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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한적한 고찰, 한때는 ‘수륙재’로 모든 망자와 민중을 아울러 위무했다

by 낮달2018 2023.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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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②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무위사(無爲寺)(2023.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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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출산 무위사 전경. 한때는 본사가 23동, 암자가 35개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그 뒤 화재 등으로 규모가 크게 줄었다.

애당초 월출산 무위사는 우리의 여정에 들어 있지 않았었다. 필암서원을 떠날 때부터 비가 뿌리기 시작했는데 광주와 나주를 거쳐 영암 군계를 막 넘었을 때였다. 황 선생이 근처에 무위사가 있다며 들르겠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남도 1번지 기행의 추억
 
‘남도 1번지 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를 찾은 게 복직하던 첫 해, 1994년 여름이었다. 요즘처럼 승용차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지회에서 주선한 이 전세 버스 여행에는 조합원과 후원회원 등 교사와 그 가족들이 가득 탔다. 나는 아내와 초등생이던 두 아이를 데려갔는데, 디지털카메라가 나오지 않을 때라 인물 사진  몇 장 말고는 남은 게 없다.
 
월출산 산행을 하는데 아들 녀석은 감기를 앓고 있어 아내와 남았고, 딸애를 데리고 산에 오르는데 아이가 성큼성큼 산을 잘 타서 기특하게 여긴 기억이 아련하다. 대흥사와 백련사, 운주사를 찾았었고, 다산초당도 들렀었다. 땅끝 전망대에 오를 때, 고소공포증이 있던 아내가 힘들어했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남도에는 백련사나 도갑사 등 고만고만한 절집이 적지 않아서일까, 무위사는 들렀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때 이후에 전남 여행은 보길도나, 보성, 순천만과 선암사 정도만 드나들었을 뿐이니 이번 남도 기행은 아스라한 기억의 행로를 좇아가는 길인 셈이다.

▲ 평지에 서 있는 무위사 일주문. 주변에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뒤쪽에 사천왕문이 보인다.

타고 오던 도로를 버리고 지선으로 들어가 이내 무위사 앞에 닿았다. 산기슭에 자리한 절집으로 진입로도 평지로 짧았다. 우산을 들고 들어서니 일주문이 단아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일주문 양옆에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완만한 산기슭에 자리한 절집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오니 대찰이라 하기엔 어려울 듯하다.
 
통일신라 때 창건, 세종 땐 수륙사로 지정
 
무위사는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진평왕 39년(617) 원효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고, 875년(헌강왕 1) 도선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고 개칭한 뒤, 많은 승려가 주석하였다. 905년(효공왕 9) 선각이 세 번째로 중창(重創)하였다.
 
무위사는 세종 때 수륙사(水陸社)로 지정,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인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는 사찰이 되었다. 숭유억불 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던 때인 1430년(세종 12)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극락보전을 지었다는 사실은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의 당대 위상을 시사한다.

▲ 무위사 사천황문(해탈문). 무위사는 완만한 산기슭에 지어졌고 조그만 절집이라 번다하지 않다.
▲ 자연석 축대와 돌계, 그리고 돌무더기 등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무위사는 유홍준이 '소담, 한적, 검소'하다고 극찬한 바 있다.
▲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보제루. 보제루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절마당에 극락보전이 서 있다.
▲ 무위사 안내도를 재가공했다.

무위사에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이 아닌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 중심이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비록 왕실이 주도하여 이루어졌지만, 수륙재는 양반과 노비 등 모든 망자를 아우르는 불교 의식이었다. 왕실의 구병(救病)부터 전염병 예방에 이르기까지, 강진의 백성들은 무위사 수륙재에 참여하며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천년 고찰로 성쇠 거듭했으나 국보와 보물이 넘친다
 
1555년(명종 10) 태감이 네 번째로 중창하면서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뜻의 ‘무위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때 무위사는 본사가 23동, 암자가 35개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그 뒤 화재 등으로 규모가 크게 줄었다.
 
1974년 성보박물관을 건립하고 해탈문, 봉향각, 천불전, 미륵전을 중건하였고 1991년에는 산신각을 짓고, 동쪽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요즘은 산사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경험하는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인 ‘무위자연 사찰 체험(템플 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근년 들어서 새로 전각을 짓는 등 불사를 이어왔으나, 무위사는 사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단출한 절집이다. 그러나 이 절집이 보유한 성보문화재가 지방 지정문화재를 빼고도 국보 2점에 보물이 4점이나 되니 그건 전적으로 무위사가 천년 고찰로서 성쇠를 거듭해 온 역사를 지닌 절집이어서다.

▲ 국보 극락보전. 간결하면서 직선적인 조선 전기 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 3칸 중 가운뎃칸이 양쪽 협칸보다 작은 게 특이하다.
▲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극락보전은 1430년에 효령대군이 지었다. 양옆의 처마가 길어서 약간 불균형하게 보이기도 한다.
▲ 극락보전은 단청도 하지 않았고, 문살도 단순한 격자 모양이 빗살 모양으로 매우 검박한 느낌을 준다.

단아하고 검박한 맞배집 불전, 극락보전
 
사천왕문과 누각인 보제루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아래에서 올려다본 풍경과는 다른, 산기슭이라고 믿기 어려운 널찍한 법당 마당이 호쾌하게 펼쳐진다. 누런 흙 마당 저편 축대 위에서 무심하게 방문자를 맞는 것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에 맞배지붕의 불전 극락보전이다.
 
1430년에 지은 극락보전은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을 사용하는 고려 후기 불전 건축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간결하면서 직선적인 조선 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여느 맞배지붕의 전각과 달리 좌우 처마가 길어서 어쩐지 불균형한 느낌이 있다. 극락보전은 어칸(가운뎃칸)이 좌우 협칸보다 좁은 게 특징이다. 단청도 하지 않았고, 문살도 단순한 격자 모양과 빗살 모양이 다다.

▲ 극락보전에서 내려다본 앞마당. 괘불대와 배례석 뒤로 느티나무 세 그루가 시원하게 서 있다. 맨 오른쪽 건물이 보제루다.
▲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았다는 백의관음도.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극락보전 내부는 ‘보물창고’
 
그러나 극락보전의 내부는 보물창고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의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이 봉안되었고, 후불벽화로 1476년에 조성된 아미타여래 삼존 벽화는 조선시대의 새로운 양식을 반영한 조선 전기불화다. 이 벽화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제작된 다른 아미타 불화와 대조되는 큰 가치가 있어 2009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아미타여래 삼존 벽화와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의관음도도 보물로 지정됐다. 극락보전 내벽 사면은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비천도 등 29점의 벽화(보물)로 장식되었는데, 1974년 극락보전 보수 때 해체하여 지금은 백의관음도와 함께 성보박물관에 전시, 보존하고 있다. [참고 : 무위사 성보문화재 바로가기]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한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 벽화를 그렸다는 설화가 있다. 마지막 날,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낀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백의관음도에는 눈동자가 비어 있다는 얘기지만, 무위사 벽화 가운데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불화는 없다고 한다. [관련 기사 :  강진 월출산 무위사]

▲ 고려시대에 조성된 무위사 삼층석탑(문화재자료)
▲ 극락보전 옆에 나란히 선 산신각(왼쪽)과 미륵전. 산신각은 그렇다 해도 미륵전은 너무 작다. 미륵전 안 수더분한 미륵불은 찍지 못했다.
▲ 무위사 세 번째 중창에 힘쓴 선승 선각대사 탑비(보물)

극락보전 축대 아래에 1678년(숙종 4)에 조성했다는 괘불대 한 쌍이 나란하다. 괘불대 앞 가운데에는 연화문 배례석이 놓였다. 극락보전 뜰에서 바라보는 보제루와 종무소 앞에 선 느티나무 고목이 시원했다. 전각도 얼마 되지 않는 절집인데도 널찍한 앞마당을 두고 있음은 무위사가 천년 거찰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해 주는 듯했다.
 
극락보전 왼쪽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인 삼층석탑이, 그 위 축대 위에 산신각 앞에는 보물 선각대사 탑비가 서 있다. 신라 말기의 선승(禪僧) 선각대사 형미(864~917)는 보조선사의 제자로 보조선사가 입적한 뒤 당나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905년 귀국하여 무위사에 머물면서 세 번째 중창을 이루었다. 무위사는 당대에 지역을 대표하는 선종 사찰이었다.
 
선각대사 탑비 북쪽으로 산신각과 미륵전이 나란히 서 있고, 서쪽으로는 나한전과 그 뒤쪽으로 경내에서 떨어진 독립된 공간에 천불전이 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작은 절이라 여기긴 했지만, 금방 경내를 다 돌아본 듯하니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있다.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남도 답사 일번지의 첫 기착지”로 늘 선택하였다는 무위사를, 그는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도 있다”라며 기린 바 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절집은 한적하긴 했지만, 연중 템플 스테이가 이어지는 한, 예전의 고적함을 지키기 어려울 듯했다.
 
인터넷에는 무위사 설중매, 홍매화 기사가 여럿이다. 무심코 지나온 극락보전 맞은편 축대 아래에 수령 120년의 홍매화 한 그루가 눈 속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풍경 말이다. 진홍빛 겹꽃 사이로 아른대는 눈 맞은 극락보전의 검박한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훗날을 기약하는 건 쉽지 않은 일, 우리는 서둘러 무위사를 떠났다.
 
 

2023. 7. 10. 낮달

 

[남도 기행] ①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

[남도 기행] ③ 강진 백운동 원림(강진군 성전면 월하안운길 100-63)

[남도 기행]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남도 기행] ⑤ 달마산 미황사(美黃寺)(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남도 기행] ⑥ 달마산 도솔암(兜率庵)(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남도 기행] ⑦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 일원(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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