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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호남’ 넘어 ‘국부(國富)’ 해남윤씨 종택과 고산의 훈향(薰香)

by 낮달2018 2023.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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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⑦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 일원(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202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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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택 녹우당.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 형이고 행랑채가 갖추어진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으로 사적으로 지정됐다.

1989년 이어 34년 만의 녹우당 방문
 
해남윤씨 종택 녹우당에 처음 들른 것은 1989년 해직 한 달쯤 뒤인 9월, 같은 학교에서 쫓겨난 같은 국어과 교사 장과 함께 부부 동반으로 남도를 여행했을 때다. 34년 전이니까 꽤 오래된 이야긴데, 목적지는 보길도였다. 승용차가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버스를 갈아타면서 대구에서 광주를 거쳐 해남에 갔고, 보길도에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녹우당을 찾은 게 보길도에 가기 전인지 후인지는 기억에 없다. 녹우당에 들른 기억으로 유일한 것은 담장 밖에 서 있던 은행나무 고목 한 그루뿐이다. 그때, 녹우당 안 살림집은 보수 중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인지 차 시간이 급해서인지 서둘러 그곳을 떠났던 듯하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그 잃어버린 시절의 기억을 찾아 다시 보길도를 찾은 게 18년 뒤인 2007년이다. 보길도가 아니라 해남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녹우당은 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번 여행에서 녹우당을 여정에 넣은 것도 그래서였다. [관련 글 : 보길도, 잃어버린 젊음과의 조우(遭遇)]

▲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은 고산 윤선도 유적지는 국가 명승으로 지정돼 있다.
▲ 해남윤씨 종택인 녹우당. 오른쪽 은행나무는 입향조인 윤효정이 세 아들의 과거 급제를 기념해 심은 500년 묵은 보호수다.

녹우당은 대흥사를 둘러보고 나와 미황사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연지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고산 윤선도 박물관을 거쳐 곧장 녹우당을 향했다. 녹우당 앞에 고산 시비가 마치 그리스 신전 같은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시비에 새긴 시는 ‘어부사시사’다. 춘하추동 각 10수씩 모두 40수인 ‘어부사시사’ 가운데 춘사(春詞)는 4, 하사는 7, 추사는 2, 동사는 8번째 수를 각각 새겼다.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에 정착하면서 자리 잡은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은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택이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1476∼1543)이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고택 앞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 21m,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고목은 어초은이 아들의 과거 급제를 기념해 심은 나무다.
 
그의 아들 3형제 윤구·윤행·윤복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는 사족으로서도 쉽지 않은 대단한 경사였다. 그로부터 해남윤씨가 일약 명문 사대부가로 성장하게 되었으니, 이 은행나무는 녹우당의 상징이며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한다.
 
해남윤씨는 전라남도 강진에 거주하던 윤효정이 해남정씨 집안의 사위가 되어 해남으로 이주하면서 지역에 정착하였으니 그가 해남 입향조다. 그 뒤 아들인 윤구(1495~?), 손자인 윤의중(1524~1590)을 비롯하여 현손(玄孫) 윤선도(尹善道 1587~1671), 그리고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1668~1715)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16세기 무렵 해남을 기반으로 한 명문 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윤효정은 해남정씨와 혼인하여 부를 축적하였으며, 아들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관직에 진출했다. 큰아들 윤구는 홍문관 부교리를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기묘명현(名賢), 해남육현(海南六賢)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둘째 아들인 윤행도 동래부사와 나주목사, 광주목사 등 여덟 주의 목사를 지냈고 후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막내 윤복도 후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니 이들 3형제의 출사가 결국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손자인 윤의중도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증손인 윤광계(1559~?)도 공조좌랑을 지냈다.
 
윤효정의 현손 고산 윤선도, 국문학사에 빛나는 한글 시가 남겨
 
윤효정의 현손(손자의 손자)으로 시가 문학의 최고봉으로 기려지는 고산(孤山) 윤선도는 해남윤씨 가운데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다. 그는 효종의 대군 시절 스승으로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의 확립과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 생활을 해야 했다.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하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보길도에 별서(別墅)를 짓고 생활하며 ‘어부사시사’ 등 국문학사에 빛나는 한글 시가 작품들을 남겼다.

▲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고산 윤선도 박물관. 여기에 윤두서 초상화(국보), 산중신곡집(보물) 등이 소장돼 있다.
▲ 녹우당 고택 앞에 세워진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어부사시사' 춘하추동 네 수가 새겨져 있다.
▲ 고산 윤선도 유적지 종합 안내도. 종합 안내도를 재구성했다.

그는 특히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삼은 시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드러낸 이로 평가받으며, 송강 정철(1536~1593), 노계 박인로(1561~1642)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고산은 송강, 노계와는 달리 가사는 없고, 단가(시조) 75수만 남겼다.
 
‘국부(國富)’ 해남윤씨 종손 고산이 갖춘 부자의 윤리
 
고려 말기 해남과 강진 지역에 터전을 잡은 윤씨 가문은 16세기에 이르러 호남 제일의 부자라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윤의중의 자녀들이 부모의 재산을 나눈 기록에 따르면 종가의 재산은 노비 384구(명), 전답은 약 40만 평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태어난 고산은 8살 때 후사가 없는 백부 윤유기(1554~1619)에게 입양됨으로써 해남윤씨의 대종을 잇게 되었다. (실제로 윤유기도 종가에 입양되어 족보상으로는 백부지만 실제로는 윤유심의 동생이다.)
 
윤홍중의 손자가 된 윤선도는 이를 더욱 불렸다. 그는 조상이 해온 간척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여 진도 굴포에서 약 60만 평, 완도 노화도에서 약 39만 평의 개펄을 개척했다. 바다에 긴 둑을 쌓고 물을 빼내려면 엄청난 노동력과 기술력이 필요한데, 국가도 아닌, 일개 가문에서 이를 시행한 것은 ‘국부(國富 : 나라의 부자)’라고 불릴 만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윤선도는 엄청난 부를 소유했지만, 그 부를 유지하기 위해선 ‘선(善)’을 쌓고, ‘인(仁)’을 행하는 것을 급선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고조부 윤효정과 증조부 윤구는 근검절약하고 노비를 어질게 대해줌으로써 집안을 일으켰다. 특히 윤효정은 큰 가뭄이 들자 고을 백성의 세금을 대신 내주어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 : 감옥 문을 세 번이나 열어주는 선한 일을 한 집안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조부인 윤의중과 양조부인 윤홍중은 인색하고 치부에 집착한 인물이어서 자식이 없고 가세가 쇠락했다. 고산은 그 이유를 선과 인을 실천하지 못한 탓이라고 보았고 후손들에게 8가지 경계를 남겼는데, 그것은 부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부자의 윤리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의복과 안마(鞍馬) 등 갖가지 몸을 봉양하는 것들은 모두 습관을 고치고 폐단을 줄여야 마땅하다. 음식은 배고픔을 면할 만큼만 취하고, 의복은 몸을 가릴 만큼만 취하고 말은 보행을 대체할 용도로만 취하고 안장은 견고한 것을 취하고 기물(器物)은 쓰기에 알맞은 것을 취해야 한다.”[관련 기사 참조]
 
고산은 노비의 신공(身貢, 외거노비가 노동력 대신 주인에게 바치는 세금)을 일정하게 하되 “가난한 사람은 감경해주고 넉넉한 사람에게서도 더는 받지 말라”고 했으며, “종들을 곁꾼으로 부릴 경우, 모두 시세에 맞게 품삯을 지급하라”는 가르침도 남겼다.

▲ 녹우당 앞에서 비자나무숲으로 가는 골목길. 길가에 고산 사당과 어초은 사당이 있다.
▲ 고산 사당(왼쪽)과 녹우당 안 불천위 사당(오른쪽) 사이에 서 있는 곰솔도 300년을 묵은 나무였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녹우당 뒷산 비자나무숲으로 가는 길. 편백 숲을 지나야 한다.
▲ 녹우당 뒷담 너머. 유난히 잘 자란 고목이 많고 훤칠한 숲이 해남 지역의 특징처럼 보였다.
▲ 고산 윤선도의 사당. 고산은 해남윤씨가 배출한 인물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크다.

고산 윤선도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불리면서 보길도 부용동에 원림을 조성하고 화려한 풍류와 은거 생활을 즐긴 이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근검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부자로서의 윤리를 지키는 것만이 부를 유지할 수 있음을 후손들에게 경계한 이였음도 기억해 둘 만하다.
 
녹우당 당호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
 
해남윤씨 종택의 당호(堂號) ‘녹우당’은 이서(李漵, 1662~1723)가 지은 이름이다. 이서는 조선 후기 실학의 거두인 성호 이익(1681~1763)의 형으로 공재 윤두서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녹우(綠雨)’는 ‘푸른 비’라는 뜻으로 고택 앞 은행나무에서 지는 은행잎을 비로 비유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또 고택의 뒤뜰 대나무 숲이나 뒷산 비자나무 숲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했다.
 
녹우는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풀과 나무가 푸를 때 내리는 비’를 이르는데 ‘푸름’은 사대부의 지조나 절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윤선도가 ‘오우가(五友歌)’에서 소나무나 대나무의 덕성을 지조와 절개로 비유했듯이 녹우당은 이 집안이 지향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녹우당에 들어가기 전에 골목을 따라 이어진 고산 사당과 어초은 사당,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뒷산의 500년 된 비자나무숲 어귀를 돌아보았다. 고택 안팎으로 하늘을 찌르는 고목이 여러 그루였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 말고도 고산 사당 옆에 선 24m 곰솔도 300년 묵은 거였다.

▲ 우리가 보지 못하고 온 녹우당의 사랑채의 2015년 사진. 지금 해체보수 중이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 녹우당의 안채. 2015년 사진이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고산 사당에서 내려와 우리는 골목 쪽에 난 옆문으로 녹우당에 들어갔다. 행랑채 뒤쪽 행랑 마당에 선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도 250년을 묵은 나무였다. 그러나 사랑채가 보이지 않아 살펴보니 여기서도 보수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얼기설기 짜 놓은 철판과 비계 너머에 사랑채가 있을 것이로되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무위사에 이어 두 번째 낭패였다. 34년 전에도 공사 때문에 발길을 돌렸는데…….
 
사랑채는 돌아와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의 사진을 내려받아 살펴보는 데 그쳤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돌아 뒷마당 쪽으로 안채로 들어가 뻐끔 훑어보고 나왔다. 추사가 하룻밤 묵은 뒤 써 주었다는 ‘일로향실(一爐香室)’ 현판은, 그래서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

▲ 녹우당 뒷마당에서 바라본 안채.
▲ 녹우당 안채에 걸린 '일로향실' 편액. 추사 김정희가 하룻밤을 묵고 써 준 현판이라고 한다.
▲ 녹우당 고택 안의 불천위 사당. 3칸 짜리 맞배집으로 툇마루가 달렸다.
▲ 고산 윤선도 유적지 입구의 연지.

힘들겨 찾아왔는데, 보수 공사와 맞닥뜨리게 되자 맥이 빠졌다. 고택을 나와 건물만 한 바퀴 돌아보고 말았던 박물관을 다시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국보인 윤두서 자화상과 보물 <산중신곡집>을 비롯한 지정문화재와 유물 등을 박물관 누리집에서 만나면 될 것이라고 우정 자신을 달랬다.
 
무릇 모든 여행은 아쉬움과 미련으로 마무리된다. 돌아와서야, 찍은 사진도 마음에 차지 않고, 빼먹은 데도 부지기수라는 걸 깨닫는다. 패키지 관광 다니듯이 빡빡한 일정을 무리하게 짠 답사의 뒤끝인 셈이다. 그러나 다시 떠나도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고, 아쉬움과 미련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짧은 여행, 남도 기행은 이쯤에서 갈무리하고자 한다. 비록 주마간산 격이긴 했지만, 남도의 절집과 원림을, 고산의 향훈을 잠깐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도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고 짐짓 자위하면서. 
 
 

2023. 7.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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