붕은 맞배지붕 측면에 덧붙여진 한쪽으로 경사진 지붕을 이르는데 달리 ‘부섭지붕’이라고도 한다. 옥산서원 가적지붕의 누마루는 주변의 자연경관 조망을 무변루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실을 한다. 무변루는 앞에서 바라보면 다소 위압적으로 뒤쪽에서 보면 양쪽에 방을 들여 호쾌한 맛이 떨어지는데, 이 덧댄 지붕 덕분에 누마루를 두어 조망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무변루는 영의정 노수신(1515~1590)이 이름을 짓고, 석봉 한호(1543~1605)가 현판을 썼다. 무변루의 ‘무변’은 북송의 유학자인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원 밖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오게 하여 그 경계를 없애는 곳’의 뜻이다. 무변루는 옥산서원의 독락당과 함께 보물로 지정돼 있다.

▲ 옥산서원의 강당인 구인당. '옥산서원'과 '구인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대청 안쪽의 현판은 이산해가 썼다.
▲ 구인당(오른쪽) 뒤쪽의 사당 '체인당'(가운데)의 내삼문인 체인문. 왼쪽은 이언적 신도비의 비각이다.

‘무변루’ 아래의 돌계단을 오르면,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사이에 유생들의 숙소인 동·서재가 마주 보며 정사각형의 강학 공간을 이룬다. 팔작지붕 아래 앞면 5칸 옆면 2칸의 구인당은, 처마 아래 추사 김정희(1786~1856) 가 쓴 ‘옥산서원’ 현판을 달고 돌 기단 위에 앉았다. 대청마루 쪽의 천장 아래 걸린 현판은 명필 이산해(1539~1609)가 썼고, 마로 안쪽 구인당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구인당 뒤에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마음을 실천에 옮긴다’라는 뜻으로, 이언적이 주장한 실천철학의 핵심이라고 한다. 이언적은 김굉필(1454~1504), 정여창(1450~1504), 조광조(1482~1519), 이황(1501~1570) 등과 함께 ‘동방5현’으로, 조선 도학의 어른으로 기려진다.

▲ 서원 앞 자계천 너럭바위에 새겨진 세심대. '맑은 물에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서원을 끼고 도는 아름다운 계곡 ‘자계천’

 

역락문 앞으로 나오면 자계천의 넉넉한 물길 옆으로 거대한 너럭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너럭바위 일대가 이황의 글씨로 새긴, ‘맑은 물에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의 ‘세심대(洗心臺)가 있다. 뒷날 정조는 이언적의 학덕을 기리고자 이곳에서 ‘초시’를 치렀다고 한다.

 

옥산서원에서 서북으로 자계천을 따라 700m쯤 가면 ‘독락당’이다. 우리는 볕이 너무 뜨거워 걸어갈 엄두도 못 내고 승용차로 건너편 찻길을 타고 단숨에 독락당 앞 큰 주차장에 닿았다. 현재 독락당은 여주이씨 구암공파의 종택인데, 구암은 회재의 손자인 이준(1540~1623)이다.

▲ 옥산서원에서 700m쯤 떨어진 시냇가의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가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으로 '옥산정사'라고도 한다.
▲ 보물 독락당은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 구성물로서 '한국의 역사 마을 :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독락당 옆쪽 담장에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았다.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독특한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회재의 독락당 덕분에 옥산서원은 세계유산 2관왕이 됐다

 

중종 27년(1532년)에 건립된 독락당은 1964년에 보물로 지정되고,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 구성물로서 ‘한국의 역사 마을 :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옥산서원은 2019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이른바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

 

독락당은 회재가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와 지은 별장으로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계정(溪亭) 자리에 3칸의 띠집을 지었으나 뒤에 정혜사(淨惠寺) 주지의 주선으로 계정과 양진암(養眞庵), 독락당을 잇달아 지었다. 독락당은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공간이지만, 계곡을 따라 길게 휘돌아간 마을 안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독락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집인데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로 앞을 모두 터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들였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독특한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 양진암(왼쪽)과 계정(오른쪽)이 'ㄱ'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양진암 현판은 퇴계의 글씨고, 계정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
▲ 계정은 독락당의 ㄱ자형 별채형 정자로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으로 자계의 암반 뒤에 세워져 있다.
▲ 시내 아래쪽에서 바라본 계정. 암반 초석 위에 바위의 생김에 따라 각기 길이가 다른 누하주를 세우고 방과 마루를 들였다.
▲ 시내 건너편에서 바라본 계정. 주변 경관과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 원자력환경공단

독락당 뒤쪽 계정은 독락당의 ㄱ자형 별채형 정자이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으로 자계(紫溪)의 암반 뒤에 세워져 있다. 계곡 쪽으로 쪽마루를 내고 난간을 설치하여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경관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 그 난간에 기대어 주변의 풍광을 즐기거나, 마루에서 낮잠을 청할 수도 있을 듯했다. 

 

만추에 계정의 난간에 기대어 졸고 싶다

 

계정은 독락당의 부속 공간으로 계곡과 집안을 이어 주는 구실을 한다. 개울가의 암반 초석 위에 바위의 생김에 따라 각기 길이가 다른 누하주(樓下柱 : 누마루 아래 기둥)를 세우고, 정자의 바닥을 마루와 방으로 구성하였으며, 계곡 쪽 석축에 아궁이를 낸 보기 드문 형태의 건축이다. 계정이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보여준다는 평가의 의미를 알 듯도 했다.

 

계정에서 ‘ㄱ’ 자로 꺾어 지은 2칸 방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양진암은 정혜사 승려와 교류했던 이언적이 계정을 찾은 승려들이 머물 수 있게 배려한 공간이라고 한다. 양진암 현판은 퇴계의 글씨고, 계정의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 이 밖에도 계정 마루에는 걸린 편액은 11개에 이른다.

 

안채와 박물관은 보수공사 중이었고,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계정에서 얼마간 머물며 자계의 시냇물을 바라볼 수도 있건만, 불볕더위에 지쳐서 우리는 돌아섰다. 독락당을 나오면서 나는 40여 년 전에 들른 기억 따위는 설사 그게 생생하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 역락문 앞 시내에 건너편에 세워진 하마비. 지금과 달리 건립 당시는 이 길로 내왕했다고 한다.
▲ 자계천의 징검다리. 이 다리를 건너서 계단을 오르면 역락문에 이른다.
▲ 하마비 쪽에서 바라본 역락문. 예전에는 징검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 옥산서원을 출입했다.

옥산서원이 낯설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기왕에 알았던 옥산서원과 독락당은 아니었다. 나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넉넉한 시내를 끼고 있는 서원도, 주변 자연경관과 살갑게 어우러진 독락당도 한갓진 유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옥산서원은 서원만 덩그렇게 남은 여느 서원과 달리 회재 이언적이란 제향(祭享) 인물의 삶과 그 자취가 그가 살았던 독락당이란 건물에 오롯이 남았다. 회재는 독락당과 계정 주변에 있던 자연에 ‘사산오대(四山五臺)’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산오대를 자신의 정원으로 삼았다.

 

서원과 독락당 소장 국보1·보물 7점, 회재와 서원의 위상이 다르다

 

사적 옥산서원엔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 완질본을 비롯하여 무변루와 독락당 말고도 이언적의 집안인 여주이씨 옥산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고문서, 유묵(遺墨), 전적 등과 이언적 수고본(手稿本) 등 7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한 집안이 소장한 전적이 이처럼 보물로 지정된 사례는 흔치 않은데, 이는 옥산서원과 회재 이언적의 위상이 남다름을 증빙하는 것이다.

 

옥산서원은 ‘교육 내용과 장서 관리가 탁월’하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한국의 서원’ 9곳에 포함되었다. 옥산서원은 임진왜란 때도 피해를 보지 않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도 넘어 6·25전쟁 격전지였던 ‘경주 안강전투’의 포화도 피해 장서를 온전하게 지켜올 수 있었다. 후손들이 1972년 서원 동남쪽에 세운 서재 청분각(淸芬閣)에는 이언적의 친필 저서를 비롯해 유명 학자들의 책과 글씨 4천여 점 외에도 1577년(선조 10) 조정에서 하사받은 전적 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옥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는 서원 입학 규정, 교육평가 내용과 관련된 고문서는 선현 제향과 함께 지방 교육을 담당하던  옥산서원의 강학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다. 옥산서원에는 원생 선발 과정과 평가에 대한 자료에는 추천 유생의 명단과 추천자의 명단이 적혀 있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시내 쪽으로 ‘옥산서원 하마비’ 이정표가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논둑을 따라 들어가니 가슴 높이의 빗돌이 서 있다. 하마비 뒤로 내려가면 자계천, 징검다리를 건너면 서원 역락문에 이른다. 지금과는 달리 서원을 세웠을 때는 이 자리에서 말에서 내려 징검다리를 건너 서원으로 출입했다는 뜻이겠다.

 

애당초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내 계획은 양동마을까지 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어 시간으로는 옥산서원과 독락당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시간, 불볕더위의 방해까지 생각하면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어느 햇살 맑은 가을날에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다시 들르고, 내처 양동마을까지 가는 거로 계획을 바꾸고, 더위 먹은 몸을 차에 실었다. [한국의 서원 시리즈 끝]

 

 

2023. 8. 7. 낮달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서(序) 한국의 서원(書院)’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① 소수서원, 서원도 사액도 최초였던 백운동서원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② 도동서원, ‘엄숙 정제의 예를 실현한 서원의 전형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③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그리고 만대루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④ 남계서원, 서원 건축 배치의 본보기가 되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⑤ 도산서원, 퇴계의 위상과 명성을 상징하는 공간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⑥ 돈암서원, 호서 지역의 산림과 예학의 산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⑦ 무성서원-‘유교적 향촌 문화의 본보기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⑧ 평지 서원 필암서원, 소장 문서도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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