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유럽③] 르네상스 발원지, 꽃의 도시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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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 일정은 피렌체(Firenze)에서 시작되었다. 아르노강가에 닿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나는 무심하게 강 저쪽의 이어진 버드나무 숲과 야트막한 언덕 주변 마을의 붉은 지붕을 건너다보았다. 여기가 플로렌스란 말이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한 바퀴 둘러 보았지만,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았다.
피렌체에 닿았지만, 이 도시의 이름은 내게 낯설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이래 이 도시를 ‘플로렌스’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수익 시인의 연작시 한 편 때문이었다. ‘우울한 샹송’의 서정시인은 이탈리아 북부의 오래된 도시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여, 잃어버린다는 일은 / 결코 슬픈 것만이 아니지만 / 내가 다시 그리운 플로렌스의 꽃들을 부른다면 / 꽃들은, / 알아서 화답의 눈빛을 띠울 것인가 / 그전처럼 설레이는 몸짓으로 내게 / 다가올 것인가……친구여.’
- 이수익 ‘목소리 10’ 중에서
‘꽃의 도시’ 피렌체, 혹은 플로렌스
우연히 어디선가 읽게 된 이 시를 나는 이내 외워 버렸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 시 덕분에 나는 지금도 피렌체를 익숙한 이름 플로렌스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플로렌스의 ‘꽃’을 호명했지만 정작 피렌체가 ‘꽃의 도시’가 된 것은 그 이름 때문이다.
피렌체가 꽃의 도시로 불리게 된 것은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가 아르노강에 식민지를 세울 때, 보라색 꽃으로 덮인 이곳을 ‘꽃피는 마을’이란 뜻의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부른 데서 비롯하였다. 영어식 표기 ‘플로렌스(Florence)’도 거기서 나왔다.
피렌체가 이탈리아 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은 12세기였다. 상업과 모직물 공업의 발달로 내륙 도시이면서도 몰락한 항구 도시 피사를 외항으로 접수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의 피렌체를 이룬 것은 이 도시에서 시작된 문예부흥, 르네상스(Renaissance)였다.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유럽 문명사를 수놓은 르네상스는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하는 ‘문예부흥’ 운동이었다. 르네상스는 역사적으로는 신 중심의 중세를 마감하고 인간 중심 시대인 근대를 이어주는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원한 것은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같은 도시가 자치권을 가지면서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었고 인간에 관한 관심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도시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무역을 통해 성장한 경제력으로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다.
특히 피렌체는 군주제를 채택한 다른 여러 도시국가와는 달리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민 도시국가’ 였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길드(guild)를 조직하여 이 도시를 거대한 경제공동체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시민으로 성장했다.
모국어로 쓴 단테의 <신곡>, 르네상스의 시작
피렌체 시민들에겐 법률적으로 차별을 받을 때 공개 석상에서 “나는 피렌체 시민이다!”라고 외칠 권리가 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제기된 차별에 대해서 정부는 무조건 재조사에 들어가야 했다.
이처럼 한껏 높아지고 보장된 사상적, 정치적 자유를 바탕으로 예술가들은 피렌체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당당히 예술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단테(1265~1321)와 보카치오(1313~1375)와 같은 문인들과 함께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단테와 보카치오에 이어 마키아벨리(1469~1527), 미켈란젤로(1475~1564)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동시대에 같은 도시에서 활동하며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예술,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간 곳이 바로 피렌체였다. 이 ‘꽃의 도시’에서 르네상스를 규정짓는 인본주의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에 힘입어서였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활동했지만 일련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고향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피렌체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귀향을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아드리아해 쪽의 내륙 도시 라벤나에서 죽었다. 단테의 위대한 서사시 <신곡(神曲)>은 그 19년 동안의 망명 생활 중에 쓴 것이었다.
중세 지배계급의 문자였던 라틴어를 능란하게 구사했던 단테는 굳이 속어로 여겨지던 민중의 언어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썼다. 그것은 당대에는 혁명적 시도였고, 이로 말미암아 단테는 엄청난 반발과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단테 덕분에 이탈리아는 모국어로 쓰인 불멸의 문학작품을 가질 수 있었다. 단테가 ‘피렌체의 얼굴’로 추앙받는 이유다.
생의 절반을 보낸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홀로 어두운 숲속에 서 있었다. / 아, 그토록 음산하고 울창하며 험한 그 숲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 생각만 해도 두렵고 죽음 못지않게 괴롭지만, 거기서 찾아낸 행복을 알리기 위해 익히 보아 둔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리라. / 나 어떻게 해서 그 숲으로 들어섰는지 알 수 없지만 올바른 길을 버렸을 때, 그토록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 그러나 어느 언덕 기슭, 내 마음을 공포로 쥐어짜던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 우러러 높이 바라보니, 사람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커다란 유성(遊星) 빛이 산기슭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 그토록 고달프게 지새던 밤, 가슴 깊이 소용돌이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 단테, <신곡> 제1곡 중에서
뒷날, 피렌체는 단테를 추방한 것을 후회하고 라벤나에 그의 유골 송환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829년 피렌체 시의회는 산타크로체(Santa Croce) 성당에 그의 무덤(유골이 없으니 이는 가묘인 셈이다.)을 만들었고 2008년에는 단테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무효로 했다.
산타크로체(‘성스러운 십자가’의 뜻) 성당 앞에 단테의 동상을 세운 것은 그런 뜻에서다. 피렌체에서 두오모(대성당) 다음의 큰 교회인 산타크로체의 지하에는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등 지역 출신의 유명인사 276명이 잠들어 있어 ‘피렌체의 판테온(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단테의 흔적을 찾아 들른 단테 박물관 주변에는 허리가 굽은 집시 노파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박물관 외벽에 걸린 단테의 흉상과 단테의 옆모습을 새긴 바닥 돌이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었지만, 나는 이내 그곳을 떠나고 싶어 했다.
다시 만난 ‘당국’과 ‘시민’의 관계
좁다란 골목 안에는 몽마르트르에서 만났던 것과 똑같은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탈리아 지도처럼 번져간 방뇨의 흔적을 지켜보다가 나는 다시 가이드에게 ‘당국’을 들먹이고 말았다. 로마에서 20여 년째 살고 있다는 교민 가이드는 머리를 갸웃했다.
“어쨌든 세계적 관광도신데…, 이런 것도 관리가 안 되는 건 문제 아닌가요?"
”글쎄요. 여긴 경범죄라는 게 없거든요. 남에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행위에 대한 규제 따위는 없다고 보면 되지요. 그건 시민에게 맡겨져 있는 거고요. 이건 한국을 기준으로 해서 맞다, 틀린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단지 다를 뿐이니까요."
그건 시민을 ‘규제’의 대상으로 보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는 20년간 현지에 살면서 내면화된 가치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여전히 ‘당국과 시민’의 관계를 규제의 ‘갑을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5, 6세기 이전에 피렌체의 시민들이 영주나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획득한 자치권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머리를 끄덕이긴 했지만 나는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
인파에 부딪히며 다다른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은 이 도시의 상징이다.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지만, 뒤에 동방의 영향을 받은 거대한 돔을 얹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탈리아어로 ‘두오모(Duomo)’는 흔히 ‘대성당’의 뜻으로 쓰인다.
피렌체 대성당이 건립된 것은 인구가 급증하던 피렌체의 번영과 맞물려 있었다.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 조금씩 무너지고 있던 기존 성당 산타 레파라타 성당 대신 피렌체에는 그 번성에 걸맞은,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새 성당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로 1296년에 공사에 들어가 140년 후인 1436년에야 완공되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은 약 4백만 개의 벽돌이 들어가 무게가 3만 7천 톤에 이른다. 이 예배당 앞에는 화가 조토(Giotto)가 설계한, 높이 85m의 이른바 ‘조토의 종탑’이 서 있다. 호리호리한 몸피의 고풍스러운 이 종탑은 예배당과 그 맞은편의 조반니 세례당과 함께 피렌체 대성당을 이룬다.
피렌체를 상징하는 거대한 돔을 설계한 건축가는 메디치가(家)의 후원을 받은 브루넬레스키였다. 그는 로마의 판테온 신전의 돔에서 영감을 받아 이 성당의 돔을 완성했다. 대성당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세워질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메디치가의 예술인 후원과 르네상스
메디치 가문(The Medicis)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섬유업으로 시작하여 금융업을 통해 유럽 최고의 부호로 성장한 이 가문은 축적한 부를 예술인 후원에 씀으로써 피렌체를 르네상스가 발원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도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메디치가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가와도 이어진 이 가문은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남기면서 저들의 독재정치를 미화해 갔다. 이 가문의 막강한 권세와 힘은 마침내 “메디치 가문은 인류 역사에서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실상의 피렌체 통치자로 군림했던 메디치 정치 세력의 창시자인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은행가였지만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그리스·로마의 고문서를 수집·번역하였으며 플라톤 아카데미와 메디치 도서관을 열었다.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면서 르네상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15세기 최대의 정치가였다. 그 자신이 시인이기도 했던 로렌초는 조부가 개척한 플라톤 철학을 계속 후원하면서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를 지원했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저서 <군주론>을 로렌초에게 헌정한 것은 그 후원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피렌체 대성당 인근의 시뇨리아(signoria) 광장에 서 있는 청동상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1519~1574)다. 그는 코시모의 증손자로 정치적으로 부침을 거듭한 메디치가의 영광을 회복하여 토스카나의 초대 군주로 등극한 인물이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행정 중심지였던 시뇨리아 광장에는 공화국의 청사였던 베키오(Vecchio) 궁전이 있다. 시계탑으로 쓰고 있는 망루가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건물은 분쟁이 많았던 르네상스 시대에 요새 역할을 해야 했던 궁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궁전 출입문 왼쪽에 세워진 조각상은 다비드상이다. 미켈란젤로가 26살 때 조각하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성한 걸작인데 기존 다비드의 모습과는 달리 생각하는 모습의 근육질 청년이다. 다비드상은 당시 독재자를 몰아내고 시민들이 공화국을 되찾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공화국 청사 입구로 옮겼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미켈란젤로 광장이었다. 광장에는 그의 다비드상이 피렌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이 다비드는 베키오 궁전 입구의 것과 마찬가지로 모조품이다. 광장의 다비드는 미켈란젤로 탄생 400돌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일찌감치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가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가에서 공부했다.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 온 로렌초는 자신의 저택에 ‘대리석 정원’을 갖추어 놓고 젊은 조각가들이 맘껏 조각 솜씨를 기르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성장한 것이었다.
‘피에타’로 20대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 대성당으로부터 성당의 부벽에 올려놓을 다비드를 조각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작업에 들어간다. 이는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비드(다윗)를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다.
3년 후 작품이 완성되자, 이 조각에 쏟아진 찬사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결국, 이처럼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에 세워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성당 측은 협의 끝에 이를 피렌체 시청(베키오 궁전) 앞에 세우기로 했다. 뒤에 400년 가까이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던 다비드는 1873년, 공해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긴 뒤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다비드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체 비례가 맞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성당 천장 아래에 이 상을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밑에서도 잘 보이도록 머리 부분을 일부러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거대한 두부 때문에 비례나 균형이 맞지 않아 기괴한 느낌을 주는 우리나라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상(은진미륵)과 비슷한 경우다.
아르노강 남동쪽 언덕에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선 피렌체 도심의 웅장하고 화려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성당의 거대한 주황색 돔과 조토의 종탑, 베키오궁의 망루, 베키오 다리가 어우러진 피렌체의 오후 풍경은 차분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도시 곳곳의 거대 건축물과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자유와 열정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위대한 인본주의를 완성하고자 했던 피렌체 시민들의 덕성이 이루어낸 것이었다. 역사학자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가 이 도시에 바친 최고의 찬사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을 터였다.
“피렌체는 성공의 순간에 절제를, 역경의 순간에는 끈기를, 그리고 모든 행동에는 정의와 분별력을 보여주었다.”
피렌체의 좁다란 보행자 전용도로(페도날레)에서 마주쳤던 각국의 여행자들은 서둘러 다음 여정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이 도시가 토즈(Tods)와 구찌(Gucci),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등 명품브랜드의 고장만이 아니라 단테와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를 낳은 르네상스의 고향이라는 걸 얼마나 기억하게 될까.
이수익 시인이 호명한 ‘플로렌스의 꽃’들은 어디에 있는가. 버스에 올라 ‘꽃의 도시’ 피렌체를 떠나며 나는 내 젊은 날의 플로렌스에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2016. 6.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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