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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구슬을 큰 못에 담아 둔 것 같은” 호수 ‘영랑호’와 범바위

by 낮달2018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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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여름 여행] ② 속초의 석호 영랑호(속초시 장사동·금호동·영랑동, 202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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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랑호는 바다와 민물이 만든 자연 호수, 바다가 가로막혀 생긴 호수로 동해와 이어진다. 신라의 화랑 사선랑이 놀다 간 곳이다.

칠성조선소에 이어 우리는 영랑호(永郎湖)를 찾았다. 7년 전에는 설악산 권금성에 올랐다가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에 들른 곳이다. 영랑호는 신라의 화랑들이 수련했다는 동해안 대표적인 석호(潟湖)다. 석호는 바다와 민물이 만든 자연 호수, 즉 바다가 가로막혀 생긴 호수로 물길로 동해와 이어진다. [관련 글 : 케이블카와 권금성, 다시 만난 설악]

 

신라시대의 화랑인 영랑(永郎)·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祥) 등은 사선랑(四仙郞), 또는 ‘선인(仙人)’으로 불린다. 이들에 대해서는 <해동고승전>(1215)에서 “신라 역대의 화랑도 가운데 사선이 가장 현명하였다”라고 하였고, <파한집>(1220)에선 “3천여 명의 화랑 중에서 사선 문도(門徒)가 가장 번성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들은 자주 강원도지역으로 놀러 다녀 많은 유적을 남겼다. 고성 해변에 3일을 놀고 간 삼일포(三日浦)가 있고, 통천에는 사선봉(四仙峰)과 총석정(叢石亭), 간성(杆城)에는 선유담(仙遊潭)과 영랑호, 금강산에는 영랑봉(永郎峰), 장연(長淵)에는 아랑포(阿郎浦), 강릉에는 한송정(寒松亭)이 있다.

 

그들은 금강산에서 수련하고, 무술대회에 나가려고 고성군의 삼일포(三日浦)에서 사흘 쉬다가 수도 금성(서라벌)으로 가는 길에 영랑호를 들렀다. 영랑은 호반의 경치에 빠져서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조차 잊었고, 이에 따라 호수 이름을 영랑호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의 안축(1287~1348)과 조선의 정철(1536~1593)이 각각 <관동별곡(關東別曲)>이라는 이름의 ‘경기체가’와 ‘가사’로 각각 노래한 그 호수다.

▲ 영랑호 전경(2018). 둘레길에 심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 오마이뉴스 김태진

영랑호는 속초시 장사동·금호동·동명동·영랑동에 걸쳐 있는 석호로 청초호(靑草湖)와 마찬가지로 동해에 이어지는데 둘레의 길이 8km, 면적 1.2㎢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영랑호는 구슬을 큰 못에 담아 둔 것 같으며, 양양 청초호는 경대의 거울을 열어 놓은 것 같다”라고 써 영랑호의 아름다움을 기렸다.

 

아이들은 칠성조선소 카페 외에는 따로 여정을 잡지 않아서 영랑호에 들르자는 제안은 내가 했다. 움직이기엔 날씨가 너무 뜨거웠지만, 그렇다고 오후 3시에 바로 숙소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7년 전에 들렀던 호변의 범바위를 떠올렸던 것 같다. 차를 영랑호리조트 근처에 대고 호수 쪽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정수리에 불이 붙는 듯했다.

 

범바위는 영랑호 중간지점 서남쪽에 있는 큰 바위로 속초팔경 가운데 제2경이다. 마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인데, 그런 바위의 모습을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이야 주변이 개발되면서 ‘난데’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범이 출몰할 만큼 숲이 울창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고 한다.

▲ 범바위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오른쪽 영랑정으로 가는 나무 데크길. 바위 뒤편이 범바위로 이어진다.
▲ 범바위 옆에 세워진 영랑정. 정자와 견주어 보면 바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 범바위의 바위들. 아래의 거대한 너럭바위 위에 마치 공기돌 같은 큰 바위가 얹혀 있다. 바위 중간에 줄 무늬가 있다.
▲ 영랑호 범바위. 그런데 사실은 물개와 비슷해 보인다. 이 점은 영랑호 안내판에서도 확인된다.
▲ 산 아래서 바라본 범바위. 물개의 모습이 더 분명해 보인다. ⓒ 두산백과
▲ 거대한 너럭바위 너머를 속초 시내의 아파트들이 보인다.
▲ 범바위에서 내려다본 호수와 호수 건너 속초 시가지의 모습.
▲ 영랑호의 영랑정. 영랑호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진 정자다. 사선이 놀던 옛 정자터에 2005년에 새로 세웠다.

아내는 더위에 지쳐 호반길 근처 숲의 벤치에서 쉬겠다고 해서 아이들과 함께 범바위로 올랐다. 습지 생태공원으로 가는 도로 오른쪽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낸 자연석 계단으로 범바위에 올랐다. 계단 끝 갈림길의 거대한 바위 뒤쪽으로 가면 범바위고, 오른쪽 데크길을 따라가면 정자 영랑정(永郎亭)이다.

 

바위에서 범의 형상을 찾지는 못했지만, 범바위는 바위산이라고 해도 좋을 너럭바위 암반 위에 거대한 바윗돌이 마치 공깃돌처럼 얹혀 있었다. 바위는 마치 깨진 걸 때워놓은 듯한 자국이 가로로 나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흔적인지는 인터넷을 뒤져도 알 수가 없었다. 

 

바위와 숲 사이로 호수가 파랗게 펼쳐졌고, 그 시야의 끝에 도시의 아파트로 보이는 빌딩들과 시가지 일부가 보였다. 달아오른 바위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불볕을 견딜 수 없어 아이들은 서둘러 내려가고, 나는 영랑정을 잠깐 들렀다.

 

범바위 위의 정자 영랑정은 당연히 영랑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장소에 세워졌을 것이다. 유난히 아름다운 경치를 즐겨온 사람들이라, 선인들은 혼자 보기 아까운 승경(勝景)은 묶어서 ‘4경’이니 ‘8경’이나 하고 기리곤 했다. 이곳 관동(關東: 대관령의 동쪽, 즉 강원도)8경을 노래한 가사가 송강의 ‘관동별곡’인 것이다.

▲ 둘레길에서 바라본 범바위.
▲ 영랑호 둘레의 산책길에서 바라본 호수. 가운데 호수를 가르지르는 데크길이 보인다.
▲ 영랑호 가장자리 둘레길에는 벚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이어진다. 벚나무 가지가 수면을 향해 드리워졌다.
▲ 영랑호 둘레길. 가로수로 심긴 나무는 벚나무다. 4월이면 이 둘레길은 화사한 벚꽃 행렬이 이어질 것이다.

8경은 관서(關西:철령관의 서쪽, 평안도), 논산, 단양, 양산, 진주, 통영, 평양 등이 유명하고 더 큰 단위로는 ‘조선8경’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선인들은 이들 아름다운 경치를 ‘흉내 낸 조경’을 집안에 끌어들이는 대신 그 아름다운 풍경을 거스르지 않고 주변 풍광과 어우러진 정자를 세웠다.  명승지마다 자연과의 공존을 선택한 정자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조선 전기의 지리서 <신동국여지승람>(1530) ‘간성군 조’ 기록에 “영랑호는 고을 남쪽 55리에 있다. 주위가 30여 리인데,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암석이 기괴하다.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절반쯤 호수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옛 정자 터가 있으니 이것이 영랑 신선 무리가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정자의 연원은 예사롭지 않다.

 

6·25전쟁 뒤에 당시 속초지역 수복에 이바지한 제11사단장 김병휘 장군을 기리고자 범바위에 건립한 금장대가 있었지만, 퇴락해 기단부만 남아 있었다. 이 터에 영랑호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자  2005년에 속초시에서 전통 양식의 정자를 복원하고 시민 공모로 ‘영랑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범바위에서 내려와 아이들과 함께 호숫가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로 들어가다가 볕이 너무 따가워 돌아섰다. 둘레길 양옆의 가로수로 심은 벚나무가 호숫가에 무성한 잎으로 무거워진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깝기만 하면, 거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날에 다시 찾아도 좋을 것이지만, 어디든 다시 오마고 기약하기는 어렵다.

 

멀리 호수를 가로지르는 데크 길을 바라보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나는 돌아섰다. 모두 더위에 지쳐 일단 숙소에 가서 짐부터 풀자고 했다. 호텔에서 좀 쉬다가 속초관광수산시장에 들르기로 하고 우리는 오후 3시의 불볕으로 달구어진 영랑호를 떠났다.

 

 

2023. 8.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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