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유럽 ②]혁명의 광장 콩코드와 프랑스의 영욕,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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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경’을 유난히 좋아한다. 구경 중에는 으뜸이 불구경이라느니, 쌈 구경이 그에 못지않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할 만큼 말이다. 거기엔 이해 관계없이 구경거리로만 그걸 즐길 수 있다면 당사자의 심정은 상관없다는 심술이 은근하다.
가벼운 나들이나 여행도 구경이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금강산도 디즈니랜드도 유럽도 구경의 대상이고 ‘나’는 그 구경의 주체이니 이 고유어가 포괄하는 의미는 꽤 너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견학’이니 ‘감상(鑑賞)’이니 ‘체험’이니 하는 한자어는 서양식 근대 교육이 도입되면서 들어온 낱말이다.
‘구경’이 앞의 한자어들과 다른 점은 대상과 ‘나’를 엄격히 구분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는 편일 뿐, 대상과 혼연일체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엔 대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 같은 게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구경의 한자어 표현이 ‘관광’이다. 사전은 관광의 의미를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함”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어와 풍속의 벽을 넘지 못하는 나라 밖 여행은 결국 ‘구경’에 그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파리 몽마르트르의 지린내와 ‘당국’
파리에서의 둘째 날, 첫 일정이 몽마르트르(Montmartre) ‘구경’이었다. 몽마르트르는 서기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성 드니(디오니시우스)가 자신의 두 사제와 함께 참수형을 당했던 ‘순교자의 언덕’이다. 그 언덕, 6세기 초에 건립한 생드니 대수도원 앞에 1876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한 사크레쾨르(성심 聖心)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었다.
비잔틴 양식의 우아한 하얀 돔 세 개로 이루어진 성심 대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어귀는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게 누군가가 저지른 대량 방뇨의 결과라는 걸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피부 색깔과 무관하게 사람들은 모두 코를 싸쥐고 현장을 지나쳤다.
파리의 거리가 결코 깨끗하지 않다는 건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극동에서 온 여행자들은 못내 분개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유적지 앞이 무뢰배들이 내갈긴 오줌으로 가히 내를 이루고 있는데 당국(!)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냐고 말이다. 그러나 뒤에 다루게 되겠지만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당국과 시민의 관계’가 유럽에서는 전혀 다르게 규정된다는 걸 이해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순교자의 언덕이 거룩한 종교적 분위기가 아니라 자유분방한 무명 예술가들의 거리로 알려진 것은 성당 뒤편의 테르트르(Tertre) 광장 덕분이다. 피카소, 고흐, 로트레크 같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의 거리엔 무명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을 늘어놓고 우울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 답사가 ‘구경’인 이유
두 번째 일정은 루브르(Louvre) 박물관이었다. 파리 중심가에 있는 이 국립박물관은 12세기에 이민족으로부터 시테섬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요새였다고 한다. 그 뒤 궁전(루브르궁)으로 쓰이던 이 요새가 미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변신한 것은 18세기 말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 집권 시기 원정 국가에서 약탈한 예술품과 문화재를 채워 넣고 매입도 병행함으로써 루브르는 거대 미술관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가 약탈 문화재의 반환 문제로 세계 여러 나라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루브르의 이러한 전력 탓이다.
루브르에는 40만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한 점당 30초만 감상한다고 해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방대한 규모다. 얼마간 기가 질리긴 했지만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우리는 두 시간쯤 현지 교민 안내자의 인도로 그리스·로마의 조각과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작품을 ‘구경’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것은 사모트라케섬에서 발견되었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 상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뿐이다. 작품에 대한 ‘감상’은 고사하고 인파에 밀리면서 수신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놓치지 않고 가이드를 따라가는 데에 바빴기 때문이다. 이 일정을 ‘박물관 구경’으로 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물관 근처의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우리는 닭볶음탕으로 점심을 먹고 샹젤리제 거리를 거슬러 개선문으로 이동했다. 버스는 주차가 어렵다며 콩코드(concord) 광장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나는 차창 밖으로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를 멀거니 건너다보았다.
오늘날의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1789) 없이 설명할 수 없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을 뒤엎어 버린 이 민중봉기는 정치 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가는 역사적 전환이었다.
대혁명 후 수립된 공화정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무너진 뒤, 프랑스에는 제국과 군주제 등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는 굴곡진 정치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에 대한 열망과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고자 혁명에 참여한 민중들이 추구한 혁명정신은 유럽 민주주의 역사 발전의 자양이 되었다.
콩코드, ‘화합’의 광장에 뿌려진 피
콩코드 광장은 1755년 건축가 가브리엘이 루이 15세를 위해 설계한 공간이었다. 광장에 세워져 있던 루이 15세의 기마상은 대혁명 때 파괴되었고, 대신 기요틴이라 불리는 단두대가 설치되었다. 콩코드는‘조화, 화합’의 의미였지만 혁명의 광장엔 서슬 푸른 단죄가 이어졌다.
1793년부터 3년 동안 콩코드의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람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처를 비롯하여 혁명의 주역이었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등 무려 1343명이나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갈파한 이도 비슷한 시기(1801~1809)에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멀어져가는 콩코드 광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말 12마리가 끄는 식당과 와인 저장고, 호화로운 화장실까지 갖춘 대형 마차로 탈출하려다 붙잡혀 단두대의 이슬이 된 앙투아네트를 생각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여겼던 왕비는 뒤로 손이 묶인 채 퇴비 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고 했던가. 민중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이 왕녀가 무능하고 무지한 지배층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이유다.
콩코드 광장에서 시작되는 샹젤리제(‘넓은 낙원’의 뜻)는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명품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다. 무심하게 지나친 샹젤리제 거리의 서쪽, 샤를 드골 광장에 개선문은 이방인의 눈에도 매우 익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같은 이름의 레마르크의 장편소설 때문에 개선문은 내게 망명자들의 고독한 삶과 비극적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개선문>은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파리로 망명한 독일의 외과 의사 라비크를 통해 개인이 겪는 전쟁의 공포와 불안, 권력의 광기, 복수 따위를 담백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트럭을 타고 파리를 떠나는 작품의 대단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트럭은 와그람 거리를 달려가다 에투알 광장으로 꺾어 들었다. 사방에 불빛이라곤 없었다. 광장엔 어둠만 짙게 깔려 있었다. 너무 어두워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 <개선문>(민음사, 2015) 382쪽
개선문, 프랑스의 영광과 치욕
레마르크의 소설에서는 어둡고 무거운 잿빛으로 묘사되지만 에투알(지도상으로 보면 개선문 광장이 ‘빛나는 별 étoile’ 같다고 부르는 이름) 개선문은 ‘승리의 아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세계 최대의 개선문, 그 자체로 전승 기념비이다. 개선문은 승리와 정복으로 점철된 프랑스 역사의 영광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것이다.
고대 로마의 개선문을 본뜬 에투알 개선문은 독일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물리친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06년 나폴레옹의 명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선문이 완공된 것은 나폴레옹이 죽은 지 15년이나 지나서였다. 세인트헬레나에 묻혀 있던 나폴레옹이 이 문을 지나간 것은 1840년, 앵발리드(Invalides)로 이장되는 유해가 되어서였다.
나폴레옹 이후 <레미제라블>과 <장발장>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장례가 개선문을 거쳐 갔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 퍼레이드가 진행된 곳도 1944년에 드골 장군이 파리 해방을 선언한 곳도 여기다. 한편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할 때는 개선문에 독일 국기가 걸렸고 히틀러가 전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으니 개선문은 프랑스의 영광뿐 아니라 치욕의 역사도 함께한 곳인 셈이다.
개선문 벽에는 나폴레옹의 전승이 부조로, 안쪽 면에는 전쟁에 참여했던 6백여 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샹젤리제 쪽에서 볼 때 오른쪽 기둥의 부조는 19세기 낭만주의 조각가 프랑스와 뤼드의 역동적 작품, 파리를 지키기 위해 행진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새긴 ‘라 마르세예즈’다.
개선문 아래엔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개선문은 1년 365일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다. 개선문 주변 바닥엔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프랑스 군인을 위한 동판도 설치되어 있다. 병인년(1866)의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의 한국전 참전 사실도 우리는 한쪽 귀로 흘리며 지나갔다.
파리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나폴레옹부터다. 그는 황제가 되자(1804)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한 도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또 위인들의 동상을 거리 곳곳에 세우고 다리를 건설하였다.
나폴레옹과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
그의 뒤를 이어 수도 파리를 다시 건설하는 ‘파리 개조 사업’을 벌인 사람은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8~1873)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샤를 루이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제2 제국을 선포(1852)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나폴레옹 3세다.
선진 도시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나폴레옹 3세는 황제가 되자 새로운 파리 건설에 착수했는데 그가 파트너로 선택한 인물이 오스만 남작이었다. 파리 지사로 임명된 오스만은 황제의 기본 개혁 방안에 구체적 계획을 더 해 오늘날 파리의 도시 기반을 만들었다.
오스만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의 파리는 여느 중세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미로 같이 얽힌 좁은 길들로 시민들은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고 루브르궁과 같은 역사적 건물들도 무질서하게 세워진 허름한 건물들에 둘러싸여 그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만은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건설했는데 이는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유럽 신도시들은 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치중했으나 오스만은 파리를 여느 중세의 도시와는 차별화된 근대적 도시로 변모시켰다. 그는 도시 기반 시설부터 도로 체계, 녹지 조성, 미관 관리, 도시 행정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건설과 운영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아울러 냈기 때문이다.
기차역과 주요 광장들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대로가 만들어졌고 도로 주위에는 ‘오스만 양식’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도시 안 곳곳에 크고 작은 녹지가 조성되었고 주택들과 각종 공공시설과 문화 시설이 세워졌다. 또 그는 상·하수도 망을 건설하여 전염병 창궐과 같은 심각한 위생문제로부터 파리 시민을 해방했다.
그 밖에도 오스만은 노트르담 성당과 같은 역사적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보수했고 파리 오페라 극장 같은 건축학적 걸작을 세웠다. 이들 주요 기념물은 대로가 끝나는 부분에 두어 최대한 사람들의 시야에 노출될 수 있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의 새로운 파리는 대성공이었다. 파리를 찾은 외국인들은 변모한 파리를 예찬했고 파리의 도시 계획은 서구 세계로 파급되었다. 19세기 중반에 건설된 도시가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도 훌륭하게 도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은 오스만이 전개한 사업의 성공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파리가 연간 3230만 명의 관광객(2013년)이 찾는 세계 1위 관광도시라는 건 결코 허투루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도시를 관통한 역사 덕분이 아니라 그걸 보존하고 가꾸는 데 들인 노력과 함께 시민이 감수한 불편이 어우러져 지켜낸 도시가 파리인 셈이다. 파리는 역사와 삶이 공존하는 도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훌륭하게 시사하고 있다.
열두 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는 개선문 앞에서는 오스만이 만든 파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버스에 올라 개선문을 떠나면서 나는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 라비크가 주변의 망명자들과 칼바도스(calvados)를 마신 선술집은 어디쯤일까 하고 생각했다.
칼바도스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사과즙을 발효시켜 증류한 브랜디로 파리의 망명자들은 이 술을 즐겨 마셨다. 그들은 잔을 부딪을 때마다 독특한 건배사 ‘살뤼(salut, 문어로 ’건강하길, 번창하길‘의 뜻)’를 외치곤 했다.
유감스럽게도 파리에서 나는 칼바도스를 맛보지 못했다. 대신 여행에서 돌아와 도서관에서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오래 뒤적였다. 죽어가고 있는 조앙에게 건네는 라비크의 마지막 인사를 나는 여러 번 읽었다. 그것은 영화 <개선문>(1948)에서 샤를 부아예(Charles Boyer)가 잉그리드 버그먼(Ingrid Bergman)에게 건네는 명대사이기도 했다.
“당신은 나를 살아 있게 해 주었어. 나는 그냥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해 주었어……. (…) 조앙,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충분치 않아. 강물 속 아주 작은 부분, 물 한 방울, 나뭇잎 하나밖에 되지 않아. 사랑은 훨씬 더 큰 거야…….”
- 앞의 책, 368쪽
2016. 5.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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