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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이학의 시조’ 정몽주, ‘단심가’와 ‘선죽교’로 기린 임고서원

by 낮달2018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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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를 기리는 영천시 임고면의 임고서원(臨皐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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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고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65년 복원, 1985년 정부 지원으로 새 서원을 지었다. 왼쪽이 옛 서원이다.

영천시 임고면의 임고서원(臨皐書院)은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명종 8년(155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고자 임고면 고천리에 창건하였다. 1554년에 ‘임고’라 사액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이듬해에 사액을 다시 받았다.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 정몽주, 선죽교와 단심가로 신화화


정몽주는 영천 임고 출신으로 고려 후기에 문하찬성사(정2품),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성리학에 뛰어난 신진사류(士類)로 스승인 목은 이색(1328~1396), 야은 길재(1353~1419)와 더불어 삼은(三隱)이라 불리고, 이색은 그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 이색은 정몽주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이학의 시조'라고 했다. 서원 앞 송탑비.

그는 학문뿐 아니라 사절로 명나라와 일본에 직접 가는 등 담대한 외교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신진사류 양성에도 크게 이바지했고, 기울어가는 고려사회를 바로잡고자 국가 기강 정비와 민생 안정에 노력했다. 당시 친원파가 득세하던 상황에서도 그는 친명정책을 주장하면서 이성계와 의견을 같이했다.

 

▲ 임고서원 소장 3 점 영정 중 1점. 1735년에 옮겨 베낀 영정본.

그러나 위화도 회군 뒤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면서 정치적으로 갈라섰다. 그는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 하자,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였지만, 이방원 역시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걸림돌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塵土)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상황을 살필 겸 병문안을 핑계로 낙마 사고로 자리에 드러누운 이성계를 찾았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여가(何如歌)’를 읊었고, 정몽주는 자신의 마음을 ‘단심가(丹心歌)’로 들려준다. 정몽주의 의지를 확인한 이방원은 자신의 문객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당대 문헌에 선죽교는 등장하지 않으며, 선죽교가 정몽주 사망 장소라고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후반 최립(1539~1612)이 지은 시에서다. 포은은 후대에 충절의 상징으로 신화화했으며 그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허구로 이해하는 논문도 있다. (김인호 광운대 교수)
 
정치적 은유와 직설이 빛나는 이 유명한 대화는 정몽주의 대쪽 같은 절조(節操)를 드러내는 장치로 유효하며, 날카롭게 대립하던 당시 정국을 상징하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러나 이 같은 배경 설화를 처음 실은 문헌은 17세기 전반에 심광세가 지은 <해동악부(海東樂府)>고, 믿을 만한 ‘단심가’의 수용 기록 또한 16세기 후반 이후에야 나타난다. (아주대 김진희 논문)
 
위 논문은, 당시는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 된 이후 그를 기리는 세 군데의 사액서원이 건립되어 정몽주의 숭배과정이 완성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시기적 일치는 ‘단심가’와 ‘하여가’ 이야기가 선죽교 전설과 마찬가지로, 정점에 오른 정몽주의 숭배화 작업을 대중적으로 더욱 확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이다.

▲ 서원 앞에는 포은의 '단심가'와 포은의 자당이 지었다는 '백로가'가 새겨져 있다.
▲ 개성의 선죽교를 본따 만들어 놓은 서원 앞 선죽교. 실제로 포은이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은 정몽주가 단순히 이념적으로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와 절조를 지킨 데에 그치지 않고, 역성혁명을 꾀하는 세력과 분연히 맞서다가 죽임을 당한 고려 유신이라는 사실이다. 선죽교나 단심가가 겨냥하는 신화화와 무관하게 그의 선택과 충절은 마땅히 기림을 받을 만하다는 얘기다.
 
고려의 신하로서 역성혁명에 맞선 정몽주의 복권은, 그가 죽고 난 5년 뒤인 1401년(태종 1)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조선조 창업에 참여한 권근의 요청으로 ‘익양부원군’으로 추증된 것이다. 새 왕조로서는 비록 역성혁명에 반대했지만, 포은이 실천한 충절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517년(중종 12)에는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될 때 묘에 비석을 세우되,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조가 내린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정몽주는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 등 몇 곳의 서원에는 정몽주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새 서원 왼쪽에 있는 옛 서원. 아주 소박한 건물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새 서원 앞에서 바라본 옛 서원. 단출하고 소박한 건물들이다.

임고서원은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1554~1637)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1453)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71년(고종 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은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에 포함된다.)
 

1980년 정부 보조로 건립한 만만찮은 규모의 새 서원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서원을 건립하여 구 서원과 신 서원의 2개 구조로 되어 있다. 새로 지은 서원은 소박한 규모의 옛 서원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리 알려지지 않은 서원이니 규모가 그만하겠거니 하는 예상과 달리 서원뿐 아니라, 주변의 부대 시설도 예사롭지 않았다.
 
서원 앞에는 성역화 사업으로 선죽교를 재현했고, ‘동방 이학지조’ 송탑비를 세우고 서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인 조옹대(釣翁臺) 위에 육각정 ‘무괴정’을 건립했다. 조옹대 아래에는 포은이 낚시를 즐겼다는 용연(龍淵)을 조성했다. 서원 오른쪽에는 충효문화수련원과 포은유물관이 또 한 블록을 차지하고 있고 포은의 어버이 묘소를 지키는 계현재(啓賢齋)도 세워져 있다.

▲ 새 서원의 문루인  2층 누각 광명루. 아래층은 외삼문, 위층은 누마루다. 모두 1985년 이후 새로 지은 건물이다.
▲ 자연석으로 쌓은 높다란 석축 가운데로 낸 자연석 계단을 오르면 임고서원의 문루 광명루가 나타난다.

서원은 맨 아래에 외삼문이자 문루인 영광루(永光樓)·강당인 흥문당(興文堂)·내삼문 유정문(由正門), 맨 위에 묘우(廟宇) 문충사(文忠祠)가 일직선으로 자리 잡았다.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와 위로 갈수록 지형이 높아지는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형식으로 건물의 위계를 표시하였다.
 
영광루는 앞면 3칸, 옆면 두 칸의 팔작집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외삼문인 경앙문(景仰門)이고, 위층은 유식 공간인 누마루다. 문루를 지나면 바로 앞면 5칸, 옆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인 강당 흥문당이다. 좌우의 양쪽에 각각 협실(방)을 들였고, 가운데 3칸은 대청이다. 임고서원 현판이 처마에 걸렸고, 대청마루엔 전서로 새긴 ‘흥문당’ 편액이 달렸다.

▲ 외삼문인 경앙문에서 바라본 임고서원 강당 흥문당. 위쪽은 광명루의 누마루다.흥문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집이다.
▲ 강당인 흥문당의 앞면 5칸 중 세 칸으로 이루어진 대청마루. 처마에 임고서원 편액이, 뒤쪽 서까래 아래 흥문당 현판이 걸렸다.
▲ 임고서원 강당 흥문당의 대청마루. 가운데 문 위 서까래 아래 전서로 쓴 흥문당 현판, 좌우로 시판 등이 걸려 있다.
▲ 임고서원 강당 흥문당에서 바라본 문루 광명루. 오른쪽은 신도비와 비각이다.

강당 앞에는 서재 함육재(涵育齋), 동재 수성재(修省齋)가 마주 보고 있다. 동서재는 모두 앞면 3칸 옆면 1칸 반 맞배지붕의 아담한 규모로 유생들의 숙소다. 앞면 두 칸은 방을, 한 칸은 마루인데, 동서재의 마루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이 마루다. 서재엔 주로 하급생들이 생활했다고 한다.

▲ 유정문을 지나면 묘우인 문충사다.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에는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 서원 쪽에서 바라본 조옹대와 육각정 무괴정.
▲ 조옹대 아래 포은이 낚시를 즐겼다는 용연.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 만든 시설들이다.
▲ 서원 앞 은행나무. 수령이 500년이 넘는 이 나무는 원래 첫 서원에 있던 것은 옮겨왔다고 한다. 경상북도 기념물이다.

내삼문인 유정문을 지나면 묘우인 문충사다.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에는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임고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두 번째 정일(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서원의 재산으로 전답 1만여 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

▲ 포은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원의 유물로는 정몽주의 영정 3폭과 <포은문집(圃隱文集)> 목판 113판, <지봉선생실기(芝峰先生實記)> 목판 71판, <포은집>·<어사성리군서(御賜性理群書)> 11권 외에 200여 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서원 앞마당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에 이른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겨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1592)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정부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성역화 사업 덕분에 조그마한 시골 동네는 그 모습을 일신했다. 비록 수십 년 전에 새로 지은 서원이지만, 충절의 상징과도 같은 포은 정몽주를 모신바, 그 이름의 무게가 여느 서원과는 비길 수 없다. 단지 세월의 부피가 느껴지지 않는 새 건물들이 주는 이질감이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개성의 숭양서원처럼 여겨고 둘러보면서 포은의 ‘단심가’를 나직이 읊조릴 만하지 않은가. 
 
 

 

2023. 6.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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