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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125

고정희, 우리 모두에게 이미 ‘여백’이 된 고정희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좋은 시인이나 작가를 제때 알아보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부채감은 꽤 무겁다. 그것은 성실한 독자의 의무를 회피해 버린 듯한 열패감을 환기해 주는 까닭이다. 제때 읽지 못했던 시인 작가로 떠오르는 이는 고정희 시인과 작가 공선옥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훌륭한 시인·작가는 수없이 많을 터이다. 요컨대 내가 말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공선옥은 내게 그를 너무 늦게 읽은 걸 뉘우치게 한 작가다. 2003년에 그의 소설집 『멋진 한세상』을 읽고 나서 나는 책 속표지에다 그렇게 썼다. 너무 늦었다……. 나는 삶을 바라보는 공선옥의 눈길과 태도에 전율했다. 나는 그이의 삶과 그가 그리는 삶이 어떤 모순도 없이 겹.. 2020. 6. 1.
슬픔’과 ‘분노’를 넘어 ‘여성성’으로 황석영 장편소설 황석영의 소설을 읽는 것은 기쁨이면서 고통이다. 마치 잘 벼루어진 끌이나 대패로 미끈하게 다듬어 놓은 얼개와 짜임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라면, 그것들이 냉혹할 만큼 사실적으로 저며내는 이 땅의 사람 살이의 모습들은 둔감해진 정수리를 날카롭게 베는 듯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70년대 이후 내내 진보적 문학 진영을 짓눌렀던 화두였던 ‘리얼리즘’을 황석영만큼 건조하게 천착해 온 작가가 또 있을까. 파란과 격동의 20세기 말의 문학적 연대기인 을 거쳐 이데올로기의 광기와 그 덫에 걸린 한 시대를 조감한 을 거쳐 그는 이제 고대사회의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제의적 공간과 불교적 환생의 세계에 침잠해 있던 심청을 냉혹한 근대화 시대의 저잣거리로 끌어낸 듯하다. 이 소설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본격화와 .. 2020. 5. 25.
50대 중반에 첫 시집, 조성순을 지지함 [서평] 조성순 첫 시집 며칠 전, 학교로 우송되어 온 시집 한 권을 받았다. 조성순 시집 (2013년, 작은숲). 그는 내 고등학교 후배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교 문예 동아리 ‘태동기(胎動期)’의 2년 후배, 1974년 그가 입학해 문예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나는 3학년이었다. 고교 문예 동아리 후배 시집을 내다 글쎄, 선후배 간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후배가 별로 없는 것은 세월이 꽤 흐른 탓일 터이다. 아, 시집 로 유명해진 서정윤이 그의 동기다. 별 교유가 없었어도 나는 그가 예천 촌놈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학년 초였을 게다. 우리 학교만 있었던 동아리 교실에서임은 분명하다. ‘문예실’이라는 그 방은 늘 일상적 잡담과 시건방진 요설, 문학적 일탈을 모의하곤 하던 우리들의 .. 2020. 5. 24.
『청구영언』의 ‘능청능청 부르는 노래’들 한글박물관 전시회 도상(圖上) 관람 퇴직하고 나서 시간이 여유로워지자 유독 전시회 소식에 눈길이 자주 머문다. 얼마 전 대구박물관의 특별전시회에 다녀온 것도 그래서다. [관련 글 : ‘고대마을 시지(時至)’, 수천 년 잠에서 깨어나다] 그러나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 인근 지역이 아니라 서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까운 데는 가볍게 다녀올 수 있겠지만 서울까지는 아무래도 ‘천릿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근 김천구미역에서 케이티엑스(KTX)를 타면 1시간 반 뒤에 서울역에 닿는다. 그러나 이 예사롭지 않은 나들이는 그리 간단치 않다. 오가는 찻삯만 십만 원 가까이 드는 이 나들이를 쉽사리 나서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대신에 나는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나 누리집을 드나들며 전시회 ‘맛보기’로 만족한다. 서.. 2020. 5. 14.
이 그림 한 장이 보여주는 ‘역사’의 결정적 오류 [서평] 로잘린드 마일스 ‘세계 여성의 역사’... ‘지워진 절반’을 복원하다 “역사적 기록이 보여주는 대로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도 여성들이 극도의 성폭력, 즉 그들의 육체는 오직 남자와 관계할 때만, 남자의 쾌락을 위해서만, 자식을 낳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 제2부 여성의 몰락(204쪽) 중에서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일명 ‘n번방 사건’)은 ‘인터넷 및 통신 기술’(ICT)을 활용한 성범죄의 급속한 진화와 함께 성범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둔감을 날것으로 드러내 주었다. 이 사건 주범들의 왜곡된 성 의식은 로잘린드 마일스(Rosalind Miles)가 쓴 의 기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굴절된 성 의식이 어찌 그들만의 것.. 2020. 4. 7.
에베레스트- ‘등반의 상업화’가 부른 ‘탐욕과 협잡’ [서평] 마이클 코더스의 누구나 산에 오른다. 레저조차 마치 전쟁 치르듯 즐기는 성미 급한 한국인들치고 맞춤한 등산복이나 등산화 등의 장비를 갖추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주말마다 유명 산은 물론이거니와 지방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에도 원색의 등산복으로 무장하고 전국에서 몰려든 ‘산악회원’들로 차고 넘친다. 편한 등산복 바지는 사람들의 일상복이 된 듯하고 산 아닌 관광지마다 등산복과 등산화를 갖추어 입은 사람들로 붐빈다. 레저(등산)의 일반화·보편화라고 할 만한 이런 현상에서는 마치 그런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신중산층’에서 낙오할지 모른다는 조바심마저 읽힌다. 다시 떠오른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 의혹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높은 산도 곧잘 타는 ‘세미-프로’(?)들이라도 본격 ‘등반’과는 거리가.. 2020. 3. 14.
새해 아침, ‘신동엽’을 다시 읽으며 신동엽 시선집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을 산 게 1989년께였다. 같은 출판사에서 낸 그의 시집 를 산 것도 그 어름이었을 게다. 지금 생각해도 참 바빴던 때였다. 날마다 회의였고, 늘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때였다. 에둘러 왔는데, 그의 시를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다. 89년에 학교를 떠났다가 94년에 경북 북부의 궁벽한 시골 중학교로 복직해 3학년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다가 신동엽을 다시 만났다. 교과서에 그의 아름다운 시 ‘산에 언덕에’가 실려 있었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 전공 서적에서 북으로 간 문인들의 이름을 “박○원(박태원), 임○(임화), 정○용(정지용)” 등과 같은 복자(伏字)로 배웠던 터여서 교과서에 박힌 그의 이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동이 일었던 .. 2020. 2. 21.
일제, 미성년 소년 소녀도 강제동원했다 [서평] 정혜경 지음 우리 대법원이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 일본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은 2018년 10월 30일이었다. 그로써 해방 직후부터 피해 보상을 요구해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가 무려 73년 만에 사법부의 판결로 확정되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권리 73년에 판결로 확정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2000년과 2005년에 각각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 1심과 항소심은 원고들의 패소로 끝났다. 어이없게도 한국법원이 한일협정을 근거로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한 피고인 일본기업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이는 2012년 5월 24일,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 2020. 1. 31.
소설과 삶 - 작가 ‘공선옥’ 읽기 소설가 공선옥,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넉넉하고 거짓 없는 시선 작가 공선옥에 관한 글을 한 편 쓰겠다고 결심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아마 소설집 2020. 1. 10.
노동시인 조영관과 임성용의 만남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첫 수혜자 임성용 시인 일전에 이웃 굴렁쇠 님의 블로그에서 임성용 시인을 처음 만났다. 이 나라의 열악한 노동 상황과 겹쳐지는 그의 시 “하늘 공장”의 울림이 다르게 다가왔다. 어저께 에서 시인의 수상 소식이 실린 기사를 읽었다. 한 시인이 독자와 만나는 과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첫 수혜자 임성용 시인 단신 기사로는 드물게 시인의 사진까지 실은 기사는 시인이 ‘조영관 문학창작기금’의 첫 수혜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조영관? 이름이 입에서 뱅뱅 돈다고 느끼지만 그건 착각이다. ‘서울 구로공단과 인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2007년 타계’했다는 시인의 이력은 낯설었다. 유고시집 책날개에 실린 시인 조영관(1957~2007)의 이력은 소략.. 2020. 1. 8.
보신탕집 떠나는 똥만이 마음은 어땠을까 [서평] 박상규 기자의 자전적 청소년 소설 어린이를 위한 시와 이야기를 각각 ‘아이 동(童)’자를 써서 동시, 동화라고 부르고 이를 ‘아동문학’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매우 고전적인 분류법이다. 문학의 예상 독자를 어른과 아이로 대별할 때 구획하는 전통적 범주의 분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상은 한갓진 문학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형식으로 변화해 왔고,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써 문학의 성격과 형식도 훨씬 다양해졌다.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독자를 어린이로만 한정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동화 가운데에는 어른들이 읽어도 무방한 작품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황선미의 동화 (2000)은 지금까지 150만 부가 넘게 팔려 ‘100쇄’를 기록한 작품이다. 올해에는 영문판 출간 한 달 만에.. 2019. 12. 20.
아이에게 ‘안중근 의사’를 알려주고 싶다면 [서평] 박도 지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잘 알려진 박도 작가가 어린이를 위한 책 을 사계절 출판사에서 펴냈다. 표지에 그려진 만화 일러스트가 책이 어린이용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정작 나는 ‘어린이용’은 어른들 책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었다. 안중근(1879~1910) 의사야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알고, 가장 좋아하는 독립운동가다. 그의 삶은 많은 책과 드라마, 영화, 그리고 뮤지컬 등으로 재구성되었고, 사람들은 짧지만 강렬한 그의 삶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는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하기 1년 전에 하얼빈에서 일제의 한국 침탈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 처단한 뒤,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 2019. 1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