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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그 조선소엔 속초와 ‘실향민’들의 현대사가 있다

by 낮달2018 2023.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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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여름 여행] ① 칠성조선소,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교동(202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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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성조선소 카페 건물. 60년간 2대에 걸쳐 운영된 칠성조선소는 결국 문을 닫고 작업장을 카페로 바꾸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 칠성조선소는 속초 중심부의 석호인 청초호 호숫가에 자리한 목선을 주로 건조하던 조선소였다.

1박 2일, 여름 가족여행으로 속초를 다녀왔다. 옛날식으론 ‘피서(避暑)’인데, 요즘은 여름휴가가 일반화되면서 여름이면 휴가 다녀왔느냐가 안부 인사가 될 만큼 우리네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대체로 우리 지역에선 여름에 경북 동해안이나 남해 쪽으로 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떠나게 된 것은 단지 거기에 딸애의 맘에 드는 ‘숙소’가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6년 이어 다시 찾은 속초
 
아이들에게 묻어가는 여행이라서가 아니라도, 우리 내외에게 이의가 있을 턱이 없었다. 속초엔 설악산과 바다가 있고, 가는 길에 강릉을 들를 수 있는 여정이라면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감히 청하지 못할지언정 그것을 마음속으로 바란다)이지 않은가.
 
속초와 강릉은 7년 전인 2016년, 아내와 함께 2박3일 ‘회갑 기념 여행’을 다녀온 곳이다. 그때도 우리는 드물게 북으로 가는 여정을 택했고, 아내는 매우 만족스러워했었다. 속초에선 케이블카로나마 설악산 권금성에 올랐고, 영랑호도 찾았었다. [관련 글 : 2박3일 강원도 여행-케이블카와 권금성, 다시 만난 설악]
 
하룻밤을 묵고 오는 짧은 여행이지만, 처음 가보는 곳에선 새 견문을, 지난 여행과 겹치는 곳에선 미진했던 부분을 새로 채울 수 있어서 괜찮은 시간이었다. 장마 끝 불볕더위가 힘들었지만, 피서란 게 그렇게 ‘집 나가 사서 하는 고생’이 아니었던가.

▲ 칠성조선소에 들어가면 처음 만나게 되는 전시공간. 벽면에 칠성조선소의 65년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 칠성조선소의 뮤지엄. 1964년에 지어 식당, 사무실, 작업공간, 창고 등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7시 반쯤 집을 나서 4시간쯤 달려 속초에 닿자마자 애들이 미리 찾아둔 맛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얼마간 이른 시간이었지만, 번호표를 뽑아 한 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 먹은 물회는 본고장인 포항에 비겨도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달지 않고 회 본연의 맛을 지니고 있어서 좋았다.
 
65년간 운영한 조선소가 카페로 변신했다
 
그리고 찾은 데가 칠성조선소 카페였다. 카페에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바닷가의  오래된 조선소 건물에 문을 연 카페였다. 언젠가 얼핏 읽은 신문 기사 속의 그 조선소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잠긴 정문 왼쪽의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칠성조선소(1952~2017)의 역사를 담은 전시 공간이었다.
 
바다라고 여겼던 곳은 속초의 영랑호와 마찬가지로 석호(潟湖)인 청초호였다. 칠성조선소는 함남 원산 출신의 월남 피난민 창업주가 청초호의 뻘밭을 메우고 세운 원산조선소를 모태로 19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속초는 해방 후 북쪽 땅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수복된 후 실향민들이 모여들어 인구가 급증한 어항으로 1950년대엔 전국에서 부산 다음으로 어획량이 많은 항구였다고 했다.

▲ 박물관에 전시 중인 목선. 2018년에 속초의 배 목수가 손수 재현한 목선이다. 칠성조선소는 목선을 주로 건조하던 곳이었다.
▲ 플레이 스케이프. 예전에 제재소가 있었던 공간인데, 파도, 산, 나무, 그리고 배를 주제로 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근해에선 명태 오징어 청어가 대풍이어서, 고기잡이배 주문이 이어졌다. 1954년 500여 척이었던 속초의 어선은 1963년에는 700척으로 늘었고, 당시 속초 인구 5만 명 가운데 1만 5천 명이 어부였을 정도의 호황이었다. 1964년 한일협정으로 어업 구역이 12해리(약 22㎞)로 축소되고 일본의 대형어선이 몰려오면서 주변 해역의 어자원이 고갈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8년 어로한계선이 기존보다 5마일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명태 어장은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에 주로 형성되었고, 휴전선 근처의 명태도 잡기 어려워졌다.  1970년대 초 속초 등 동해안에 극심한 흉어기가 들이닥친 것이다. 명태가 더는 잡히지 않게 되고, 어선도 목선에서 강화플라스틱 재질의 배로 바뀌면서 칠성조선소의 어선 건조도 급격히 줄었다.
 
결국 칠성조선소는, 500톤의 선박이 자유로이 드나들고, 풍랑이 일면 어선이 대피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온 청초호를 지킨 ‘마지막 조선소’가 되어 2017년에 문을 닫았다. 대신 조각을 공부한 손자는 조선소 사택을 카페로, 조선소 자리는 문화공간으로 개조했는데, 이 변신으로 칠성조선소는 속초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 한때 창업주의 손자가 배를 만들었던 오픈 팩토리는 카페로 변신하여 손님을 맞고 있다.
▲ 입구에서 바라본 카페 전경. 카페는 1층에서 원두를 볶아 커피를 내리고 이를 받아와 2층에서 마시는 구조였다.
▲ 2층에서 바라본 카페의 모습. 철제로 조립한 공장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 카페 2층의 유리창을 통해 청초호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이 전망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셈이다.
▲ 2층에서 내려다본 카페 모습. 1층에서는 원두와 여러 가지 기념품도 판매하고 있었다.

칠성조선소는 2018년 2월에 ‘뮤지엄과 북살롱, 오픈 팩토리, 그리고 플레이 스케이프 등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됐다는데 ‘말’이 꽤나 어렵다. 정문 옆으로 출입구가 된 건물이 1964년에 지어 식당, 사무실, 작업공간,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다는데, 여기가 뮤지엄(Museum)이다. 박물관으로 써도 될 일을 그렇게 로마자로 써서 좀 모양을 낸 것일까.
 
박물관과 북살롱, 그리고 카페로 구성된 조선소
 
뮤지엄에는 2018년에 20여 년 만에 재현해 본 목선 한 척이 전시돼 있었다. 속초엔 아직도 목선을 만들던 ‘배 목수’가 있다고 했다. 나무로 배를 짓는 건 매우 정교한 기술로, 수십억을 들여서 지은 통영의 거북선이 물에 띄우지도 못하고 해체되는 촌극이 일어난 이유가 설계도도, 목선 기술자들도 없어서였다고 하니 예사로이 볼 일이 아니다.
 
정문에서 바라보면 바다 쪽에 선 조그만 슬레이브 집이 살롱(salon)이다. 1974년에 지어진 건물로 가족들이 살던 집이었는데 지금은 책과 기념품 같은 걸 파는 공간이라 한다. 박물관 오른편 플레이 스케이프(play scape)는 예전에 나무를 자르고 켜던 제재소가 있었던 공간인데, 파도, 산, 나무, 그리고 배를 주제로 한 조형물을 설치해 놓아 아이들의 놀이터로 맞춤해 보였다.
 
호수를 등지고 선 파란 지붕의 높다란 건물이 ‘오픈 팩토리(open factory)’다. 현재 카페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인데, 원래 오픈 팩토리는 ‘외부의 방문객이 공장 내부를 둘러보면서 전체적인 공장의 공정 과정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한 공장’을 이르는 말이다.
 
조각을 공부한 창업자의 손자는 미국 보트 디자인 학교에서 배우고 돌아와 2014년에 소형 레저 선박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소형 조선소를 열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배를 짓던 오픈 팩토리는 문을 닫고 지금은 실내장식이나 전망 따위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카페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 승부는 주효한 듯하다.

▲ 카페 2층 창문으로 바라본 청초호 주변 풍경. 저 멀리 빨간 아치의 다리가 설악대교다.
▲ 바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석호인 청초호였다. 저 건너 빌딩숲이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고 있다.
▲ 사람들은 카페의 2층에서 이른바 '뷰'를 즐기고, 오래된 조선소의 흔적에서 '레트로' 감성을 만끽하는 것이다.

카페는 1층에서 원두를 볶아 커피를 내리고 이를 받아와 2층에서 마시는 구조였다. 1층에서는 원두와 여러 가지 기념품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2층은 대형 창문이 호수 쪽으로 나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이 카페의 2층에서 이른바 ‘뷰(view)’를 즐기고, 오래된 조선소의 흔적들에서 이른바 ‘레트로(retro)’ 감성을 만끽해 보는 것이다.
 
아바이 마을과 칠성조선소에는 속초와 분단의 현대사가 있다
 
대형 창문으로 청초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빨간 아치의 설악대교가 보였고, 호숫가의 빌딩 숲이 마치 낯선 나라 풍경 같았다. 2대 60년에 걸쳐 목선을 만들고, 배를 수리하던 영세한 조선소의 흔적들, 이를테면 배를 건조할 때 선체를 올려놓는 선대(船臺), 배를 수리해서 바다로 내보내던 길로 쓰인 독(dock)과 선로 따위가 연출하는 복고 취향도 방문자들의 구미에 맞았을 것이다.
 
칠성조선소의 창업주가 원산 출신의 실향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7년 전 속초를 찾았을 때 들러본 ‘아바이 마을’을 떠올렸다. 청호동의 ‘아바이 마을’은 실향민들이 청초호 북동쪽 모래사장에 움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던 1951년 봄 무렵에 형성된 마을이다.

▲ 카페 옆 호숫가에 남은 조선소의흔적들. 레일이 깔려 있고, 배를 건조할 때 선체를 올려놓는 선대(船臺)도 보인다.
▲ 호숫가에 남은 조선소의 흔적들. 날씨가 너무 뜨거워서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 호수로 이어진 선로 위에 배를 고정하는 선대로 얹혀 있다.
▲ 조선소 창업주는 함남 출신 실향민이었다. 인근에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의 집단 거주지인 아바이 마을이 있다. 갯배가 마을로 가고 있다.

‘아저씨’를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로 마을 이름을 붙일 만큼 아바이 마을에는 주로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 몰려 살았다. 고향과 한 발짝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며 고향에 돌아갈 날을 그리던 실향민들의 슬픈 속초 정착기다.
 
칠성조선소의 창업주가 목선을 짓는 기술자가 아니었다면 그도 아바이 마을의 숱한 아바이들과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마을을 조성한 주역인 1세대 실향민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실향민 2·3세와 후손들이 살지만, 어업활동이 감소하면서 인구까지도 줄고 있다고 한다.
 
그런 뜻에서 속초에 가면 갯배 타고 꼭 들러봐야 할 곳으로 꼽히고, 영화 <만추>(1981)와 드라마 <겨울 동화>(2000)의 무대로 유명해진 아바이 마을은 분단의 현대사, 그 아픈 그늘을 쓸쓸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칠성조선소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칠성조선소는 풍어의 꿈이 넘치던 어항에서 관광도시로 변한 속초의 현대사가 응축된 장소인 것이다.

▲ 조선소 터에 세워진 철제 벽 너머로 짓다가 멈춘 빌딩이 폐가처럼 서 있다. 폐 조선소가 카페로 바뀐 것은 행운이었던가.

우리는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잠시 쉬다가 카페를 나와 선대와 선로가 남아 있는 호숫가에서 호수 저편의 빌딩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오후 2시, 수은주는 33도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2023. 7.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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