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군 진보면 소재 객주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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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정원의 청보리밭 대신 객주문학관으로
6월 초 주말에 서울의 아들아이가 와서 어디 근처에 나들이라도 하자고 떠난 곳이 청송이었다. 아이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의 ‘산소 카페 청송정원’을 찍었다. 청송정원은 청송군에서 파천면 용전천 일원에, 봄에는 청보리, 가을에는 백일홍을 심어 방문객을 맞이하는 전국 최대 규모인 약 4만 2천 평에 이르는 관광 단지란다.
내비게이션에 청송정원을 입력하고 기세 좋게 출발했는데,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청보리는커녕 시설들조차 죄다 비어 있었다. 확인해 보니, 6월 5일까지 개방한다던 청보리는 전날인 2일부터 수확하면서 베어진 것이었다. 닭 쫓던 개 꼬락서니가 돼서 입맛이 썼지만, 구경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 우리는 인근 진보면의 ‘객주문학관’으로 차를 몰았다.
객주문학관(바로 가기)은 진보 출신의 작가 김주영(1939~ )의 대하소설 <객주(客主)>를 주제로 2014년 문을 연 문학관이다. 객주문학관은 문 닫은 진보 제일고 건물을 증·개축한 4,740㎡ 규모의 3층 건물로 <객주>를 중심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담은 전시관과 소설도서관, 스페이스 객주, 영상 교육실, 창작 스튜디오, 세미나실, 연수시설, 그리고 작가 김주영의 집필실인 여송헌(與松軒) 등으로 이루어졌다.
객주는 조선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객상(客商)]들의 거처를 제공하며 물건을 맡아 팔거나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던 상인, 또는 그런 집을 가리킨다. 소설 <객주>는 “19세기 말 조선 팔도를 누비며 치열하게 살아간 보부상(褓負商)들의 삶을 통하여 민중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과 피지배자인 백성들의 눈으로 바라본 새로운 역사 인식”(문학관 누리집 해설, 이하 같음)을 보여준 역작 대하소설이다.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생활사
소설 <객주>는 1979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4년 9개월 동안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되었고 1981년에서 1984년까지 창작과비평사에서 <객주> 초판 9권이 출간되었다. 내가 <객주> 전편을 읽은 게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을 여러 차례 뒤적여 봐도 아리송하다. <객주> 9권이 출간된 1984년은 내가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경주 지방의 한 여학교에 부임한 때다. <객주>는 그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걸까.
<객주>를 꽤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나는 작품을 평가하는데 얼마간 인색했을 성싶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출간되는 족족 읽었고, 1984년에 완간된 황석영의 <장길산> 10권을 사들여 심취해 읽었던 시절이다. 아마 나는 <객주>에 빈번히 등장하는 성애의 장면과 그 농익은 묘사를 일종의 ‘상업성’의 표지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객주문학관 누리집 해설에서는 <객주>를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그 인물이 겪거나 행동하는 사건을 위주로 서술되고” “인물 간의 대화를 위주로 서술하고 있어 묘사보다는 서사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이라고 소개한다. 나는 주인공을 ‘길소개’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문학관의 해설에서 ‘천봉삼’이라는 걸 확인하고 머리를 갸웃했었다.
온갖 곡절을 지닌, 여러 명의 보부상이 소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면서 주인공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데다가 주인공이라기엔 천봉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내게 남은 <객주>의 기억은 여성을 성적으로 평가한 ‘육덕 흐벅지다’라는 표현과 ‘살 송곳’이니, ‘가죽 방아’ 같은 성적 어휘들이 고작이다.
내가 만난 ‘1970년대 작가’ 김주영
내가 작가 김주영을 과소평가하였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의 또 다른 장편소설 <천둥소리>(1986)와 자전적 성장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1987)를 읽고 나서다. 나는 <객주>의 빈번히 묘사된 성애의 장면이 신문 연재소설로서 독자에 영합한 것으로 읽으면서 그를 일정하게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김주영을 황석영, 윤흥길, 조태일, 한수산, 송영, 조선작, 최인호와 같은 ‘1970년대 작가’로 기억한다. 1970년대 초반 집에서 구독한 월간지 <문학사상>에서 같은 제목의 작가·작품론이 연재되었는데, 거기서 읽은 김주영은 내겐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황석영이나 윤흥길, 그리고 조태일 등 작가들의 작품이 준 여운이 그만큼 무겁고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객주>를 읽은 시기와 줄거리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책 전질을 사들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상 소설 습작을 집어치우고, 독자로 돌아간다고 하면서도 문청으로서의 내 시건방이 여전했던 것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래 줄거리 참고)
의협심 강한 보부상 천봉삼
<객주>의 주인공인 천봉삼은 보부상으로 정의감, 의협심이 있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역경을 이겨내는 남성적 특징을 지닌 선량한 인물이다. 아내를 찾아 나선 조성준에게 장사꾼으로서의 수완을 배운다. 천봉삼은 동무 선돌을 구하기 위해 청상과부 조소사를 납치하여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조소사는 거상 신숙주의 첩실로 들어가고 만다. 신숙주는 천봉삼과 조소사를 동침시켜 후사를 얻으려 하고, 봉삼의 아이를 가진 조소사는 월이의 도움으로 도망하여 아들을 낳는다. 천봉삼이 평강을 떠난 동안 조소사는 매월의 간계에 의해 뱀에 물려 죽고, 천봉삼은 아들을 월이에게 맡기고 장사를 나선다.
- 객주문학관 해설 중에서
객주문학관의 제1, 2전시실에는 작가 김주영의 <객주> 집필 배경과 과정이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다. 또 단편적이나마 조선 후기 보부상의 활동상이나 상업사(史)를 엿볼 수 있게 꾸며져 있어서 <객주>의 시대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길 위에서 쓰인 대하소설 <객주>
<객주>는 5년간의 사료 수집과 3년에 걸친 장터 순례, 2백여 명에 달하는 증인들의 취재로 완성되었다. 연재하는 약 5년 동안에는 한 달에 열흘도 집에 머무르지 못하고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전국의 장터를 순회하는 그의 가방에는 카메라와 망원경, 메모 수첩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소설에 조선시대 토속어와 서민들의 언어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소설의 재미를 더하고 있는 것 또한 그 같은 작가의 발품 덕분이다. 소설에 ‘장타령’과 판소리 등을 삽입한 것도 “문자에 음향을 입혀 소설 속 인물과 장터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라 한다.
민중의 삶과 가난, 김주영 문학의 두 가지 테마
대하소설 <객주>가 “조선 후기 치열하게 산 보부상들의 모습을 통해서 당대 역사를 생생하게 재현”하였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말속에 배어나는 민중들의 삶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라는 평가는 그래서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이후, 그는 “피지배층의 길바닥 인생을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토속적 어휘로 녹여낸 소설” <야정(野丁)>, <화척(禾尺)>, <활빈도> 등을 썼다. “이름 없는 민중의 삶과 가난, 이 두 가지는 김주영 문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문학관 해설)로 이러한 경향은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홍어>, <멸치>, <빈집> 등으로 이어졌다.
나는 1990년대 말에 근무하던 시골 고등학교에서 그의 대하소설 <화척>(전5권)도 흥미롭게 읽었다. 화척은 ‘버드나무를 세공하거나 소 잡는 일을 직업으로 하던 천민으로 뒤에는 백정이라 불린 천민 집단’인데, 이 소설은 고려 말 무신 집권 시대를 배경으로 신분의 질곡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이들 천민의 삶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1984년 <객주>로 제1회 ‘유주현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한국소설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의 문학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자기 대표작 제목을 딴 문학관으로 헌정 받을 만한 원로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한편, <객주>는 1983년과 2015년에 KBS 2TV에서 드라마화됐으며 만화가 이두호에 의해 만화로도 그려졌다.
2013년, 30년 만에 완간된 <객주>
객주문학관을 다녀와서 관련 자료를 찾다가 <객주>가 9권 출간 30년 만에 마지막 10권이 나오면서 완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 그러니까 당시 마지막 권은 미완이었다는 얘긴데, 무슨 소설이 이렇게 끝나나 싶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1979년부터 <서울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객주>는 1984년 연재가 끝난 뒤 9권으로 묶여 나왔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인 천봉삼을 원래 구상대로 죽게 하는 대신 살려둠으로써 여지를 남겨두었는데, 그로부터 30년 만인 2013년 4월 연재를 재개해 5개월간의 연재로 마지막 10권을 내놓은 것이다. [관련 기사 : 소설 ‘객주’ 30년 만에 마지막 권 완성…농익은 필치 그대로]
작가는 지금 진보면에 거주하면서 가끔 문학관 집필실에 나와서 관람객들을 만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의성에 사는 벗이 여기 와서 그를 만나 보았다던가. 한 시간쯤 머물면서 문학관을 둘러보았는데 생존 작가의 문학관이라 작가의 도움을 받아선지 천편일률적인 여느 문학관과 달리 전시 내용이 풍부하고 알찼다.
늦었지만, 동네 도서관에 확인해 보고 <객주> 제10권을 빌려서 다시 읽을까 싶다. 10권을 읽으면서 앞의 9권의 내용을 환기해 보고, 한때 내가 시뻐 여긴 노 작가의 역량을 새롭게 확인해 볼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2023. 6.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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