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톺아보기 ⑳] 구미시 인의동 모원당(慕遠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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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겠다고 고향 인근인 구미로 전입한 게 2012년이다. 퇴직은 뜻밖의 걸림돌 때문에 미루어져 4년 뒤에야 간신히 할 수 있었다. 퇴직하면 시간이 온전히 자기 것인 줄 알았지만, 인동의 대종가와 여헌의 종택인 남산고택(南山古宅)을 찾은 건 퇴직 4년 뒤인 2020년 9월이 되어서였다.
인동장씨 대종가 ‘옥산고택(玉山古宅)’
인동동의 인동장씨 대종가 옥산고택(玉山古宅)은 초등학교 때 선친을 따라 들렀던 고색창연한 고가가 아니라 2000년에 새로 지은 집이었다. 시조인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금용(金用)의 유허지로 고려 초에 창건한 뒤 그 집에서 천여 년 동안 종손이 대대로 세거해 왔다는데 종손이 천여 년을 한 집을 지켜온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라고 한다.
옥산고택은 조선 초기까지 여러 번 중수를 거쳤으나 임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인조 때 중건했고, 이후 몇 차례 중건하다가 1999년 공사에 들어가 2000년에 새 건물을 준공했다. 대지가 488평, 건물이 27간(110평)이고 가묘(家廟)를 복원해 유림의 공의로,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인물로 김집(1574~1656)이 엮은 <두문동 72현록(賢錄)>에 오른 인물 충정공(忠貞公) 안세(安世)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신 대종가로 지금에 이르렀다.
한 항렬 밑 37대인 종손과 대문간에 서서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외지에 나가 있다가 귀향해 종가를 지키고 있다는 종손은 집안 관리의 어려움을 말했고, 나는 그게 내 이해의 바깥에 있음에도 이해한다고 답했다. 종가를 지키는 일은 봉제사(奉祭祀)만으로도 겨운데 접빈객(接賓客)은 좀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여헌이 15년 유랑 끝에 돌아온 옛터 모원당(慕遠堂)
남산 종중(宗中)의 종택 모원당(慕遠堂)은 근처 인의동 642-2번지, 2000년에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고가다. 모원당은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이 임진왜란 이후에 살던 집으로 청천당(聽天堂)과 사당인 여헌 묘우(廟宇)로 구성된다. <여헌집>의 ‘모원당기’에 따르면 모원당은 임진왜란 뒤에 집이 불타 선생이 기거할 곳이 없게 되자 선조 39년(1606)에 제자 장경우를 비롯한 제자와 친척이 함께 지었다. ‘모원(慕遠)’은 ‘선조를 공경하고 소중히 여긴다’라는 뜻이다.
여헌은 1592년 4월에 피란을 가서 난리가 평정되어도 집이 불타 돌아올 수가 없어서 15년 동안이나 유랑생활을 해야 하였다. 그러다가 만회당(晩悔堂)이 주동이 되어 모원당을 짓자, 비로소 옛터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모원당은 2칸 방 하나, 2칸 마루, 마루 옆에 좁은 방이 있는 조그마한 집이었지만, 여헌은 비로소 안정된 거처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일찍이 서애 류성룡(1542~1607)은 여헌을 일컬어 “도량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으며, 그를 대하면 사람이 심취하게 하니 후일 세상에 이름을 떨칠 위대한 유학자가 되어 사도(斯道)의 맹주가 될 사람”이라며 극찬했다. 서애가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을 여헌에게 보내 수학하게 한 것도 이 시기로 보인다.
뒷날 모원당은 새로 지었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1889년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현재의 모원당은 100년이 지난 1983년에 집을 완전히 헐고 새 재목으로 지은 집이다. 기와는 당시의 현감이 관아에 쓰고 남은 것을 보내주어 지붕에 얹었다고 한다.
모원당 건축을 주도한 만회당 장경우(1581~1656)는 평생 스승을 보좌하였으며 학파로서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하여 여헌의 묘우(廟宇 사당)에 단독으로 배향할 수 있는 고제(高弟 : 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라 하여 동락서원에 배향되었다. <여헌문집>을 간행하고 저서로 <만회당집> 4권을 남겼다.
남산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남산고택(南山古宅)’ 현판을 단 현대식으로 개조된 9칸짜리 건물이 고택의 몸채다. 오른쪽 3단의 축대 위에 효종 1년(1650)에 세운 여헌의 묘우가 있고, 모원당은 몸채 앞 왼쪽에 동향으로 서 있다. 모원당은 한 ‘일(一)’ 자형으로 지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홑처마 집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건물이다.
모원당과 청천당, 그리고 회화나무
문간채 앞으로 돌아들면, 모원당 건물과 기역 자를 이루는 3칸 집이 청천당(聽天堂)이다. 여헌의 종질로 당숙인 여헌에게 출계(出系 : 양자로 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한 청천당 장응일(1599~1676)이 선조 40년(1607)에 지은 집인데 가까운 곳에서 어버이를 정성을 다하여 받들기 편하였다고 한다.
청천당은 1646년 헌납(사간원 정5품 관직)으로 있을 때, 이미 사사(賜死)의 명이 내려진 소현세자빈 강씨의 구명 상소를 9일 동안 계속하여 올려 ‘청천백일(靑天白日) 장헌납’이라 불렸다. 1649년에는 김경록, 송준길 등과 함께 훈신 김자점(金自點)의 탐욕, 방자함을 탄핵하기도 한, 소신을 굽히지 않는 대쪽 같은 관료였다.
청천당은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1칸 방을 들인 작고 소박한 집이다. 지금 건물은 지을 때 중수 상량문을 쓴 장석룡(1823~1907)의 연보에 따르면 고종 39년(1902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천당은 훼철 전에는 5칸 집이었는데 관에서 뜯어가 60여 년이나 보관하면서 재목이 상하고 잃어버린 것도 있었다. 남은 재목으로 맞추어 복원하다 보니 지금과 같이 3칸 집이 되었다고 한다.
모원당과 청천당 앞의 작은 뜰에 이 집의 상징처럼 높이 16m, 가슴높이 둘레도 2m 가까운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모원당을 지은 뒤 조상을 추모하는 뜻으로 여헌이 심었다는 나무의 나이는 400년을 넘었다. 동락서원 앞에 은행나무를 심은 때와 비슷한 시기였을지 모른다.
장현광이 스스로 ‘여헌(旅軒)’이란 호를 쓴 것은 임진왜란 뒤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던 44살 때였다. 그는 ‘여헌설(旅軒說)’을 지어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우주 사이의 나그네이며, 나그네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을 밝혔다. 여헌은 ‘나그네의 집’이란 뜻인데 그는 그 뜻이 자기 삶에 한정되지 않고 천지간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나그네라고 인식했다.
여헌의 성리학은 “인간과 자연, 우주를 아우르는 방대한 학문체계 정립”하여 “치밀한 역학(易學) 이론과 특징적인 경위설(經緯說) 제시 조선 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학문적 성취”(여헌기념관)를 이루었다. 그러한 철학의 집대성은 바로 이러한 세계 인식, 겸허한 성찰적 자아에 힘입은 것임을 말할 필요도 없겠다.
2020. 11.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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