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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⑤ 도산서원, 퇴계의 위상과 명성을 상징하는 공간

by 낮달2018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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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陶山書院)

▲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은 퇴계의 명망과 숭앙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5백여 년을 이어왔다. ⓒ 안동관광

경북 안동은 두말할 것 없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고장이다. 이 고장이 이른바 영남 유림의 본거지가 된 건 퇴계와 그의 학문, 그의 문하들이 이룩한 성리학적 성취에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백여 년이 지나서도 굳건한 그의 위상과 명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다.

 

퇴계 생전의 도산서당, 사후 ‘서원’으로 이어지다

 

퇴계는 을사사화(1545) 이듬해 1546년(명종 1)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뒤 토계에은둔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물러날 ‘퇴’, 시냇물 ‘계’, ‘퇴계(退溪)’라는 호를 쓰게 된 게 이때부터다. 전국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명종 6)에는 계상서당을 지어 본격적으로 제자들 가르쳤고 이곳도 좁아지자 1560년(명종 15)에는 지금의 자리에 도산서당을 세워 강학했고 이듬해에는 그 옆에 농운정사를 세워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주변에 은거하며 한글 시가 도산십이곡도 남겼다. [관련 글 : 저 아름다운 한 사람을 더욱 잊지 못하네]

 

이황이 서거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지방 유림이 함께 의논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이듬해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도산서원은 퇴계에 대한 숭모 분위기와 더불어 조선 후기 영남 유림의 본거지로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다.

▲ 퇴계가 을사사화 후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 1560년에 세웠다. 절제된 소박한 건물이다.
▲ 도산서당 시절의 기숙소인 농운정사. 퇴계선생이 직접 기본 설계를 하였고, 서당의 서쪽에 있다.

관학(官學)인 향교의 문제점을 보완할 대안으로 등장한 서원제도가 성립한 시기는 16세기 중반이었다. 17세기에 들면서 서원은 제례의 봉행과 강학의 기능을 갖춘 사족 계층의 교학(敎學) 기구로 자리 잡았다. 1543년(중종 38) 주세붕이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풍기에 세울 때만 해도 사묘(祠廟:사당)와 서원을 별개로 보아 서원은 사묘의 부수적인 존재였다.

 

퇴계, 서원을 사림의 학문적 기반으로 정착하도록 보급

 

사묘는 교화를 위해 선현(先賢)을 기리는 곳이고, 서원은 단순히 유생이 책을 읽는 공간 정도에 그쳤다. 이황은 이러한 서원을 ‘유생의 강학소(講學所)’로 만듦으로써 조선 사회에 서원을 보급하고 정착시켰다. 풍기 군수를 지내면서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게 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고, 문인들과 함께 서원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명종 말년까지 건립된 서원 17개 중 절반 넘는 곳의 건립에 관여한 퇴계가 서원을 사림의 학문적 기반으로 정착하도록 보급하였다고 평가되는 이유다.

 

한편, 고려시대 이래 안동지역은, 재지(在地) 사족(士族)*이 강성하였을 뿐 아니라 유생들이 선호하는 피병(避兵:병마를 피함), 피세(避世:세상을 피함)의 안정적 자연지세를 갖추고 있어 일찍부터 사림이 형성되었다. 당대의 대유(大儒) 퇴계 이황의 학문 활동과 제자 양성, 서원 건립의 노력이 두드러지던 16세기를 거치면서 안동지역은 영남 유림의 본고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퇴계의 문하에서 유성룡(1542~1607), 김성일(1538~1593)과 같은 대학자들까지 줄줄이 배출됨으로써 이 지역은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 재지 사족 향촌의 지배 세력. ‘사족은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

▲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 한쪽에 세운 '추로지향'을 새긴 비석. 공자의 77대 종손이 1981년 도산서원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다한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다. 특히 1969년과 1970년에 박정희 정권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이순신의 현충사(1969), 세종대왕 기념관(1970)과 함께 주요한 역사적 위인과 관련된 사업으로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을 성역화한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박정희는 봉건 군주로는 세종 임금을, 무인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학자로는 퇴계 이황을 국민의 사표로 제시함으로써 근대화 사업에 정신적 영역을 추가하려고 한 것이다.

 

퇴계학의 본산, 유림의 참배소가 된 도산서원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은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과 도산서원 상덕사와 삼문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고을마다 서원이 있긴 하지만, 도산서원이 여느 서원과는 다른 이유는 이곳에 퇴계학의 본산이기 때문이다. 또 이황에 대한 존숭(尊崇) 의식이 지역사회뿐 아니라 유림에도 널리 퍼져 있어 조선 후기 유림은 도산서원을 한 번쯤은 참배해야 할 명소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도산서원을 찾은 성호(星湖) 이익(1579~1624)이 남긴 글에서 실증적으로 확인된다.

 

“영남 사람들은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선생의 어버이와 스승에 대해서도 모두 추중(推重)하고 향모(向慕)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선생의 유적이 있고 가르침을 베푼 곳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하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 이익, ‘도산서원을 뵈온 기문[알도산서원기(謁陶山書院記)]’

 

“우리나라에서 이선생(李先生, 이황)에 대한 사랑과 경모는 매우 극진하여, 문집을 통해 그분이 하신 말씀을 읽고, 문인들이 기록한 행록을 통해 그분의 행적을 읽는다. 이번에 또 도산도(陶山圖)를 통해 그분의 동정과 노닐던 모습들을 모두 상세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무릇 바위 하나, 물가 한 곳까지도 손으로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니, 흡사 수염과 눈썹의 올까지도 셀 수 있을 것만 같고 개연히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

   - 이익, 도산서원 답사 후 ‘도산도(陶山圖)’ 제작 발문에서


수평적 배치의 ‘서과 수직적 배치의 ‘서

 

여느 서원과는 다른 위상을 지닌 만큼 도산서원의 규모도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문루-중문-강당-내삼문-묘우 같은 중심축을 두고 지형의 높이로 위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도산서원은 퇴계 생전에 지은 도산서당의 건축물에다 퇴계 사후에 윗부분에 세운 서원 건물이 펼쳐지는 형태다.

 

생전에 조성된 아래쪽 도산서당(陶山書堂)의 건축물들은 필요에 따라 증축된 것으로 매우 자연스럽고 수평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 아래의 도산서당은 동쪽에, 서쪽에는 제자들의 기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역락서재(亦樂書齋)를 두었다. 정사의 왼편 앞쪽에 있는 역락서재는 담장을 두른 독립 공간이다. 이들 사이에 위계는 존재하지 않고 서로 동등한 관계에 있다.

▲ 도산서당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유생들의 기숙소 역락서재. 서원의 아래쪽에 있으며, 담장을 두른 독립 공간이다. ⓒ 도산서원

그러나 상부의 도산서원 건축물들은 철저하게 위계에 따라 수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맨 위에 신성한 제향 공간인 사당이 있고, 그 아래 강학 공간인 전교당과 부속 공간이 배치되는 형태다. 사당인 상덕사는 약간 동쪽으로 비껴 있고 강당인 전교당은 좌우 대칭의 틀을 깨고 마루 서쪽에만 방을 둔 비대칭 평면인데, 이는 동쪽에 있는 사당의 위계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원에 문루가 없는 것도 비슷한 뜻에서라고 한다.)

 

도산서당의 건축은 절제되고 소박한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서원의 건축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특징을 보인다. 서당은 색채 표현이 없는 대신 전교당은 화려하게 칠해졌고, 서당은 맞배지붕이지만, 전교당은 팔작지붕이다. 퇴계가 생전에 후학을 가르친 서당은 안빈낙도의 절제를 보여주지만, 서원은 퇴계를 존숭하는 건축물로서 장식된 것이다.

 

‘서’ 건축은 소박, ‘서’ 건축은 화려

 

수평적 공간의 도산서당 영역을 지나 서원의 경계인 진도문(進道門)을 들어서면 도산서원 영역이다. 진도문 좌우에 있는 2층 구조의 누각 건물인 동서 광명실(光明室)은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도서관이다. 원래는 동광명실만 있었는데, 서광명실은 근대 들어서 새로 지었다.

▲2층 구조의 누각 건물인 서 광명실.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도서관으로 원래는 동광명실만 있었는데, 서광명실은 근대에 새로 지었다 .
▲ 도산서원의 강학 공간인 전교당. 대청마루 좌우에 방을 두는 여느 서원과는 달리 서쪽 1칸만 온돌방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선조가 내린 도산서원의 사액 현판. 당대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다.

높다란 기단 위의 전교당(典敎堂)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집이며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마루 좌우에 방을 두는 여느 서원과는 달리 서쪽 1칸만 온돌방이다. 정면의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로 1575년 선조로부터 사액(賜額)받은 것이다.

 

전교당 앞마당에 낮은 기단 위에 원생의 기숙소인 동서재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 서재는 홍의재(弘毅齋)인데, 모두 3칸 집으로 전면의 반 칸을 내어 쪽마루를 달았다. 동재에 기숙하는 원생이 서재 원생보다 선배지만 두 건물은 규모나 장식에 있어서 차이는 없다.

 

전교당 뒤 동쪽으로 치우쳐 내삼문을 들어서면 퇴계와 그의 제자인 월천(月川) 조목(1524~1606)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 상덕사(尙德祠)다. 보통 사당 건물은 간결하고 근엄한 맞배지붕으로 구성하는데 상덕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집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된 도산서원의 사당 상덕사(위)와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역태극 문양에 단청을 하였다. ⓒ 도산서원
▲ 처음으로 도산서원을 찾은 2008년 10월의 서원 옆 산에는 단풍이 고왔다.
▲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 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시사단(試士壇)이 낙동강에 섬처럼 떠 있다.

내가 도산서원을 처음 찾은 것은 2008년 10월이다. 병산서원이나 소수서원은 여러 차례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도산서원은 내가 살던 동네, 근무하던 학교와는 반대 방향이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던 듯하다. 단풍이 한창 고울 때였는데 서원 앞 낙동강에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 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시사단(試士壇)이 섬처럼 떠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도산서당에서 시작하여 상덕사까지 돌아본 뒤의 내 느낌은 병산서원처럼 단순 시원한 느낌은 없고,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이 너무 많아서 번잡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게 도산서원의 위상이 남달라, 후대에 늘려서 지은 탓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이번에 새롭게 도산서원을 공부하면서 그게 잘못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퇴계 생전의 도산서당이 사후의 도산서원으로 확대된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 하고직사. 도산서당과 기숙사, 서재, 부속시설을 관리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노비들이 거처했다. ⓒ 도산서원
▲ 서원 앞 낙동강. 강물이 가을 햇빛에 반짝였다. 이 강은 안동댐으로 이어진다.

도산서원이 건물로 빽빽한 것은 다른 서원과 달리 제한된 공간에 도산서당 시절의 기숙소 두 곳, 서원의 서재인 두 곳의 광명실, 그리고 부속 공간인 두 곳의 고직사가 들어찬 데다 1970년에 퇴계 유물전시관인 옥진각(玉振閣)까지 세워져서다.  서원이 그처럼 커진 것은 전국에서 모여든 유생의 참배소 구실을 할 정도로 서원의 위상이 높고 컸기 때문이다.

 

2008년,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를 처음 장만한 시절이어서 찍은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 언제 기회를 만들어서 도산서원을 제대로 한번 다녀올까 싶은데,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겠다. 동네 도서관에서 출력해온 국회 전자도서관의 관련 논문을 뒤적이면서 10년도 전에 떠나온 도시 안동을 생각한다.

 

 

2023. 3. 25. 낮달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서(序)  한국의 서원(書院)’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① 소수서원, 서원도 사액도 최초였던 백운동서원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② 도동서원, ‘엄숙 정제의 예를 실현한 서원의 전형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③ 서원 건축의 백미 병산서원, 그리고 만대루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④ 남계서원, 서원 건축 배치의 본보기가 되다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⑥ 돈암서원, 호서 지역의 산림과 예학의 산실

[세계유산-한국의 사원] ⑦ 무성서원-‘유교적 향촌 문화의 본보기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⑧ 평지 서원 필암서원, 소장 문서도 보물이다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탁월한 장서 관리, 서원과 독락당에 국보1점과 보물 9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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