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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어차피 삶은 ‘신파’다

by 낮달2018 2019.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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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균영 소설집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 민음사(1997)

문학적 취향이란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설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가 좋다거나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가치관, 작품의 지향점을 중심으로 한 판단이어야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특정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오(好惡)는 그와는 다른 변수에 의한 경우도 흔하다.

 

딸애는 단지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특정배우를 경멸하곤 한다. 이 경우, 그 호오는 배우에 대한 평가라는 합리적 잣대와는 무관한 ‘정서적’이고 ‘정치적’ 선택일 뿐이다.

 

▲ 고 이균영(1951~1996)

제목도 잘 기억되지 않는 단편 한 편을 읽고 나서 나는 그의 ‘정서적 지향’(요즘 쓰는 말로 하자면 ‘코드’가 되겠다.)이 나와 매우 가깝다고 느꼈고,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게 되면서 그것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 정서적 지향을 몇 줄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 ‘바람난 가족’을 보고 임상수 감독의 코드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 바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코드’란 ‘사물을 바라보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작가 이균영은 중편 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신간회 연구’라는 논문으로 단재학술상을 탄 진보 역사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1996년, 45세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 김소진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듬해인 1997년이다. 이 젊은 작가들의 이른 죽음은 그 자신과 가족뿐 아니라, 이 나라 문단에도 불운한 일이다.

▲ 1984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서가의 이 책은 누렇게 바랬다.

내가 가진 이균영의 소설집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는 1997년 1판 1쇄다. 작가의 유고집인 셈이다. 인터넷에서 조회해 보니, 이미 절판된 책이다. 작가도 가고 책도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도 서가의 눈에 잘 띄는 부분에 꽂힌 그 책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는 31년 7개월 동안 92만 킬로미터를 운행한 기관사 박석우의 기구한 사랑과 운명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의 고독한 삶을 아로새긴 건 두 사람의 여인이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첫사랑 송옥순. 그녀는 계층상승과 새로운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욕망의 화신이다. 박석우와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 여자는 결국 아들 하나를 남기고 상류사회로 떠나 버린다.

 

딸 인혜를 낳고, 옥순이 낳은 성호를 데려다 키우는 착하고 헌신적인 여인 조아진은 탄광촌의 작부 출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7년 만에 숨을 거두고 죽어서야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 석우는 그녀를 영동선이 지나가는 고향 솔티재 언덕에 묻는다. 죽어서야 집에 들어선 그녀의 관을 향해 시어머니는 말한다.

 

“아가!나하고는 연분이 맞지 않았지만 잘 살았다. 고맙구나, 불쌍쿠나, 훌훌 털고 가거라.”

 

철길은 대체 무엇인가. 송옥순에게 그것은 새로운 ‘욕망’과 ‘세상’에 이어지는 통로이다. 그러나 반생을 철길에서 보낸 박석우에게는 그것은 미혹이 아니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도 없으며, 삶이란 시간 속에서 빛나는 무엇일 뿐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고 만나고 헤어졌지만 그들은 그곳에 있고 박석우 씨는 여기에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고 시간이 그렇다. 흐르는 것은 시간이었다. 멀고 가까운 불빛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지나간다. 그 자리에서 빛나는 것……. 별, 어린 시절의 고향, 청춘, 아내……. 가난과 고통스럽던 사랑마저 아름다워라. (20쪽)

 

어느 일간지 문학 담당 기자의 평가대로 ‘이 소설은 신파에 가깝다.’ 옥순과 회한으로 남은 사랑, 아진의 헌신적 사랑과 죽음, 그의 고독한 생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로 깨어난 그의 하루가 집 나간 아들 성호가 낳은 갓난 손자의 귀가로 마무리되는 구조는 ‘센티멘탈’하거나 ‘멜랑콜리’하다.

▲ 중앙선 경북 군위 화본역. 철길은 언제나 그 소실점을 통해 '여기 있음'과  '떠남'의 정서를 환기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치미를 떼는 객관적 기술보다 이슬비처럼 가만가만 다가와 중얼대는 진술들, 이를테면 “삶은 쓸쓸하다.”거나 어둠 속의 불빛을 향한 독백, “그래, 안녕하신가? 나는 그저 그렇다. 별일 없다. 우리 인생의 일상이 그렇지.” 따위에 서려 있는 ‘정직’과 ‘진정성’에 매료되었다.

 

인생은 기실, 신파극보다 훨씬 더 신파적일지 모른다. 다만 그런 신파 같은 삶을 소설이 다루지 않을 뿐이다. 삶과 인간, 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다기한 얼개에 합목적성이나 합리성, 논리적 일관성 따위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모순과 모순의 변증법적 재현일지도 모른다.

 

선로에서 불빛이 희게 부서지고 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이 어두운 하늘의 높이를 짐작하게 하였다. 나뭇잎들 사이에서 불빛이 잘게 부서져 빛을 내고 있다. 하나의 잎이 하나의 불빛을 부수고, 하나의 불빛은 수십 불빛을 이루고, 다섯 개의 나뭇잎에 다섯 개의 불빛을 부수고, 다섯 불빛은 수백 불빛을 이루고…….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 (40쪽)

 

2005. 12. 8. 낮달

 


*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공연히 철 지난 책들을 꺼내 듬성듬성 되풀이해 읽었고, 그러다 보니 몇 편의 글을 괴발개발 썼다. 흥겨워서가 아니라, 무슨 숙제처럼, 오래 묵은 책을 읽고, 성급하게 써 내려간 글을 읽는데 공연히 가슴이 저렸다. 10년 전의, 또는 5년 전의 감동도 분노도 없는, 이 고인 일상, 그 일상에 짓눌린 자신의 모습을 타인처럼 바라보면서.

 

윗글을 쓴 게 이태 전쯤이다. 이균영 작가 생각이 다시 났다. 늘 그렇듯 본질과 실체에 이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난삽한 글인데도 다시 읽으니까 문득 마음이 적막해진다. 겨울이 오고 있는 것이다.

 

2007.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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