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유럽 ①]에펠탑과 센강, ‘구라파’에서의 첫 밤
퇴직을 기념해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가운데 불과 세 나라를 찾았을 뿐인데 뭉뚱그려 유럽이라고 말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럽이 대륙의 이름이고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이라는 경제공동체여서가 아니라 수만 리 저쪽에 존재하는 ‘낯섦’을 우리는 그렇게 줄여서 이해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유럽(europe)을 굳이 ‘구라파(歐羅巴)’라 쓸 필요가 없는 시대다. 요즘 아이들에겐 ‘음차(音借)’ 또는 ‘음역(音譯)’으로 유럽을 그렇게 표기한 시대가 있었다는 얘기도 사족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코 쓰는 ‘서구(西歐)’와 ‘구미(歐美)’의 ‘구(歐)’가 바로 ‘구라파’라고 하면 아이들도 머리를 주억거린다.
어쨌든, 우리에게 유럽은 미국과 함께 ‘선진’과 ‘문명’의 표상으로 인식되어온 지역이다. 미국은 합리와 개인주의로 무장한 힘센 친구 나라(우방 友邦)로 여기지만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는 훨씬 단편적이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예술과 유행의 본고장으로 이해하고, 독일이라면 기술과 철학을, 이탈리아라고 하면 피자와 파스타 등을 떠올리는 형식으로 말이다. 이들 나라도 우방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현대사에 깊숙이 연관된 미국과는 견줄 수 없는, 비교적 먼 나라인 것이다. 이 나라들에 대한 얕은 이해는 결국 그 같은 거리감에서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과 프랑스의 첫 접촉은 조선조 후기 천주교 박해로 시작되었다. 조선에 파견되어 있었던 프랑스 천주교 신부 세 명이 처형된 기해박해(1839) 때부터였다. 뒤이어 흥선대원군이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1866)가 이어졌고, 이는 곧 전쟁으로 비화했다.
병인양요와 한국전쟁의 프랑스군
같은 해 9월,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 처형에 대한 문책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니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다. 제 나라 신부가 처형된 걸 구실 삼았지만, 이 ‘오랑캐의 소요(양요 洋擾)’가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압도적 화력을 보유한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 조선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이후 양이(洋夷)를 물리친 데 고무된 대원군이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고수하는 바람에 침략의 주목적이었던 조불(朝佛)수호통상조약 체결은 20년 후(1886)에야 이루어졌다.
강화도조약(1876)으로 강제 개항된 뒤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에서 다투어 이권을 침탈했다. 프랑스는 경의 철도 부설권(1896), 평북 창성금광 채굴권(1901)을 가져갔다. 병인양요 때 물러나면서 강화도 왕실도서관인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의궤(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기록물)와 은궤 19상자에 비길 수 없는 쏠쏠한 이권이었다. (이 외규장각 의궤는 2011년 반환 대상 296책 전부가 돌아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결의에 따라 프랑스는 육·해군 3400여 명을 한국에 파견하였고 이들 가운데 260여 명이 전사했다. 이들 프랑스 병사들이 흘린 피로 84년 전 강화도에서 숨져간 조선군 병사들은 얼마간 위로를 받았을까.
오후 1시에 인천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7시간의 시차를 포함하여 12시간 후에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 닿았다. 한국인들이 교전국이었던 중국을 무심히 찾는 것처럼 프랑스에 입국하면서 1866년과 1950년의 전쟁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미로와 같은 시골길을 달려 파리 외곽의 조그만 호텔에다 짐을 부리고 거기서 이틀을 묵었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몽마르트르 언덕을 시작으로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센강 유람선 관광 등 밤늦게까지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파리 동역(東驛)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를 떠났으니 우리가 이 도시를 둘러본 시간은 꼬박 하루 밤낮에 지나지 않았다. 머물렀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였던가, 파리의 인상은 내게 좀 어둡게 다가왔다.
물론 이 판단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사사롭다. 파리가 어두웠다기보다는 내 마음이 울적했을 수도 있고, 내가 하루 밤낮 동안 머물렀던 곳은 파리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요컨대, ‘무책임한 여행자’의 인상 비평을 용서해 주시라는 얘기다.
낡고 둔중한 석조 건물이 이어진 거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길거리는 한산했다. 세계 첨단의 유행을 창출하는 도시라는 데도 거기엔 한국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우리가 지나온 거리와 골목들에서 시간은 느릿느릿 가고 있거나 멎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도시의 인상이 거북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방문한 도시인데도 낯설지 않았고, 구식 건물과 건물 사이에 드리워진 고풍스러움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파리가 만만찮은 시간의 단련을 통해 발전한 도시라는 증거일 것이었다.
현대식 빌딩, 이른바 마천루로 이어진 서울특별시를 거쳐 온 여행자는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천년의 역사를 가늠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었다. 거듭되는 외침으로 지워져 버린 500년 도읍 서울의 상상력으로 프랑스 대혁명(1789)과 코뮌(1871)의 도시 파리를 그리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펠탑, 프랑스의 ‘자존심’
에펠탑 전망대의 조망과 센강 유람선 관광은 둘째 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그 일정에 별도의 선택 관광 요금을 지급했지만, 애당초 나는 이 선택에 좀 회의적이었다. 탑 위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본다거나 야간에 유람선을 탄다는 게 어쩐지 진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게 결코 시답잖은 구경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에펠탑은 프랑스가 혁명 100돌인 1889년에 개최한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프랑스의 건재’와 ‘자존심 회복’을 위해 만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파리코뮌 이후 후유증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프랑스는 경쟁자였던 영국이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1851)를 성공적으로 치르자 영국을 능가하는 박람회를 기획하고 세계 최대의 건축물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응모한 수백 개의 설계 가운데 선정된 작품이 교량 설계 전문가였던 구스타프 에펠(Gustave Eiffel)의 설계안이었다. 에펠이 자기 특기를 살려 선보인 ‘철골 다리를 위로 세운 것 같은 형상’의 철골 구조물이 바로 지금의 에펠탑이다. 오늘날엔 파리의 랜드마크가 되었지만, 당시 시민들은 에펠탑 건설계획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미 나폴레옹 3세 때부터 파리의 모든 건물은 높이가 20m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되고 있었다. 도시 미관을 위해 같은 블록의 건물들은 발코니나 창문의 줄을 맞추어야 했고 모든 건물에 화강암을 덧씌우던 당시에 흉측하게 내부가 드러나는 철골 구조물에 대한 시민들의 이 같은 반응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에펠은 기중기를 이용해 15만 개의 철 부품과 250만 개의 나사를 조립하여 27개월 만에 탑을 완공했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거라며 조롱받던 에펠탑은 그러나 박람회 관람객 200만 명이 탑을 찾으면서 엄청난 흥행을 이루었다. 사재를 털어 공사비를 댔던 에펠은 탑의 독점 운영권을 보장받으며 몇 년 만에 거부로 등극했다.
1889년 9월 에펠탑을 방문한 토머스 에디슨이 방명록을 통해 ‘현대 공학의 거대한 기념비적 표본을 만든 용감한 기술자인 에펠’에게 존경의 뜻을 전했지만, 에펠탑에 대한 혐오는 한동안 이어졌다.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 골목길로 다녔다는 소설가 모파상은 탑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는 그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1892년 미국에서 출판된 한 문서(윌리엄 왓슨, <파리 만국박람회: 토목공학, 공공 토목 공사와 건축>)는 에펠탑이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으며 탑을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이 문서에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적잖게 서명했는데 그중에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도 끼어 있었다.
애초 완공 후 20년 동안만 세워놓기로 했던 에펠탑은 1909년에 해체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번에는 시민들이 해체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81층 건물과 맞먹는 324m 높이의 에펠탑은 건설 후 약 40년간 인공 건조물로서는 세계 ‘최고(最高)’의 지위를 누렸다.
한 삼십여 분 동안 줄을 서 기다린 끝에 우리는 승강기를 타고 단숨에 2층 전망대에 올랐다. 지상 115m 상공에서는 파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상공에서 바라보는 파리는 지상에서 바라보는 도시와 비길 수 없다. 그제야 나는 에펠탑의 조망이 쓸 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망대의 남동쪽에 초록빛 마르스(Mars) 광장과 그 너머 파리 시내에선 보기 어려운 고층빌딩, 몽파르나스(Montparnasse) 타워가 아득하게 보였다. 몽파르나스 타워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59층 전망대가 있는, 에펠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대부분 나지막하고 오래된 빌딩으로 이어진 파리의 스카이라인에 에펠탑과 몽파르나스 타워는 의좋게 서로를 마주 보고 우뚝 솟아 있었다. 에펠탑이 19세기의 근대 건축물의 으뜸이라면 몽파르나스 타워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건축물인 셈이었다.
센강 유람선과 여행자의 감상주의
북서쪽으로는 샤요(Chaillot)궁이 트로카데로(Trocadero) 광장을 날개로 감싸듯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 센(Seine) 강이 흐르고 있었다. 폭이 비교적 좁은 강 한복판에 유람선이 떠 있었다. 탑을 내려가면 우리는 그 유람선을 타게 될 것이었다.
사진을 찍느라 안전망 사이로 손을 내밀고 있었더니 늙수그레한 안전요원이 와서 어깨를 툭 건드렸다. 추락의 공포는 막혀버린 비상(飛翔)에 대한 욕망의 반작용일지 모른다. 60m 높이의 에펠탑의 첫 난간에서 뛰어내린 오스트리아의 재단사 프란츠 라이헬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이 직접 재단한 낙하산의 실험뿐이었을까. 낙하산은 펴지지 않았고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일정은 센강의 바토무슈 유람선 관광이었다. 프랑스 중북부를 흐르는 길이 776km의 센강에는 모두 서른일곱 개의 다리가 있다. 그중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알려진 퐁네프다리와 아폴리네르의 시에 등장하는 미라보다리가 유명하다.
4월 중순이었는데도 밤바람은 차가웠다. 센강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위에서 사람들은 다투어 스마트폰의 셔터를 눌렀고, 서머타임으로 밤 8시가 넘었는데도 도시는 아직 밝았다. 어둠 살이 내리는 강변에 이어진 오르세 미술관과 부르봉 궁, 노트르담 성당을 스쳐 지나갔지만 우리는 미라보다리를 만나지 못했다.
‘미라보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아폴리네르가 노래하는 젊은 시절의 사랑, 그 아픔과 추억은 동아시아에서 온 여행자들에게도 동질적이다. 흘러가는 게 어찌 강물뿐이랴. 사랑도 흘러가고 젊음의 한때에 아롱졌던 상실의 아픔과 좌절도 떠나가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센티하게, 낯선 나라의 고도(古都) 파리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2016. 5.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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