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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② 도동서원, ‘엄숙 정제의 예’를 실현한 서원의 전형

by 낮달2018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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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道東)서원

▲ 도동서원은 산자락 경사면에 전고후저의 지형을 활용했다. 문루인 수월루도 여러 단의 석축 위에 지어졌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도동(道東)서원을 찾은 것은 2020년 5월 4일이다. 달성군은 1995년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대구 남서부의 자치 군인데도 도동서원은 초행이었다. 중고교 시절에 달성군은 월배(당시엔 월배면, 지금은 달서구 월배동)나 화원유원지(화원읍)에 소풍을 다닐 만큼 인접한 동네였다. 그런데도 정작 이쪽으로 걸음이 뜸했던 이유는 달성군이 내 고향에서 대구를 거쳐서야 갈 수 있는 고장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순 넘어 처음 찾은 도동서원

 

여러 차례 도동서원을 찾겠다고 해놓고도 늦어져 퇴직하고도 4년 만에야 아내와 함께 바람 쐬듯 도동서원을 찾았다.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서대구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을 타고 가다가 북현풍 나들목에서 내렸던 거 같다. 1시간이 넘게 걸렸고, 거리는 80km에 이르렀다.

 

도동서원은 동방 오현(五賢)의 으뜸으로 문묘에 배향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을 기려 제사 지내는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의 하나다.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 1) 김굉필의 고향인 현풍에 향중(鄕中) 사림들이 세운 쌍계 서원(雙溪書院)이 사액(賜額 : 임금이 사원·서원 따위에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리던 일)과 서적을 하사받음으로써 비롯하였다.

▲ 도동서원의 문루인 '수월루'. '차가운 강을 비추는 달[한수조월(寒水照月)]'의 뜻이다. 1973년에 복원했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실되자, ‘보로(甫老)’로 개명하여 중건한 후 1607년(선조 40)에 재사액의 명을 받았으며, 1610년(광해군 2)에 ‘도가 동쪽으로 왔다’라는 뜻의 ‘도동(道東)’으로 현판을 걸고, 위패를 봉안했다. 1678년(숙종 4)에는 서원 중건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한강(寒岡) 정구(1543~1620)를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김굉필을 제향코자 쌍계서원으로 시작한 ‘도동(道東)서원’  


도동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과 사당(祠堂), 그리고 기와를 이용해 쌓은 담장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서원 전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도동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근세의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기려지는 김굉필은 일상생활에서 마땅한 도를 실천하자는 <소학(小學)>의 정신을 나타낸 ‘한훤’(춥고 따뜻한 기후)을 당호로 썼다. 이는 그가 일상에서 도를 실천하면서 덕성을 길러 중도를 얻고자 한 도학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한훤당의 학문과 실천은 조광조(1482~1519)로 대표되는 제자들에게 높게 평가되었다.

 

중종 대(1506~1544)에 조광조를 비롯한 김굉필의 문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성균관 유생들이은 1517년(중종 12)부터 포은 정몽주(1337~1392)와 한훤당을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에 종사(從祀)하자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그 결과였다.

 

비록 당대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문묘 종사 요청은 계속됐다. 이는 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동방 오현’의 문묘 종사 요청으로 이어졌다. 특히 오현 가운데 이름이 가장 먼저 올라 ‘수현(首賢)’으로 불린 김굉필을 일러 퇴계는 ‘근세 도학지종(道學之宗)’이라 하여 그가 조선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였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 대니산 다람재에서 내려다본 도동서원. 왼쪽에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이 도동서원이다. 앞에 은행나무가 보인다.

도동서원에 배향된 한강 정구는 김굉필의 외증손자로 그의 실천 도학을 도동서원에 구현한 퇴계 이후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정구는 퇴계 이황(1501~1570)과 남명 조식(1501~1572)에게 사사했고, 퇴계와 남명 학파의 학문을 통합하고자 힘썼다. 특히, 정구의 경세론은 실학파 등의 경세(經世)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김굉필의 외증손 정구가 세운 한국의 서원 건축의 대표

 

도동서원은 한국의 서원 건축을 대표하는 곳으로 이는 서원을 세운 정구가 유교 도학의 전통을 이어갈 방도를 생각한 결과였다. 정구는 서원의 입지·원규·제향·건물 배치 그리고 각종 석물과 건축의 세부까지 기획하였다. 그러나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건축물 배치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뒤로는 대니산(戴尼山, 408m),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이긴 하지만, 도동서원은 동북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주변의 산수와 지형 지세를 고려하여 굳이 남향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원은 전면의 평야와 백사장, 낙동강 등을 내려다보며 호쾌히 탁 트여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원을 바라보면, 앞면 3칸, 옆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 수월루(水月樓)가 앞을 가로막는다. 수월루 앞의 경사면은 자연석으로 쌓은 나지막한 축대가 다섯 단에 걸쳐 이어진다. 그러나 수월루와 나무에 가리어 서원의 본모습은 가려져 있다. 산기슭의 경사면에 지은 서원은 굳이 2층 누각이 없어도 전경을 바라볼 수 있었으므로 수월루는 애당초엔 없었던 누각이다. 1855년에 세웠으나 1888년 소실된 것을 1973년에야 복원하였다.

▲ 중정당에서 바라본 수월루. 애당초 없었던 건물로 나중에 지어졌다. 서원의 낙동강 조망을 방해하고 전체와의 조화를 깨뜨린다.
▲ 강학 공간인 중정당으로 드는 중문인 환주문. 사모지붕에 절병통을 꽂은 모습이다. 갓 쓴 유생도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다.
▲강당인 중정당에서 바라본 환주문과 수월루. 흙 담장에 둥근 수막새가 박힌 게 보인다.
▲ 도동서원의 건물 배치도

85년이나 공백이 있었으니 지금의 수월루는 19세기 건립 당시의 누각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현재의 수월루는 서원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조망을 방해하고 전체 건물과의 조화를 얼마간 깨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수월’의 뜻은 ‘차가운 강을 비추는 달[한수조월(寒水照月)]’을 뜻한다.

 

전학후묘, 전저후고 등 서원 건축의 기본 배치를 따른 도동서원

 

한국 서원 건축 공간의 기본 배치는 강학(講學) 공간을 앞에, 제향(祭享) 공간을 뒤에 두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다. 일정 규모 이상의 서원은 문루(門樓)라는 유흥과 휴식 공간을 서원 진입 부분에 추가한다. 서원 건축은 배치는 앞은 낮고 뒤는 높은 전저후고(前底後高)의 지형을 활용했다. 위계(位階)가 높은 건축물을 높은 지형에 두는 것이 권위를 더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동서원은 ‘문루-중문-강당-내삼문-묘우(廟宇=사당)’ 건물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차례로, 종적(縱的)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의 대칭적 건물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공간 배치는 엄숙 정제(嚴肅整齊)라는 유교적 예를 상징적으로 실현한 것이며, 도동서원이 그 전형을 가장 우수하게 표현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의 평가니, 나 같은 뜨내기 답사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말 뿐이다.

▲ 서원의 사당, 담장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서원의 강당 중정당. 앞면 5칸 중 가운데 세 칸이 대청, 양옆에 1칸 방을 들였다.
▲ 중정당의 3칸 대청. 양옆에는 각각 1칸 방을 들였다. 뒤에 보이는 현판은 선조의 사액을 배대유가 쓴 것이다.
▲ '도동서원' 현판. 위는 처마에 걸린 것으로 퇴계의 글씨를 모각한 것이고 아래는 선조의 사액 현판이다.

수월루를 지나면 다시 가파른 계단 위에 강학 공간인 중정당으로 드는 중문 환주문(喚主門)이 우뚝하다.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인데, 갓 쓴 유생은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작은 크기다. 사모지붕*에는 예쁘장한 절병통*을 얹었다. 문턱 자리엔 여닫이문을 고정하는 구실의 꽃봉오리를 새긴 돌을 박아 놓았다.

 

*절병통:궁전ㆍ사모 정자ㆍ육모 정자ㆍ팔모 정자 따위의 지붕 마루 가운데에 세우는, 기와로 된 항아리 모양의 장식.

*사모지붕:네모반듯한 정방형 평면의 건물에서 형성되는 지붕으로, 사면의 기왓골이 지붕의 정상부에 모이는 구조

 

환주문으로 들면 나지막한 석축 위에 높다란 기단에 강당 중정당이 올라앉았다. 중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가운데 세 칸은 대청, 좌우로 한 칸 반짜리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반 칸에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하였다. 기단이 높아서인지 보기보다 웅장한 느낌을 준다. 중정당은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중정당의 동재인 거인재 쪽에서 바라본 중정당. 중정당은 얕은 두 단의 축대 위에 높다란 기단 위에 올라앉았다.
▲ 서재인 거의재 쪽에서 바라본 중정당. 1605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사당, 담장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중정당 앞에는 동재인 거인재(居仁齋) 서재 거의재(居義齋)가 마주 보고 서 있다. 2칸의 온돌과 1칸의 마루로 구성된 간결한 구조다. 동서재는 서원을 찾을 때마다 각각 거기서 몇이나 기거하면서 공부했을까 싶을 만큼 그 좁고 작아서 머리를 갸웃하게 한다. 동재 뒤편에는 곡간채가 있고, 그 앞쪽의 문간채는 담장 바깥으로 이어진다.

 

중정당 뒤편의 경사면은 다섯 단의 낮은 축대를 쌓고 그 터에 모란 등을 심어 사대부 집의 후원처럼 꾸몄다. 축대 가운데에는 내삼문(內三門)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인데 서원의 제향 공간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제향을 받드는 날이 아니라 사당은 잠겨 있었다.

▲사당의 내삼문. 다섯 단의 축대를 쌓고 그 터에 모란 등을 심어 사대부 집의 후원처럼 꾸몄다. 축대 중앙은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 도동서원의 흙담장. 돌, 흙, 기와를 골고루 이용한 쌓은 담은 지형에 따라 꺾이고 휘돌며 높낮이가 바뀐다.
▲ 도동서원의 담장. 진흙을 섞어가며 막돌을 몇 줄 쌓아 올린 다음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되풀이하다가 지붕을 덮어 마무리했다.
▲ 도동서원의 담장. 암키와와 수막새 등을 활용해 쌓은 담장은 투박하지만 아름답다. ⓒ 오마이뉴스 김숙귀

다시 발길을 돌려 내려오는데 드물게도 보물로 지정된 서원의 담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담장은 진흙을 섞어가며 막돌을 몇 줄 쌓아 올린 다음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되풀이하다가 맨 위에는 지붕을 덮어 마무리했다. 그리고 아래위 두 줄에다 수막새를 듬성듬성 박아 무늬를 내었다.

 

수월루 복원 때 새로 쌓은 담장 외에 서원의 모든 담장은 이런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돌, 흙, 기와를 골고루 이용한 담쌓기와 수막새의 무늬도 멋지지만, 지형에 따라 꺾이고 휘돌며 높낮이가 바뀌는 담장의 변화도 좋다. 당연히 보물로 지정될 만큼의 격조를 갖춘 것이다.

▲ 서원 앞의 수령 440년 은행나무. 대구시 보호수로 지정됐다. 몇 개의 커다란 지지대가 나무를 받치고 있다.

다시 서원 앞, 대구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나이 약 440여 년의 은행나무 잎이 푸르러져 가고 있었다. 가을이면 서원 일원에 이 고목이 연출하는 단풍의 장관을 보러 오는 이들로 넘친단다. 대니산 중턱의 다람재에 올라 산 아래 도동서원을 한참동안 내려보다가 우리는 도동을 떠났다.

 

 

2023. 3.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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