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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125

‘아름다운 우리 말글 맵시’, 위당 정인보를 생각한다 국학자 위당 정인보가 쓴 아름다운 우리 ‘말글 맵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을 처음 만난 건 개천절이나 광복절의 노랫말을 통해서였다. 그는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의 국경일 노래의 가사를 썼다. 위당은 정부 수립 후 국가 사정(司正)을 맡은 감찰위원장을 지냈는데 이들 노랫말을 지은 것은 이 시기였을지 모르겠다. 위당이 다듬은 아름다운 우리 말글의 맵시 위당의 노랫말은 좀 다르다. 그가 한말의 대학자 이건방(李建芳)의 제자로 10대 시절부터 문명을 날렸던 한학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쓴 아름답고 전아한 의고체(擬古體)의 한글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듯하다. 그가 쓴 노랫말에는 우리 고유어의 단정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한강.. 2019. 6. 9.
공감과 연대, ‘비봉산 화전놀이’로의 초대 [서평] 박정애 장편소설 장편 서사 가사인 ‘덴동어미 화전가(花煎歌)’의 주인공인 ‘덴동어미’가 새롭게 태어났다. 20세기 초엽 화전놀이 현장에서 구연(口演)된 한 여성의 일생을 새롭게 한 땀 한 땀 새긴 이는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인 박정애다. ‘새롭게 태어났다’고 했지만, 기실 작가의 장편소설 (한겨레출판)은 가사로 전해져 온 덴동어미의 삶을 ‘복원’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가사 관련 글 : 기구하여라 ‘덴동 어미’, 그 운명을 넘었네] 가사 ‘덴동어미 화전가’의 소설화 “비봉산에 두견화 꽃 올해도 만발하니 화전 가세 화전 가세 꽃 지기 전에 화전 가세 사람이 살면 백 년을 살며 올해를 놓치면 명년엔 어떠할라” ‘덴동 어미 화전가’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어느 봄날, 인근 비봉산에 오른 한 .. 2019. 5. 23.
“추억은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온다” [서평] 신영복의 쇠귀 신영복 선생의 을 오열하며 읽은 것은 지난 1월 하순께다. 부음을 듣고 동료들과 선생을 추모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그랬다. 선생이 쓴 책은 모두 갖고 있는데 왠지 이 빠졌다고. 다음날 후배 여교사가 집에 있던 책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나는 이 어떤 이야기인지 전혀 몰랐다. 단지 나는 치열하게 살아온 선생의 이력과 겹치는 무엇일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1960년대 말에 선생을 이 사회와 격리해 버린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의 어떤 부분과 이어지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말이다. 청년과 어린이들의 ‘교유’ 두 해 나는 ‘청구’를 ‘靑丘’로 이해한 다음, 그게 선생이 몸담았던 어떤 조직의 이름이라고 여겼다. 이런 추리는 선생이 재판을 받는 과정의 검찰과 군법회의에서도 비슷한 형식으로 .. 2019. 5. 13.
허형식과 박정희, 극단으로 갈린 둘의 선택 [서평] 박도 실록 소설 ‘경상북도 구미’하면 ‘박정희(1917~1979)’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시내 상모동에서 태어나서 만주군 장교를 거쳐 해방 뒤 쿠데타로 집권한 그 덕분에 오늘의 구미가 만들어진 건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산군 구미면’은 그가 이 고을에 공업단지를 유치하면서 ‘선산읍’을 거느린 인구 40만이 넘는 ‘구미시’가 되었다. 그는 개발독재를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했고,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함으로써 구국의 지도자로 기려진다. 18년 독재 끝에 비명에 갔지만 그는 지역에서 가히 ‘반신반인’으로까지 숭앙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성역화된 상모동 생가 부근에 세운 5m 크기의 청동상으로 살아 있다. 박정희의 상모동, 혹은 왕산.. 2019. 5. 12.
죽음으로 유예한 이별-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서평]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Lettre a D.: Histoire D’un Amour)』(2006) 불혹을 넘기면서 문득 나는 ‘영원한 사랑’ 따위란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이미지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망각’이란 꽤 쓸 만한 물건이어서 인간을 사랑의 상실로 인한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죽도록’ 한 ‘목숨 바친’ 사랑도 그 이별을 받아들이면 잊어버리는 데는 고작 몇 해의 시간으로도 족한 것이다. 내 청년기의 끝에 세상을 떠났던 한 친구의 죽음과 그 이후를 바라보면서 나는 우정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음이란 참으로 얼마나 쌀쌀맞고 냉정한 것인가. 불타는 애정도, 얼음장처럼 식는 사랑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 2019. 5. 12.
기억 속 구멍가게, 할 말을 잃게 하는 풍경 [서평] 이미경의 펜화 수상집 ‘구멍가게’라면 미국 작가 폴 빌라드(Paul Villard)의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를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유년 시절 기억이 투영된 아름다운 수필 ‘이해의 선물’에 나오는 이 가게는 한 어린이가 만나는 세상이면서 어른의 이해와 관용이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라는 걸 깨우쳐 주는 공간이다(관련 기사 : 이해의 선물). ‘교환’의 개념을 이해했으되 그걸 매개하는 ‘돈’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던 한 어린이에게 베푸는 위그든 씨의 넉넉한 마음이 선사해 준 사탕 가게의 추억은 작가에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그가 물려준 유산은 작가의 삶의 방식으로 이어졌다. 사탕 가게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유년 시절의 구멍가게를 기억한다. 그곳은 처음으로 우리가 세상과 ‘거래’하던 공간.. 2019. 5. 7.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백만 부, 난쟁이 일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조세희의 연작소설집 100만 부 돌파 앞두었지만 조세희의 연작소설집 (이하 “난쏘공”)이 100만 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난쏘공”은 8월 15일 227쇄로 99만9800부까지를 찍었으며 다음 주 중에 100만 부 기념쇄로 228쇄를 찍는다는 것인데, 이는 작품의 초판 1쇄가 나온 지 29년 만이라 한다. “난쏘공”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78년 6월 5일이었다고 한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이 작품집을 내가 읽은 것은 인천 부평의 군부대에서였다. 출판된 날짜를 기준으로 역산해 보면 아마 그해 가을이었을 성싶다. 새가 그려진 노란 빛 표지와 국판보다 작으면서도 좀 길쭉한 판형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세로쓰기였던 그 책이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군대란 책 따위를 사물이라고 챙겨 .. 2019. 4. 29.
‘한계령을 위한 연가’, ‘고립’에 대한 뜨거운 욕망 문정희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지난해 7월에 시집 두 권을 샀다. 2007년 6월에 고정희 유고시집 를 구매했으니 꼭 1년 만이다. 명색이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내가 이러하니 이 땅 시인들의 외로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두 권 다 개인 시집이 아니라 문태준 시인이 고르고 해설을 붙여 엮은 시집이다. 근년에 ‘뜨고 있는’ 시인은 시를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던 걸까. 문 시인의 시는 ‘가재미’밖에 읽지 않았으면서 그가 엮은 시집을 선뜻 산 것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을 터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집을 한 반년쯤 묵혀 두었다. 책 속표지에 휘갈겨 쓴 구입날짜(20080725)와 서명이 민망하다. 비좁은 서가 위에 위태하게 얹힌 예의 책을 꺼내 무심하게 넘겨보기 시작한 게 오늘이다. 읽어내려가.. 2019. 4. 23.
32년 만의 신원(伸寃), 인혁당 희생자들의 <푸른 혼> 김원일 연작소설 김원일의 소설을 처음 만난 건 고교 졸업 후, 장편 와 어느 문고판 단편집을 통해서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지라 ‘분단’을 다루고 있던 그의 장편보다 ‘파라암’과 같은, 매우 정교한 묘사와 탁월한 완성도의 단편들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한 여인의 파란 많은 삶을 묘사한, ‘썩어가면서 더욱 부드러워지는 살의 마비’라는 표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0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마음의 감옥"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삶과 그 진정성’을 성찰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에 감동과 전율을 동시에 느꼈다. 이 소설은 빈민을 위해 살다간 아우의 순교자적 죽음을 계기로 핍박받는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에 동참하게 되는, 방관자적 중산층 형의 인식 전환을 다루고 있는 중편이다. 마음의 감옥을 읽으면서 .. 2019. 4. 5.
박기정의 만화 <도전자>, 그 서사의 미학 만화 이야기-박기정의 만화라면 할 말이 적지 않다. 시골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만화방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구에서 일하던 작은누나가 어느 날 누군가의 가게를 인수했다면서 수천 권의 만화책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시골 초등학교의 가난한 도서실 책들을 거지반 읽어치운 책벌레였던 나는 그러고 한 몇 달을 만화책에 푹 파묻혀 지냈다. 시골 아이를 만화의 세계로 안내해 준 빛나는 작가들의 이름은 박기정, 김종래, 이근철, 산호, 손의성 등이었다. 특히 박기정의 만화 와 의 감동을 잊을 수 없는데 나는 박기정의 만화가 기본적으로 소설의 미학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화와 멀어지게 된 것은 중학교부터 무협 소설에 빠지게 되면서부터다. 내 상상력은 그림을 제거한 텍.. 2019. 3. 30.
이미륵 장편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 장편소설 (독일어) 인터넷을 뒤적이다 지난 9월 초순에 김광규 시인이 제5회 ‘이미륵상’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이미륵(1899~1950),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한 작가를 떠올렸다. 나는 서가를 뒤적여 그의 소설 를 끄집어냈다. 범우사에서 1979년에 출판한 세로쓰기 본이다. 얼추 30년이 되어가면서 책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초판 나온 지 6년 후에 나온 중판(重版)인데, 값은 약소하게 1200원이다. 번역은 전혜린. 그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1965년이니 이 책은 번역자 사후에 다시 출판된 책인 셈이다. 는 독일에서 독일어로 글을 쓴 작가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가 ‘일제의 침략과 신구문화의 교체가 시작되던 자신의 소년 시대부터 독일에 도착하기까지’의 삶을 회상한 것이다. 1.. 2019. 3. 4.
뉴라이트와 조중동에 프랑스를 가르칩니다 [서평] 이용우 지음 (역사비평사, 2008) 새 정부 들면서 시작된 역사 인식의 퇴행은 예순세 돌 광복절을 지나면서 그 절정에 이른 듯하다.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다(3·1절 기념사)”며 “맨날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뒤 전개된 여러 상황은 별로 ‘미래지향적 관계’답지 못해 보인다.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적어도 새 정부의 대일 역사 인식은 여전하다는 걸 이름만 광복절이지 사실은 ‘건국절’로 치러진 8·15 행사가 증명해 주었다. 1948년 8월 15일의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미화하고 싶어 하는 뉴라이트와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했지만, 정부의 .. 2019.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