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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125

잭 런던, <강철군화>에 가려진 탁월한 단편들 [서평] 잭 런던 단편집 잭 런던 소설집 (한겨레출판, 2012)를 완독했다. 책의 속표지에는 ‘130125’라는 날짜 아래 내 서명이 있다. 금년 1월 25일에 구입했다는 표시니 결국 이 책은, 산 지 반년이 넘어서야 온전히 ‘주인의 책’이 된 셈이다. 요즘 내 책읽기의 모양새가 그렇다. 사놓고도 하염없이 묵히다가 끝내는 서가 한쪽에 처박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내가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을 만난 건 90년대 초반이다. 장편소설 (한울, 1990)[관련 글 : 강철 군화, 독점 자본주의의 미래]를 읽고 나는 이 작가에 잔뜩 매료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다이제스트 판으로 읽은 (원제 야성의 부름)을 쓴 아동문학 작가가 독점 자본주의의 미래를 그처럼 흥미진진하고 극적으로 .. 2019. 9. 5.
허균, 자유와 혁명을 꿈꾼 로맨티시스트의 초상 [서평] 허경진 지음 (돌베개, 2004) 허균을 처음 만난 건 여느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홍길동전』을 배우면서였다. 세상을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 또는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이해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화 형식으로 읽은 홍길동의 초인적 힘과 종횡무진의 활약상, ‘활빈도’가 주는 낭만적 매력 따위에 푹 빠지긴 했지만, 지은이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문학사적 평가를 외기에 바빠서 역시 저자를 의식하기는 쉽지 않았다. 허균(1569-1618)을 우리 중세를 살다 간 한 사람의 걸출한 작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대학에서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우리 문학을 가르치면서 비로소 홍길동이 적서차별이라는 중세적 세계관과 모순에 맞서 싸웠던.. 2019. 9. 1.
‘고엽’과 ‘바르바라’, 프레베르의 시편과 이브 몽탕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ert, 1900~1977)의 시편을 읽으며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ert, 1900~1977)를 만난 것은 1975년 민음사가 낸 ‘세계시인선’ 25 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내 서가에 꽂힌 은 1985년에 나온 제4판이다. 이미 누렇게 바랜 이 책의 정가는 1천 원이다. 물론 그 시절의 화폐 가치의 오늘의 그것으로 단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책값 앞에서 나는 참으로 아련해진다. ‘고엽(枯葉)’의 시와 영상 보기 ‘고엽’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 시집 에 실린 시편 가운데 나는 ‘바르바라(Barbara)’를 즐겨 읽었다. 나는 그 시를 내 잡기장에 옮겨 적었고, 그 뒤로 두고두고 그 구절들을 되뇌곤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내가 시집.. 2019. 8. 30.
삶, 긴 강을 흐르는 물 [서평] 강석경 장편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 작가 강석경이 중편 「숲속의 방」을 발표한 것은 1985년이고 내가 그 작품을 읽은 것은 그 이듬해쯤일 듯하다. 그때, 나는 3년 차 햇병아리 교사로 경주 인근의 한 여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경주에 나가서 오랜 탐색 끝에 산, 한 꾸러미의 책 가운데 초록색 표지의 『숲속의 방』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운동권 여학생의 방황과 자살’을 다룬 소설이라는 기억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데, 당시의 내 느낌은 ‘배부른 중산층의 관념 놀이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깜깜했던 80년대 전반기에 학교를 다녔던지라 운동권의 정서 따위에 무지했던 탓도 있지만, 중산층 출신이라고 지레 단정해 버린 작가 강석경에 대한 선입견도 작용했지 않았나 싶다. 지.. 2019. 8. 21.
그래, ‘희망은 길이다’ [서평] 루쉰 아포리즘 『희망은 길이다』 루쉰 아포리즘 『희망은 길이다』는 루쉰 연구자 이욱연 교수가 기왕의 연구를 통해 간직해 왔던 루쉰의 저작 중에서 밑줄을 쳐 두었던 문장들을 모으고, 판화가 이철수가 판화로 꾸민 책이다. 이철수의 힘찬 판화 글씨체 제목과 모루 위에 올라선 노동자의 모습을 새긴 판화로 구성된, 코팅하지 않은 미색 하드커버 표지는 일종의 설렘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아포리즘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로 정의된다. 아포리즘 하면 대개 칼릴 지브란의 시, 크리슈나무르티 류의 명상 철학자들의 잠언집을 떠올리기 쉽지만, 루쉰의 이 책은 분명코 달라 보인다. 흔히들 잠언집 따위에서 나타나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비유나 예언적 글귀들이 갖는 도그마에서 이 책은.. 2019. 8. 20.
‘고급 거시기’ 거부한 시인 최영미, 왜 출판사 차렸나 [서평] 최영미 여섯 번째 시집 시인 최영미가 ‘창비시선’으로 를 펴낸 것은 1994년 3월이었다. 두 달 뒤에 내가 산 책은 8쇄였는데 그의 시집은 2016년까지 52쇄를 찍었다고 한다. ‘초판 기천 부’도 다 팔지 못한다는 시집을 52쇄까지 찍었으니, 그가 주목받은 시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가 첫 시집을 낸 1994년 3월은 내가 4년 반 동안의 해직 생활을 거쳐 경북 북부의 시골 학교에 복직한 때였다. 이태 남짓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시기여서 그랬던지, 를 제대로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2019. 8. 19.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사설시조 몇 수 읽기 뒤늦게 철이 든다고 해야 하나. 이제 내가 가르치는 우리말과 우리글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꼼짝없는 ‘늦깎이’인 셈이다. 20년이 넘도록 가르쳐 온 말글이었으나 정작 내가 그것을 마음과 문리(文理)로 깨치게 된 것은 몇 해 전부터인 듯하다. 현대시 몇 편을 가르친다고 열몇 시간을 쓰면서 아는 것 모르는 것 죄다 떠벌리며 거품을 물던 초임 교사 시절을 나는 쓴웃음 없이 떠올릴 수 없다. 그때 내 앞에서 국어 교과서를 폈던, 이제 불혹을 넘긴 중년 부인이 된 제자들을 만나면 나는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때 내가 뭘 알고 있는 것 같았니? 정말 그때 내가 시를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 갑갑하고 따분해서 읽지 못하던 고전문학 관련 서적을 눅진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변화 .. 2019. 8. 19.
어차피 삶은 ‘신파’다 [서평] 이균영 소설집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문학적 취향이란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설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가 좋다거나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작품의 지향점을 중심으로 한 판단이어야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특정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오(好惡)는 그와는 다른 변수에 의한 경우도 흔하다. 딸애는 단지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특정배우를 경멸하곤 한다. 이 경우, 그 호오는 배우에 대한 평가라는 합리적 잣대와는 무관한 ‘정서적’이고 ‘정치적’ 선택일 뿐이다. 제목도 잘 기억되지 않는 단편 한 편을 읽고 나서 나는 그의 ‘정서적 지향’(요즘 쓰는 말로 하자면 ‘코드’가 되겠다.)이 나와.. 2019. 8. 18.
『제국의 위안부』, 일본제국 논리로 ‘위안부’ 문제를 재해석했다 [서평] 정영환의 박유하 비판,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8월 14일은 두 번째로 맞이하는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임을 처음으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2013년부터 정대협을 중심으로 시행해 온 이날은 2017년 12월 12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2018년부터 정부 지정 국가 기념일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두 번째 기념일을 앞두고 난감하고 민망한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이후 30년 가까이 할머니들의 당당하고 용기 있는 행동 앞에서 옷깃을 여미면서 우리는 우리 역사의 고통을 함께 공감해 왔다.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 앞에서 시민들 중심의 공동.. 2019. 8. 13.
<강철군화(The Iron Heel)>, 독점 자본주의의 미래 [서평] 잭 런던의 (한울, 1990) 잭 런던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때였다. 그가 쓴 여러 편의 알래스카를 무대로 한 동물소설 중의 하나였던 (1903)을 통해서였는데, 이 작품은 주인공 개가 알래스카로 팔려가 썰매를 끌게 되면서, 거기서 약육강식의 세계와 비정한 인간의 혹사를 겪게 되고, 주인이 죽은 뒤 자기 내부의 야성의 부르짖음에 따라 결국은 북극의 이리떼에게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작가 따위를 의식하고 읽은 책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문학 작품이 개인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잘 의식하지 못하니 말이다. 를 읽고 나서야 그 시절에 읽었던 얘기가 그의 작품이라는 걸 소급해 이해한 것이다. 사회과학 전문의 도서출판 ‘한울’에서 의 초판이 나온 게 1989년 7월인데, 내게 있는 책은 90년.. 2019. 8. 9.
파블로 네루다 읽기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요즘,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읽고 있다. 아마 1989년께 같은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최근에 산, 이 민음사 판은 2000년에 발행한 초판의 11쇄다. 내 기억이 엉터리인가 하여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역시 그렇다. 1989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이 시집을 냈다. 이 책은 아마 새로운 편집본인 모양이다. 한심하게도 지금 생각나는 것은 단지 ‘읽었다는 기억’과 아주 폼나는 ‘제목’뿐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내게 ‘시인’보다는 ‘칠레’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살바도르 아옌데’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어두운 현대사를 이어지는 열쇳말로 기억되는.. 2019. 8. 1.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서평] 박태균 지음, 『한국전쟁』 박태균 교수가 쓴 을 읽은 것은 지난해 이맘때다. 커밍스의 을 날림으로 읽은 이래 십수 년 만에 나는 한국전쟁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지은이의 말처럼 ‘한국전쟁을 쉽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면서 전체적으로 그것의 전모를 정리해 준다.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넘어 사실적으로 바라본 한국전쟁 이 책은 놀랍게도 한국 현대사 전공자가 일반인을 위해 정리한 최초(!)의 한국전쟁 관련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민족적 삶의 질곡으로 온존해 온 한국전쟁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와 접근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한국전쟁은 전쟁을 몸소 겪었던 체험 세대는 물론이거니와 전쟁을 겪지 못했던 미체험 세.. 2019.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