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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한국의 서원] ⑦ 무성서원-‘유교적 향촌 문화’의 본보기

by 낮달2018 20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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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무성서원(武城書院)

▲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원촌1길 44-12에 있는 무성서원. 최치원, 신잠과 향현 여섯 분을 모셨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최치원 초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북국시대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인 최치원(857~?)을 기려 세운 무성서원은 전북 정읍시 칠보면에 원촌1길 44-12에 있다. 내장산 단풍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함께 무성서원을 찾은 건 2019년 11월 11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서둘러 내장산을 떠났지만, 서원 앞 주차장에 차를 댈 때는 오후 2시가 가까웠다.
 
태산(옛 정읍) 태수를 지낸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
 
강수·설총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히는 최치원은 일찍이 13세 때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의 난’(879) 때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지어 문명을 날린 이다. 최치원은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위치하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의 수용과 발전이 신라의 전통적 토착 문화를 토대로 구현되었음을 부각하는 소중화적(小中華的) 자존의식 自尊意識)도 함께 지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래도 같음) 이였다.
 
“(최치원은)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알리려고 하였다. 특히, 사람에 도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인간 중심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여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다만, 생존 당시 신라가 쇠퇴하여 정치 이념과 사상은 신라 사회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장은 동아시아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 무성서원은 너른 평지에 야트막한 성황산을 등지고 단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중앙이 문루, 좌우의 건물은 비각이다.
▲ 무성서원의 문루인 현가루. 현가루는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와 마찬가지로 뒷날인 1891년에 세워졌다.

최치원은 29세 때 고국으로 돌아와 여러 고을에서 태수를 지냈다. 그가 태산(정읍의 옛 이름) 태수로 있다가 떠나자 지역민들이 그의 인품과 선정을 잊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을 기리는 사당인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이 ‘생사당’은 1483년에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이곳으로 옮겨져, 옛 지명을 따라 ‘태산사(泰山祠)’라 불리었다.
 
태인현감 지낸 신잠과 정극인 등 향현 5분을 배향
 
신잠(1491~1554)은 신숙주의 증손이며 태인 현감(1543~1548)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태인의 동서남북 네 곳에 학당을 세워 유학을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태인을 떠나게 되자 백성들이 그를 기리는 빗돌을 세우고, 그의 조각상과 부인, 큰아들의 상, 시중드는 여인상, 호랑이상을 만들어 모실 정도였다.
 
1549년(명종 4) 태인 지역 유림이 신잠을 기리는 ‘생사당’을 세웠는데, 1615년 최치원의 ‘태산사’와 신잠의 ‘생사당’, 그리고 ‘향학당’을 합쳐서 ‘태산서원’이 되었다. 태산서원은 1696년에 숙종이 ‘무성서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다. ‘무성(武城)’은 신라 때의 이 고을 이름이면서 공자의 제자 자유가 다스렸다는 고을 이름이기도 하다.
 
무성서원에는 7명의 선현을 배향하고 있는데 최치원과 신잠은 이곳 수령을 지낸 외지인이고 1630년에 추가 배향된 정극인(1401~1481), 송세림(1479~?), 정언충(1491~1557), 김약묵(1500~1558), 김관(1575~1635)은 모두 지역 출신의 선비, 즉 향현(鄕賢)들이다.
 
*정언충(鄭彦忠)은 조선 후기 나주 목사, 승지,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인 동래정씨 정언충(1706~1771)과 다른 인물임.

▲ 강당 오른쪽 담장 너머에 있는 무성서원의 유생 기숙사인 강수재. . 원래는 서재인 흥학재도 있었으나 현재는 동재인 강수재만 남아 있다.

추배된 인물들은 영광정씨·여산송씨·경주정씨·도강김씨로, 생몰 시기와 성씨는 각각 다르지만 서로 가까운 친인척이었다. 이들의 벼슬은 각각 정언·현령·목사에 머물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진사시 합격에 그쳤지만,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에 함께 배향되면서, 그 후손들은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향현 5분은 ‘지역의 유교적 향촌 문화’를 보여준 선비들
 
보통 서원의 제향 인물은 지역사회 강학 활동과 성리학 연구를 중심으로 선정하는 것과 달리 무성서원의 제향 인물들은 모두 15~17세기 태인을 연고지로 하여 ‘지역의 유교적 향촌 문화’를 보여주었던 선비들이었다. 1696년 전라도 내 유생 202명이 서원의 사액을 청한 것도 향촌 문화에 이바지한 이들의 공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정극인은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賞春曲)’과 단가 ‘불우헌가’, 경기체가 ‘불우헌곡’을 지은 이다. 세종 때 상소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처가인 태인(지금의 정읍)의 고현내(古縣內)에 내려와 불우헌(不憂軒)을 짓고 은거하였다. 단종 때 관직에 나아갔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사직하고 태인으로 돌아와 지금의 무성서원 자리에 서당인 향학당을 짓고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정극인은 강학 활동과 함께 지역민들과 함께 조선조 최초의 향약(鄕約)이라 할 수 있는 고현동 향약(보물)을 시행했다. 또 고을 선비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 의례인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여 태인 지역을 유교적 공동체로 교화해 나가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 서원의 명륜당 쪽에서 바라본 현가루. 현가루는 <논어> '양화 편'의 '현가불철(거문고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에서 따왔다.
▲ 마치 여염집처럼 수더분해 보이는 무성서원의 강당 명륜당. 가운데 3칸은 대청, 양옆에 방을 들였다.
▲ 뒤쪽에서 본 명륜당. 특이하게도 대청마루 뒤쪽에 문이 따로 없이 트여 있다. 명륜당은 1825년에 소실되어 1828년에 다시 세웠다.

거의 평지에 세워진, 단정하고 검소한 모습
 
무성서원은 골목길 끝 홍살문 너머 너른 평지에 야트막한 성황산을 등지고 단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외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마을의 크고 작은 집들에 둘러싸인 모습은 경관이 수려한 데 세운 여느 서원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산기슭 경사진 데 배치하여 높이로 위계를 드러내는 여느 서원과는 달리, 무성서원은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따랐지만, 사당인 태산사만 축대 위에 높이 올렸다.
 
정문인 외삼문 ‘현가루(絃歌樓)’는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루이자 유생들의 휴식처다. 현가루는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와 마찬가지로 1891년에 세워졌고 1903년 중수했다. ‘현가루’는 <논어> ‘양화 편’의 ‘현가불철(絃歌不輟, 거문고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에서 따왔다.
 
현가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2층 누각이다. 1층 나무 기둥 사이에 세 개의 문을 만들었고, 2층은 4면이 트인 누마루 구조다. 2층 누각에는 ‘무성서원 중수기’를 비롯한 여러 현판이 걸려있다. 현가루 좌우로 담장이 이어지고, 담장 앞에는 흥선대원군의 형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의 불망비와 무성서원 중수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현가루’를 지나 마주하는, 3칸의 마루로 앞뒤가 훤하게 트인 구조의 강당이 ‘명륜당’이다.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에서 유래한 명륜당은 태산서원 창건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른 건물이었지만, 1825년에 소실되었고 1828년 태인 현감 서호순이 다시 세운 건물이다.

▲ 명륜당 처마에 걸린 무성서원 현판. 1696년에 숙종이 내린 사액 현편이다.
▲명륜당에서 바라본 사당 태산사. 태산사 외삼문이 보인다.
▲ 명륜당 대청마루 뒤쪽에서 바라본 현가루. 현가루와 명륜당은 평지에 세워져 높이 차이가 거의 없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돌계단도 나지막하여 ‘무성서원’ 현판만 없으면 마치 여염집의 안채처럼 느껴질 만큼 소박하고 수더분한 모습이었다. 가운데 세 칸은 대청마루, 양옆에 방을 들였는데, 아궁이 때문인지 방 앞 툇마루는 대청마루보다 조금 높다. 특이한 것은 대청 뒤편에 문이 없어서 사당인 태산사의 삼문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강당 앞에 유생들의 거주 공간인 동서재가 대칭으로 앉은 여느 서원과 달리, 기숙사인 ‘강수재(講修齋)’는 강당 오른쪽 담장 너머에 있다. 원래는 서재인 흥학재(興學齋)도 있었으나 현재는 동재인 강수재만 남아 있다. 강수재는 사액 후에 고직사(庫直舍, 서원 관리인의 살림집)를 기숙사로 변경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24년(1887)에 세워진 것으로 이후에 여러 번 수리하였다고 한다.
 
꽤 너른 명륜당의 뒤란, 다섯 단의 돌계단 위에 태극 문양의 사당 내삼문이 서 있다. 태산사는 신라 말 태산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최치원을 기리고자 세운 생사당이었는데, 앞면 3칸·옆면 3칸의 맞배집으로 성종 14년(148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며, 현재 건물은 헌종 10년(1844)에 세운 것이다.
 
무성서원의 ‘비각영역’과 병오창의기적비
 
무성서원에는 특이하게도 담장으로 둘러싸인 ‘비각영역’이란 공간이 있다. 강학영역이나 제향영역과도 담장으로 구분된 ‘제3의 공간’이다. 명륜당 서쪽 담장 안에 신용희 불망비와 현감 서호순 불망비가 남북으로 비각에 모셔져 있다. 명륜당 동쪽, 강수재 앞에도 정문술 중수의조비(重修義助碑)와 최영대 영세불망비 비각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서원의 중수 등을 도운 이들이다.
 
강수재 앞에 우뚝 선 빗돌은 80여 명의 선비들이 항일 의병에 뜻을 모은 기록 ‘병오창의기적비’다. 1905년 일본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1906(병오)년 6월 최익현(1833~1906)과 임병찬(1851~1916)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의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최익현은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부당함을 부르짖으며 거병하였으나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순국하였다. 1992년,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을 기억하고자 이 빗돌을 세웠다.

▲ 을사늑약 뒤 1906년 6월 최익현과 임병찬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거병한 '호남 최초의 의병'을 기린 강수재 앞 '병오창의기적비'.
▲ 현가루 양옆으로 이어진 담장 앞의 빗돌들. 흥선대원군의 형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의 불망비와 무성서원 중수기념비 등이다.

무성서원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김인후(1510~1560)를 모신 장성의 필암(筆巖)서원,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을 이끌고 금산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1533~1592) 삼부자 등을 모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함께 서원철폐령에도 헐리지 않고 살아남은 서원이다.
 
무성서원은 또,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奉審案)·강안(講案)·심원록(尋院錄)·원생록(院生錄)·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자료가 보존된 곳이다. 호남에서는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과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이 각각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가운데 이름을 올렸다.
 
무성서원이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 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인정”되는 서원이라는 것이겠다.
 
 

2023. 5. 19. 낮달
 

[세계유산–한국의 서원] 서(序) 한국의 서원(書院)’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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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한국의 서원⑨ 탁월한 장서 관리서원과 독락당에 국보1점과 보물 9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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