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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고색창연’은 없어도 최초의 ‘총림’으로 수행 도량이 된 절집

by 낮달2018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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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①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2023.6.20.)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백암산 백양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총림, 고불총림이 결성되면서 교선겸수의 종합 도량으로 발전해 왔다. ⓒ 백양사 누리집

퇴직 동료와 함께 1박 2일 예정으로 출발한 남도 기행의 첫 목적지로 백양사가 선택된 것은 필암서원을 가려면 백양사를 거치는 게 편해서였다. 애당초 남도로 가자고 제안했을 때, 백양사는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해남까지 가는 길, 일부러 장성에 들렀는데 백양사를 빼놓으면 서운할 것 같아서 목적지 하나를 더 욱여넣은 것이었다. 

 

남도기행의 첫 목적지, 필암서원 가는 길에 들른 절집

 

한 번도 가지 못한 어떤 곳을 우리는 자신의 단편적 배경지식과 어설픈 상상력으로 버무리곤 한다. 내게 백양사는 1987년 6·10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상임 공동대표를 지낸 지선 스님이 방장을 맡았던 절집으로 기억하고 내장사 단풍 못잖은 단풍이 어우러지는 곳이라는 것 정도였다.

 

나는 목적지에 관한 자료를 모아서 인쇄하여 떠났지만 그걸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백양사 자료를 갈무리할 때까지, ‘백양(白羊)’이 ‘흰 양’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암사(白巖寺)라고 이름 붙인 이 절은 이후 정토사(淨土寺), 백암사 등으로 바뀌었다가 1574년(선조 7) 주지 팔원(八元) 스님이 중건하면서 백양사가 되었다.

▲ 백양사 포교국인 안선국. 앞쪽은 해강 김규진 글씨와 죽농 안순환 그림으로 된 '백양사' 현판이, 뒤쪽에는 '안선국' 현판이 걸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팔원이 백양사에 머물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니 ‘흰 양[백양(白羊)]’이 독경 소리를 듣고 몰려오곤 하여 절 이름을 백양사라 개칭하고 승려의 법명도 환양(喚羊:양을 부른다는 뜻)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양은 짐승이라기보다 깨달음을 얻고자 백암사로 몰려든 스님들에 대한 비유겠다. 그러나 정작 사찰의 창건과 중건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백양사 누리집(바로가기) 이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백양사는 지금의 쌍계루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864년(고종 1) 홍수로 사찰 전체가 휩쓸려 내려가면서 도암 인정(1805~1883)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재건하였다고 한다.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중창한 바 있는 백양사는 1917년 송만암(1876~1956)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만암의 30년 주석, 호남 고불총림을 결성하여 종합 도량으로 발전

 

만암은 45세 때부터 백양사 주지직을 맡아 30년 가까이 주석하면서 불사에 진력하여, 강원(講院)을 개설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재 동국대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만암은 국내 최초의 총림(叢林)인 호남 고불(古佛: 존재의 본체인 영원불멸의 진리를 상징)총림을 결성하여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종합 도량으로 발전시켰다. 총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 등 모두 갖추고 승려들이 수행하는 도량으로 한국 불교 조계종에는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백양사를 5대 총림이라 하였는데, 2012년에 동화사·쌍계사·범어사를 추가 지정하여 8대 총림이 되었다.

 

그러나 2019년 조계종 중앙종회에서는 고불총림이 총림법에서 규정한 총림 구성 요건을 ‘현저히’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총림 지정에서 해제하였다. 그러나 이는 비단 백양사의 문제가 아니어서 불교계는 조계종 집행부의 의도대로 백양사 차기 주지를 선출해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한 바 있었다. 총림에서 해제되면서 지선 스님은 백양사 방장(方丈:총림의 최고지도자) 직을 잃었다.

 

총림에서 해제되었지만,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로 현재 부속 말사 26개 소를 관장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오래되었지만, 현재의 백양사는 극락보전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20세기에 들어와 새로 지은 것이다. 당연히 국가지정문화재도 몇 되지 않는다.

▲ 백양사 사천왕문. '고불총림백양사'란 편액이 걸려 있다. 백양사의 정문으로 1917년 세웠으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다.

2m가 넘는 대형 불상으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작품으로 보는 극락보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2020)과 1775년에 조성된 대형 후불탱화 극락보전 아미타회상도(2021), 그리고 백양사 중흥에 힘쓴 태능(1562~1649) 스님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소요대사 부도(2002) 등이 21세기 들어 각각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대웅전과 극락보전, 사천왕문 등은 1974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백양사 들어가는  ‘아름다운 단풍나무 길’

 

백양사로 들어가는 한적한 가로숫길로 들어설 때, 나는 백양사를 목적지에 올리길 잘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절집으로 가는 길의 경관이야 원래 아름답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아름다운 단풍나무 길’이라면 더 이를 게 없지 않은가.

▲ 백양사로 드는 숲길. 숲길 좌우에 미끈하게 자란 노거수는 모두 갈참나무다. 개중에는 700살짜리도 있다.
▲ 백양사로 드는 숲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아름다운 단풍나무 길'이다. 가을철의 풍경이 상상되지 않는가.
▲ 진입로 옆 연못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다. 단풍철에는 여기에 사진가들이 앞다투어 몰려들 것이다.

차를 대고 걸어서 오르는 숲길 좌우에 미끈하게 자란 노거수는 모두 갈참나무다. 개중에는 국내 최고령 700살짜리 나무도 있다고 했다. 쌍계루 앞 연못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신비하고도 아름다웠다. 그 풍경은 아마 단풍철에 백양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뭇 사진가들이 앞다투어 찍을 것이다.

 

절집 입구 왼쪽 연못 가에 세워진 2층 누각이 쌍계루(雙溪樓)다. 1351년 각진국사가 창건할 때는 ‘교루(橋樓)’라 이름하였던 이 누각은 1370년 청수 스님이 중창하면서 포은 정몽주에게 부탁하여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쌍계루가 되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엔 백암산 안 명소로 숱한 문인이 쌍계루를 찾아 시문을 남겼는데, 정몽주 이외에도 목은 이색, 삼봉 정도전이 글을 남겼으며, 면앙정 송순, 면암 최익현, 서옹스님 등이 남긴 시문이 현판으로 전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쌍계루는 6·25 전쟁으로 소실되고 지금 건물은 1986년에 지은 것이다.

▲ 백양사 쌍계루. 정몽주가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지었다. 6.25전쟁 때 불타 이 누각은 1986년에 세웠다.
▲ 백양사로 들어가는 어귀. 극락교 주변에도 단풍나무 등이 우거졌다.
▲ 극락교 아래 냇물에도 나무 그림자가 비친다. 왼쪽으로 보이는 전각은 백양사 종무소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 산기슭에 ‘백양산 비자나무 숲’ 안내판이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된 이 비자나무 숲은 추위에 약한 난대성 상록 침엽교목 비자나무가 자생하고 있는데, 고려시대 각진국사(1270~1355)가 당시 구충제로 사용된 비자 열매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비자나무 숲은 제주도, 전남 해남, 고흥, 화순, 전북의 고창, 정읍 등 남부지역에도 분포되어 있으나, 그중 백양사 비자나무 숲은 가장 넓은 710,697㎡ 지역에 7,000여 그루 이상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관련 글 : 제주 여행만 여섯 번째, 이 대단한 숲을 왜 지금 알았을까

 

20세기에 중창한 백양사엔 ‘고색창연’은 찾기 어렵다 

 

말사를 26개소를 둔 본사이니만큼 백양사의 규모는 예사롭지 않다. 사천왕문을 지나면서 나는 이 절집에서 고색창연한 전각과 거기 밴 세월의 자취를 찾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대체로 20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찬 경내를 돌아보는 기분도 심상하기만 했다.

▲ 백양사 종무소 앞에 세운 '만암대종사 고불총림 도량'이라 새긴 빗돌.
▲ 백양사 대웅전.1917년 송만암이 백양사를 중건할 때 건립했다. 대웅전 뒤쪽에 백암산 백학봉이 수려하다.
▲ 백양사 극락보전, 400년쯤 묵은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맞배집인데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가 있는 다포 양식이다.

설선당과 범종각 사이로 들면 오른쪽에 백암산 백학봉 암벽을 등지고 선 대웅전이 호쾌하다. 1917년 송만암이 백양사를 중건할 때 건립한 대웅전의 내부에는 석가여래 삼존불과 10척 높이의 불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바늘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해학적인 모습의 나한상 23체가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웅전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고,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돌아와서야 그 나한상 사진을 찍을걸, 아쉬워하고 만 소이다.

 

저만큼 높다랗게 올라선 동쪽의 대웅전 아래 마당 북쪽에는 왼쪽부터 차례로 극락보전, 조사전, 칠성각이 일렬로 서 있다. 극락보전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한응 선사가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앞면 3칸에 옆면 4칸 맞배집으로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栱包: 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건물 내부에는 담담한 기법의 단색벽화가 있다.

 

자연석을 2단으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 처리한 원기둥을 세운 극락보전은 400년쯤 묵어 경내에선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내부에 봉안한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과 아미타회상도(2021)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승격되어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랬을지 모른다.

▲ 1924년 대웅전 뒤뜰에 세운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팔층탑. ⓒ 백양사 누리집

빼먹은 대웅전 뒤뜰의 석가 진신사리 봉안한 팔층탑

 

갈무리한 자료에 있는 내용인데, 읽지 않아서 돌아와서야 대웅전 뒤쪽의 탑전(塔殿)을 지나쳤음을 알았다. 1924년 대웅전 뒤뜰에 팔정도(八正道: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를 상징하고자 팔층탑을 세웠는데, 여기엔 근대 불교계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용성스님이 간직하고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극락보전과 마주 보는 우화루(雨花樓) 옆 향적전 담 앞에 수령 350년으로 추정하는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무 높이는 5.3m, 뿌리목 둘레 1.47m, 나무갓 폭은 동서로 6.3m, 남북으로 5.7m에 이르는 이 나무가 바로 천연기념물 제480호 ‘백양사 고불매(古佛梅)’다.

 

3월 말께 진분홍빛 꽃을 피우는 홍매인데, 그 빛깔과 은은한 향기가 산사의 정취를 더한다. 백양사에서는 1700년께부터 옛 절 앞뜰에다 매화 여러 그루를 심고 가꾸어 왔는데, 1863년 절을 여기로 옮겨올 때, 홍매와 백매 한 그루를 같이 옮겨 심었다. 그러나 백매는 죽어 버리고 지금의 홍매 한 그루만 살아남았고 1947년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 우화루 옆 향적전 담장 앞에 선 백양사 고불매. 수령 350년의 천연기념물이다. 3월말에 꽃이 피는 홍매다. 원 안은 매실이다.
▲ 백양사 입구의 부도전. 백양사가 배출하거나 백양사에 주석한 고승 18분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탑과 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 백양사 박물관으로 옮겨진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 태능의 묘탑(중앙 맨 앞)은 보물로 지정됐다.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절집에서 내려오는 길에 잠깐 부도전에 들렀다. 백양사에서 배출하거나, 백양사에 주석(駐錫:승려가 포교하기 위하여 어떤 지역에 한동안 머무름)하였던 휴정(休靜)·유정(惟政)·모운(慕雲)·태능(太能)·범해(梵海) 등 열여덟 분 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 모양의 탑과 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 중 지금은 백양사 박물관으로 옮긴 소요대사 부도는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 태능(太能 1562∼1649)의 묘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156cm 규모의 탑으로, 전면에는 액자 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소요당(逍遙堂)’이라 새겨서 소요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소요대사 승탑은 백양사 이외에도 담양 용추사와 지리산 연곡사에도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백양산의 의승장들

 

백양사에는 조선 후기 불교를 중흥한 청허 휴정(1520~1604)의 문도들이 주석하였다. 청허의 문도인 소요 태능, 진묵 일옥, 기허 영규 등이 바로 그들이다. 소요와 진묵은 임진왜란 때 의승(義僧)으로 나가지 않고 수행으로 일관하였지만, 처능(處能)과 영규(靈圭) 등이 참전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7월20일 장성 남문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백암사의 승려들도 참전했다. ‘호남 오산 남문창의비’에는 의승장(義僧將) 처능·계묵·계한·덕인·자혜·의관·처한·학인·혜인 등 9명이 기록되어 있다. 승병장 영규(?~1592) 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800 승병을 이끌고 최초 육상전투의 승리인 청주성을 탈환했다. 임란 때 승병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영규 대사의 부대가 처음이었다.

 

영규는 의병장 조헌(1544~1592)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함께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다. 의병과 승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 전투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선조가 청주성 승전 소식에 당상(堂上)의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으나 그 상이 도착하기 전에 영규는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백양사는 소요와 같은 고승은 물론, 영규를 비롯한 승병장을 배출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백양사의 주요 고승들은 한국 불교계를 이끌었다. 조계종 제2대 교정 만암을 비롯하여, 제5대 종정 서옹(1912~2003), 태고종 초대 종정 묵담, 총화종 초대 종정 추강 등이 그들이다.

▲ 백양사 입구의 일광정 근처의 아치형 다리와 연못. '춘백양'의 싱그러움이 저절로 풍기는 듯하다.
▲ 떠나면서 찍은 백양사의 단풍나무 숲길. 이 길을 언제나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누구에게나 시간은 무제한 주어지지 않는다.

백제 때 창건되었지만, 부침을 거듭하면서 한국 최초로 고불총림을 결성한 백양사의 전통은 2019년에 총림 해제에도 선교겸수(禪敎兼修)의 도량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백양사 앞 아름다운 숲길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언제쯤 백양사의 단풍과 설경을 만나러 여길 다시 찾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다 말았다.

 

 

2023. 7. 4. 낮달

 

[남도 기행] ②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남도 기행] ③ 강진 백운동 원림(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남도 기행④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남도 기행] ⑤ 달마산 미황사(美黃寺)(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남도 기행] ⑥ 달마산 도솔암(兜率庵)(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남도 기행] ⑦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 일원(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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