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경주 정혜사지(淨惠寺址) 십삼층석탑(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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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0일 오후, 옥산서원을 들른 길에 정혜사지(淨惠寺址) 십삼층석탑을 찾았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옥산서원을 지나 독락당(獨樂堂)의 북쪽 700m쯤 되는 곳에 홀로 서 있다. 일대의 경작지에는 기왓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이는 이곳이 과거 정혜사의 중심 영역이었음을 시사한다.
정혜사지에는 현재 13층 석탑 하나만 남아 옛 절집의 범위와 규모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옥산 동쪽 기슭에 자계천(옥산천)을 따라 지형이 남북으로 기다란 것으로 볼 때 절집은 남향으로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비록 관련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은 각 부의 양식과 조성수법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유례로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된 바 있다.
정혜사 관련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전기 문인인 김인후(1510~1560) <하서집(河西集)>이다. 여기 실린 ‘정혜사승행정구시(定惠寺僧行靖求詩)’에서 정혜사는 신라시대의 사찰이라고 한 것이다. 조선 후기 자료인 <동경잡기(東京雜記)>(1699) ‘불우(佛宇:절) 조’에서는 신라 때의 절이기는 하나 창건 연대를 알 수 없고, 회재 이언적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또, 불전에 남아있던 탁자의 다리에 ‘치화원년정월조(致和元年正月造)’라는 글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치화 원년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으로 이 절의 창건 연대와는 거리가 멀다.
1933년에 ‘경주 최부자’ 최준이 <동경잡기>를 수정, 보완하여 간행한 경주의 지지(地誌)인 <동경통지(東京通志)>에서는 신라 제37대 선덕왕 원년(780)에 당나라에서 망명·귀화하여 자옥산 아래에 살게 된 백유경(수원백씨의 시조)이라는 인물을 정혜사 창건과 잇고 있다. 그는 경치가 뛰어난 곳을 골라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세웠는데 왕이 친히 행차하여 영월당을 경춘(景春)으로 고치고 만세암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1977년 12월, 석탑을 해체할 때 1층 옥개석 상면에서 발견된 목판(715mm×100㎜)의 이면에 기록된 묵서명(墨書銘)에 따르면 정혜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후기인 건륭 30년 을유 3월에 해체 및 복원되었다. 건륭은 청나라의 연호니, 영조 41년(1765)에 이르러 처음으로 해체된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11~13층이 무너졌으며 1922년에 복원되었다. 당시 기단은 시멘트로 굳혀 놓았으나 그 뒤 파손되어서 큼직한 잡석으로 기단을 새로 만들었다. 전체 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석탑은 현재 옛 절터의 원위치를 지키고 있다.
40여 년 전, 옥산서원에 들렀을 때, 이 탑을 보았는지 어땠는지도 기억에 없는데, 탑은 계곡을 따라 오르던 길의 왼쪽에 푸른 칠을 한 철제 울타리 속에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13층 석탑이지만, 높이는 엔간한 삼층석탑과 비슷한 5.9m에 지나지 않아, 아담하다는 표현이 알맞다. 울타리 안팎으로 십여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심겨 있어서 무성한 잎이 지우는 그늘이 짙었다.
층수와 외형이 매우 이례적인 ‘이형(異形)석탑’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신라 석탑 가운데 불국사 다보탑과 같이 층수와 외형이 매우 이례적인 ‘이형(異形)석탑’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과 비슷한 기단은 안동조탑리 오층전탑(보물),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의성탑리오층석탑(국보), 분황사모전석탑(국보) 등 전탑 계열 석탑에서 보인다. 1층 몸돌의 4면에 작은 불상 등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으며, 우주(隅柱:모서리 기둥)과 문주(門柱:문기둥) 그리고 문이 있어 목조탑을 모방한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거대한 1층 몸돌에 견주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 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 장식처럼 보인다. 1층 탑의 몸돌은 높이 131㎝, 폭 166㎝, 지붕돌 한 면 길이 284㎝에 이르지만, 그 위에 놓인 2층 몸돌은 1층 지붕돌의 6분의 1 크기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아지는 것이다.
2층 이상은 마치 덧붙인 구조 같은 느낌을 주는 진기한 형식이긴 하지만, 그 모양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일반적으로 2층 이상 탑신(몸돌)과 옥개석(지붕돌)을 층수에 포함하는데, 2층 이상 부재를 상륜(上輪)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탑신을 잘 살펴보면 각층은 옥개석과 탑신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고, 13층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이 별도로 표현되어 있어서 13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층을 크게 만들어 두드러지게 한 뒤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가 일반적인 체감의 비례를 무시하고 있으나, 탑 전체로 보면 안정감이 있다.
옛 절터의 원위치에 원형을 잘 간직한 채 보존된 이 석탑은 13층이라는 이례적인 층수와 더불어 기단부와 초층 탑신의 양식, 탑신과 옥개석이 한 개의 돌로 조성되는 등 통일신라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쯤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탑 주변의 은행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느긋하게 탑을 바라보고 갔으면 좋으련만, 사진을 찍는다고 탑 주위를 두어 바퀴 도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젊은 남녀 한 쌍이 탑 입구 쪽에 차를 세우는 걸 보고 우리는 서둘러 탑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2023. 8.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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