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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자유와 혁명을 꿈꾼 로맨티시스트의 초상

by 낮달2018 2019.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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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돌베개, 2004)

▲ 허경진 지음 『허균 평전』(돌베개, 2004)

허균을 처음 만난 건 여느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홍길동전』을 배우면서였다. 세상을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 또는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이해하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화 형식으로 읽은 홍길동의 초인적 힘과 종횡무진의 활약상, ‘활빈도’가 주는 낭만적 매력 따위에 푹 빠지긴 했지만, 지은이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문학사적 평가를 외기에 바빠서 역시 저자를 의식하기는 쉽지 않았다. 허균(1569-1618)을 우리 중세를 살다 간 한 사람의 걸출한 작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대학에서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우리 문학을 가르치면서 비로소 홍길동이 적서차별이라는 중세적 세계관과 모순에 맞서 싸웠던 지은이 자신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허균은 당대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초당 허엽(1517~1580)이 아버지, 허성(1548~1612)과 허봉(1551~1588), 허난설헌(1563~1589)이 형과 누이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빵빵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당쟁에 따른 부침(浮沈)을 빼면 그는 비교적 수월하게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타고난 시적 재능 덕분에 품계도 승승장구한 편이었다.

 

열일곱에 한성부 초시에 합격한 이래, 스물여섯에 문과에 급제했다. 3년 후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된 이후 출사와 파직을 거듭하던 그는 마흔한 살에 당상관(형조참의)에 올랐다. 그가 당대의 서얼들과 각별히 교유하며 적서차별의 계급 모순에 저항해야 할 이유나 동기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셈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이다. 그 완고한 중세 봉건사회를 살던, 이 명문거족 출신의 선비는 『홍길동전』을 쓰고, 서얼(庶孼)의 무리와 함께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그런 단편적 기록만으로도 그의 생애는 극적이고 매력적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책에서도 나는 그가 꾀한 반역과 처형에 관한 세부적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더 궁금하고 흥미롭다. 허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글 전용주의자 허경진 교수가 쓴 『허균 평전』의 부제는 ‘시대를 거역한 격정과 파란의 생애’다.

▲ 전주에서 간행한 방각본 <홍길동전>. 국립도서관 소장

허균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형식의 이 책은 그러나, 그의 생애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그것이 평전(評傳)의 기술(記述)적 특징 탓인지, 빈번하게 인용되는 그의 한시나 저자의 논평 탓인지는 애매하다.

 

평전의 역사가 짧은 우리의 전통을 고려할 때, 저자의 시선은 비교적 냉정해 보인다. 허균이 ‘호민론(豪民論)’이나 ‘유재론(遺才論)’ 같은 글을 지어 서얼 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민중 봉기를 경고한, 진보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긴 했지만, 다소간 경박하고 분방했던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와 막역한 교우를 유지했던 스승, 선배, 벗이 아닌 일반인들의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당파를 달리하는 경쟁 관계에 있었던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실록이나 상소, 계 등에서 ‘성품이 경박하고 품행이 무절제하다.’, ‘요사스럽다’는 평가가 줄을 이은 것은 파당에 따른 폄하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심상치 않다.

 

그러나 양반들로부터 받은, ‘미천한 자까지도 자기와 대등한 자처럼 대우했다’는 평가는 지배층에는 경박한 패륜으로 보였겠지만,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인식되었다는 증거로 이해할 수 있겠다.

 

저자는 허균을 혁명가로 보고 있지만, 나는 그를 혁명적 낭만주의자쯤으로 이해하고 싶다. 빈번한 서얼과의 교유, 홍길동전과 호민론·유재론 등의 저술에 드러난 세계관과 민중관, 시대를 앞서간 정치적·외교적 감각 등이, 필경 중세 조선 사회를 혁명 직전의 상황으로 만들어 가긴 했다. 그러나 남은 자료만으로 그가 꿈꾸던 세상의 모습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출사와 파직을 거듭하면서 펴지 못했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정권에 도전했다는 혐의가 짙어 보인다.

▲ 교산 허균 영정. 강릉시 허균 생가터
▲ 교산 시비. 1983년,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세워져 있다.

혁명을 전후한 저간의 정황들을 일별해 보면, 마치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노회한 정치가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이려 했는가 하면, 이이첨 등의 권신의 무리와 정치적 동사(同事)를 서슴지 않았고, 도성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실패한 거사의 내용도 뚜렷하지 않으며, 거사 이후를 그린 정치·사회적 전망도 모호하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의 동지들의 모습이나, 동조자들의 행동은 혁명의 진정성을 환기하면서 묘한 감동을 연출한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자백을 거부한 이들, 허균이 하옥되자 심문을 제대로 못 하도록 돌을 던져 국청의 문짝을 깨뜨리거나 형졸의 머리를 깨뜨리고, 하급 아전과 종들, 그리고 무사들 수십 명이 의금부 감옥 앞에 시위를 벌이는 모습 등은 당대의 모순을 고스란히 짐질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좌절과 절망을 아프게 보여주는 것이다.

 

허균은 심문에 끝내 승복하지 않아서 마지막 판결문인 결안(結案)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저잣거리에서 목이 떨어졌고, 그의 머리는 시장 바닥에 전시되었다. 막대 셋을 밧줄로 매고 ‘역적 허균’이라는 팻말을 달아 그 막대 가운데에 목을 매달았다. 그는 역적으로 죽었기에 연좌적몰(連坐籍沒)의 법을 시행했으며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되었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장사 지내기 위해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수직(守直) 군사와 충돌하기도 했다 한다.

 

허균은 자신의 글이 당할 운명을 저어했음인지, 잡혀 들어가기 전날 밤, 7년 전 유배지에서 스스로 엮은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초본을 외손자의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역신으로 죽어 그의 글까지도 죽어야 했다. 남은 글들도 감추어졌다. [관련 글 : 역적허균, 목이 떨어져 저자 바닥에 내걸렸다]

 

그러나 400여 년이 흐른 오늘, 그의 이름은 뒷날, 그를 비난해 마지않았던 또 한 사람의 이단자, 연암 박지원과 함께 뭇 사람들에게,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혹은 한 시대의 풍운아로 오래 기려지고 있다. 

 

 

 2005. 11. 17. 낮달

 

 

▶  덧붙임 

애당초 나는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쓴 ‘허균의 생각’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때가 늦었던 모양이다. 그 책은 이미 절판되었다. 어디 헌책방이라도 뒤져 선생의 책을 반드시 구해 볼 작정이다. 허균의 누이인 난설헌 평전도 읽으려 한다. 산업화 시대의 이데올로기로서 박정희 정권은 신사임당이라는 여성의 전형이 필요했던 듯하다. 그 신사임당의 반대편에 선, 불운한 시인 허초희의 삶은 그의 동생 허균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관련 글 : 다시 난설헌을 생각한다]

 

▲ 박혜숙, 허난설헌(건국대학교출판부, 2004)

지난 해, 건국대의 박혜숙 교수가 쓴 『허난설헌』(건국대 출판부, 2004)를 읽었다. 연대기적 서술이었던 듯한데 전체적으로 밋밋한 체제와 기술이어서 단지 ‘읽었다’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았다.

 

김신명숙이 쓴 소설 『허난설헌』도 흥미롭긴 하지만 읽지는 않았다. 김탁환이 쓴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도 있으나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역시 이이화 선생의 책으로 가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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