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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한국의 서원]④ 남계서원, 서원 건축 배치의 ‘본보기’가 되다

by 낮달2018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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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灆溪書院)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남계서원 전경 ⓒ 경남신문
▲ 남계서원은 조선 5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을 기려 모신 서원으로 소수서원 다음에 건립됐다. 남계는 서원 곁은 흐르는시내 이름이다.

우리들 2장 1박이 함양이 고향인 군위의 미나리를 길라잡이 삼아 남계(灆溪)서원은 찾은 것은 2019년 10월 하순이다. 함양 여행은 내겐 2008년 1월에 이어 두 번째다. 50대 초반이었는데 두 벗과 함양의 화림동 계곡과 상림을 돌아본 여정을 함께했었다. 그때만 해도 남계서원은 우리의 답사 목록에 들어있지 않았었다. [관련 글 : 함양 상림(上林)에서 최치원을 생각한다 / 화림동 계곡에 으뜸 정자 농월정(弄月亭)은 없다]

 

소수, 문헌에 이은 세 번째 서원, 조선시대 명헌 정여창을 모신 첫 서원

 

가을날이 청명했는데 아뿔싸, 서원은 일부 공사 중이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1543)과 최충(984~1068)을 기려 세운 황해남도 벽성의 문헌서원(1549)에 이어 세 번째 건립된 서원이다. 소수서원과 문헌서원이 고려시대 명현을 모신 공간이었다면 남계서원은 조선시대 명현을 모신 첫 서원이기도 하다.

 

따로 유학에 대한 이해도 없을뿐더러 조선조 역사에도 밝지 못한지라 이 서원의 주향(主享:위패 가운데 으뜸)인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은 좀 낯설다. 정여창은 김굉필(1454~1504)과 함께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우리나라 유학의 정통을 전수한 성리학의 대가로서 학문의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둔 정통파 유학자였다.

 

모친상을 입자 3년 동안 시묘한 바 있는 그는 1490년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예문관검열, 시강원 설서, 안음(지금의 함양)현감 등 당하관에 머물렀다. 현감으로 안음을 다스리면서 백성들의 고통이 조세부담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라는 법을 지어 시행하자 정치가 맑아져서 백성의 칭송을 들었다.

 

1498년(연산군 4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무오사화 때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중종 대에 우의정에 증직(贈職:사후에 벼슬과 품계를 내림)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 : 학행과 덕망이 있는 사람을 문묘에 올려 한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 되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났을 때 처하는 극형으로 무덤에서 관을 꺼내어, 그 관을 부수고 시신을 참수하는 것으로, 부관 형과 참시 형을 합친 형벌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이 의논하여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藍溪)’라고 사액(賜額: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새겨 내림) 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옛터인 현재의 자리(수동면 남계서원길 8-11)에 중건한 것은 1612년이다.

▲ 서원 앞마당에 세운 정려문. 왼쪽에는 하마비도 있다.
▲ 출입문을 겸한 풍영루. 창건 당시에는출입 삼문이었으나 1840년에 다락집을 올렸다. 누마루는 옥산서원이 세운 이후 일반화됐다.

1634년(인조 12) 별도의 사당을 세워 강익(1523~1567)을 모셔 제사하고 1642년(인조 20)에는 유호인(1445~1494)과 정온(1569~1641)을 함께 모셔 제사하였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 정온,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본 사당)에 올려 배향하고, 1820년(순조 20)에 정홍서(1571~1648)를 별사(別祠)에 모셨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별사는 헐렸으나 남계서원은 헐리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다

 

일행이 남계서원 앞에 닿은 것은 오전 11시였다. 널따란 서원 앞마당은 주차장으로 쓰는 공간 밖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문루(門樓) 앞 저만치에 하마비와 함께 정려문이 서 있었다. 풍영루(諷詠樓)라는 낡은 현판을 달고 있는 문루는 창건 당시엔 출입 삼문(三門)이었으나, 1840년에 다락집을 올렸다.

 

서원 정문에 누마루 건축물을 처음으로 세운 데는 1572년 창건한 옥산서원이었고 이후에 서원에 누마루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사당을 중심으로 강학 공간이 불규칙하게 확장된 소수서원과는 달리 남계서원은 공자를 모신 문묘의 건물 배치를 서원에 적용했다. 즉, 높은 곳에 사당을, 낮은 곳에 강학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취했는데 이는 뒷날 서원 건립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풍영루는 서원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누각이면서 서원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잠시 쉬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화강석을 다듬은 석재기둥 위에 건물을 올려놓았다.

▲ 남계서원의 강당 명성당(정면). 왼쪽 바로 앞에는 서재, 그 앞의 비각은 묘정비다. 오른쪽은 공사 중이라 가림막을 쳐놓았다.
▲ 서원 강당 명성당. 서원 현판을 대청마루 추녀 아래 각각 '남계'와 '서원'으로 나누어 달았다. ⓒ 행복한 경남
▲ 강당 명성당에서 내려다본 서원. 오른쪽 앞에는 서재인 보인재, 그 앞 연못 옆에 선 비각은 묘정비다.
▲ 서재인 보인재 뒤란에서 바라본 서원. 동서재는 경사진 지형에 지어 각각 누마루 1칸, 온돌방 1칸을 들였다.

서원 건축의 배치 형식을 시원적으로 제시한 남계서원

 

남계서원은 다른 서원에 비해 건축공간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그러나 서원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각 건축물의 배치형식까지 시원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여느 서원과는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남계서원이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개소의 하나가 된 이유는 충분한 셈이다.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남계서원도 입구인 풍영루부터 강학 공간인 명성당과 제향 공간인 사당까지 가파른 경사를 자연스럽게 이용해 건물을 배치해 놓았다. 위계(位階)가 높은 건축물을 높은 지형에 두는 것이 권위를 더하는 것이라고 본 결과다.

 

풍영루를 지나 서원으로 들어서면 왼쪽 비각 한 채가 서 있다. 서원에 정여창, 정온, 강익 선생을 모시고 향사(享祀)하고 있음에도 이를 기리는 송덕비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다가 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세운 묘정비(廟庭碑)다. 비문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 김종후가 지었다.

 

묘정비를 지나면 축대 위에 강학 공간이 펼쳐진다. 좌우에는 온돌방 1칸과 누마루로 1칸으로 이루어진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좌우에서 마주 보고 있다. 중앙의 축대 위에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집이 서원의 강당 명성당(明誠堂)이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 방은 거경재(居敬齋),왼쪽 방은 집의재(執義齋) 현판이 걸렸다. 명성당은 2칸의 대청마루에 서원의 현판을 ‘남계(藍溪)’와 ‘서원(書院)’으로 나누어 달아 놓았다. 명성당의 규모는 다른 서원에 비해서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의 표준에 가깝다.

 

강당 건물을 중심으로 그 앞에 동서재가 자리 잡는 형식은 성균관이나 향교의 강학 공간에서 보이는 건물 배치이다.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1543)에서는 이런 형태의 건물 배치를 볼 수 없다. 이런 건물 배치는 남계서원에서 처음 시작되고 후대 서원들에서 이러한 건물 배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 가파른 경사면의 돌계단을 오르면 사당이다. 사당 앞쪽으로 병산서원 묘우처럼 배롱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 남계서원의 사당. 주벽은 일두 정여창, 서쪽에는 동계 정온, 동쪽에는 개암 강익 선생을 각각 모셨다.
▲ 사당 담장 너머에는 키 큰 노송이 푸른 잎을 드리우고 서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기품 있게 자란 소나무가 썩 잘 어울렸다.
▲ 사당 앞에서 내려다본 서원. 명성당과 풍영루가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명성당 왼쪽 건물은 경판고다.

명성당 뒤편의 가파른 경사면 중앙에 난 돌계단을 오르면 푸른 하늘을 이고 선 사당이다. ‘사당은 높은 곳에, 강당은 낮은 곳에 둔다’라는 ‘상묘하학(上廟下學)’의 공간 배치다. 자연스럽게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공간 배치를 한 성균관과 다른 형식이다. 이는 향교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던 공간 배치로 남계서원에서 처음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묘후학’이 아닌 상묘하학 배치의 본보기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 반의 아담한 맞배집이다. 주벽(主壁 : 사당에 모신 위패 중 주장되는 위패)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서쪽은 1675년(숙종 1)에 동계 정온을, 동쪽은 1689년(숙종 15)에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을 모셨다.

 

사당과 서원의 담장 너머에는 잘 자란 노송이 푸른 잎을 드리우고 서 있었다.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기품 있게 자란 소나무가 썩 잘 어울렸다. 우리는 명성당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사진 한 장을 박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원은 크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고 잘 정돈된 듯한 균형감이 있었다. 보수 공사 중이어서 완전한 모습을 렌즈에 담지 못해나는 못내 아쉬웠다.

▲ 명성당 처마에 걸린 풍경
▲ 근처에 있는 김일손 선생을 기려 세운 청계서원. 옛 청계정사 자리에 1915년 서원을 세웠다.

남계서원 왼쪽에는 연산군 때 학자인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는 청계(靑溪)서원이 있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그는 연산군 1년(1495)에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부근인 함양군 지곡면에는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 있는데 2008년 방문에 잠깐 들렀었다. 정여창 고택은 대지 3천 평, 11개 동의 건물로 18세기에 개축된 사랑채를 제외하곤 건물 대부분이 16~17세기에 건축되었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건축물로 1984년에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일두고택 바로가기]

▲ 함양군 지곡면에는 일두 정여창의 고택. 2008년 방문 때 찍은 사진이다.
▲ 함양 시장의 이름난 음식점에서 먹은 어탕 국수.

우리는 함양 읍내로 나가 시장의 이름난 어탕 음식점에서 어탕을 한 그릇씩 비웠다. 그리고 상림공원을 찾아 연밭을 거닐었고, 오도령(悟道嶺)의 지리산 제일문, 변강쇠 옹녀 공원을 돌아보았다. 짧은 함양 답사는 복원한 농월정 앞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마감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공사가 끝난 서원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반갑잖은 손님 코로나19가 온 세계를 덮쳤고, 납작 엎드려 지낸 몇 해가 훌쩍 지나갔다. 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아쉬우나마 2019년의 사진 몇 점으로 남계서원을 다시 돌아보았다. 수박 겉핥기에 가깝지만 뒤늦은 공부에 만족한다. 

 

 

2023. 3.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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