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잭 런던 단편집 <불을 지피다>
잭 런던 소설집 <불을 지피다>(한겨레출판, 2012)를 완독했다. 책의 속표지에는 ‘130125’라는 날짜 아래 내 서명이 있다. 금년 1월 25일에 구입했다는 표시니 결국 이 책은, 산 지 반년이 넘어서야 온전히 ‘주인의 책’이 된 셈이다. 요즘 내 책읽기의 모양새가 그렇다. 사놓고도 하염없이 묵히다가 끝내는 서가 한쪽에 처박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내가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을 만난 건 90년대 초반이다. 장편소설 <강철군화(The Iron Heel)>(한울, 1990)[관련 글 : 강철 군화, 독점 자본주의의 미래]를 읽고 나는 이 작가에 잔뜩 매료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다이제스트 판으로 읽은 <황야의 부르짖음>(원제 야성의 부름)을 쓴 아동문학 작가가 독점 자본주의의 미래를 그처럼 흥미진진하고 극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로웠던 것이다. 아이들이 즐겨 읽는 동물소설과 탁월한 사회주의 소설 사이의 간극은 잭 런던에 대한 <대영백과사전>의 서술에 그대로 녹아 있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처절한 투쟁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작가’
‘돈을 벌기 위해서 쓴 낭만소설과 사회주의자로서 이념을 위해 쓴 사회주의 소설로 날카롭게 양분되는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
‘미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며 스스로 계급투쟁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말년에도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 작가로 영원히 추앙을 받은 작가’
<강철군화>의 감동과 여운은 그의 자전적 장편소설 <마틴 에덴>(한울, 1991)을 내처 읽을 수밖에 없게 했다. 나는 그의 삶과 문학에 만만치 않은 흥미를 느꼈지만, 다른 작품으로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아마 1990년대만 해도 그는 나라 안에 그리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회과학 도서 전문 출판사인 ‘한울’이 아니었다면 <강철군화>와 잭 런던을 만나는 것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나는 잭 런던을 제대로 알지 못했나 보다. 그의 소설집 <불을 지피다>를 읽으면서 나는 그가 마흔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긴 작품 목록이 생각보다 훨씬 두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철군화>(1908)와 <마틴 에덴>(1909) 외에도 <비포 아담>(1907), <버닝 데이라이트>(1910), <달의 계곡>(1913) 등 무려 19편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그의 작품 목록에는 500여 편의 논픽션도 포함된다. 그는 저널리스트로 런던의 빈민가를 취재한 르포문학의 고전 <심연의 사람들>(1903)을 썼고, 러일전쟁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멕시코 혁명을 취재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또 200여 편의 단편소설을 썼는데 300여 편의 단편을 남긴 미국 최고의 단편작가(short story writter)로 불리는 오 헨리와 견줄 만하다. 그는 전 세계에 가장 많이 번역 출간된 미국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들은 8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평단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잭 런던이 미국 문학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이유다.
사생아로 태어나 제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글쓰기를 깨쳤던 그는 하루에 ‘1,000단어’씩 쓴다는 원칙을 지키려 했다고 한다. 그의 두터운 작품목록은 작품의 원천이 된 작가의 체험(통조림 공장 노동자, 굴 양식장 해적, 해적 감시 순찰대원, 원양어선 선원, 부랑자 생활 등)과 이러한 원칙에 힘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을 지피다>는 그의 단편 11편이 실려 있다. 책은 성격에 따라 제1부(사회적인 이야기), 제2부(우화적인 이야기), 제3부(클론다이크 이야기)로 나뉜다.
<강철군화>에 가려진 11편의 단편소설
1부는 늙은 권투선수의 비애를 담은 ‘스테이크 한 장’, 작가 자신이 경험했던 혹독한 소년 노동을 다룬 ‘배교자’,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주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나고’, 혁명을 꿈꾸는 청년의 이야기 ‘멕시칸’ 등 말 그대로 사회성 짙은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 속에는 <강철군화>에서 보여준 사회주의 작가로서 삶과 현실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2부는 두 명의 도둑이 보석을 크게 털고, 서로 속이다가 서로 속는 이야기 ‘그냥 고기’를 비롯하여 작가 자신이 매우 아꼈다는 ‘전쟁’, 극한 상황에서 약자를 식인(食人)의 희생물로 삼았던 실화를 재구성한 ‘프란시스 스페이트 호(號)’, 자본주의의 폐단과 지식인의 곡학아세를 비판하고 있는 ‘강자의 힘’을 담았다. 모두 인간의 탐욕과 잔인성, 비굴 따위를 냉혹한 서술을 통해 보여주는 우화적 작품들이다.
3부 클론다이크 이야기는 19세기말 골드러시를 이룬 클론다이크 강 유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늙고 병든 에스키모 노인의 죽음을 다룬 ‘생의 법칙’, 북극의 극한 추위 속의 한 인간의 사투를 다루고 있는 ‘불을 지피다’, 늑대의 피까지 먹으면서 살고자 했던 인간의 집념을 다룬 ‘생에의 애착’들이다. 북극 부근의 혹한을 배경으로 한 이들 작품은 기왕에 그가 쓴 동물소설들의 배경을 공유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런던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가 천부의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그는 삶의 어떤 한 장면을 끈질기게, 그리고 냉정하게 묘사하면서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삶의 진실을 넌지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삶의 이면에 대한 세부적 묘사는 그러한 삶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문학 작품이 ‘작가의 체험과 상상력’의 행복한 만남이라는 사실을 그는 소설의 디테일을 통해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경기 상대는 물론 허기와 싸워야 하는 <스테이크 한 장>의 늙다리 복서, 끔찍한 노동에 시달리며 ‘기계’가 되어 버린 <배교자>의 어린 노동자는 11살부터 노동을 시작하여 스스로를 ‘일 짐승(Work Beast)’이었다고 회고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거기서 다루어지는 가난과 소년 노동은 장식이 아니라 실존적 삶이다. 이 21세기 독자의 등허리를 서늘하게 만들 만큼.
잭 런던의 소설을 잘 읽힌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냉정한 시선이 매우 건조하고 정밀한 묘사를 통해 드러나면서 만만치 않은 리얼리티로 다가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을 마저 읽고 나서 이게 20세기 벽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소설이라는 사실이 좀 믿기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를 두루뭉술하게 해서가 아니라 이 소설집에 수록된 11편의 단편 가운데 이른바 ‘태작(駄作)’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작품들이 일정한 수준을 넉넉하게 확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흥미로운 평가
흥미로운 점은 권말에 실린 <1984년>의 작가 조지 오웰의 서평이다. 1946년 영국에서 간행된 잭 런던의 단편집에 실린 글인데 조지 오웰은 이 비평적 서문을 통해 잭 런던의 문학을 평가한다. 레닌의 투병 시절에 그의 아내가 런던의 단편 ‘생에의 애착’을 읽어주곤 했다는 일화로 글을 시작한 오웰은 런던의 문학에 독특한 관점으로 접근한다.
오웰은 런던이 ‘냉혹성을 묘사하는 뛰어난 작가’라고 하면서도 ‘작품의 질이 고르지 못’하고 <강철군화>도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강철군화>는 ‘시간과 공간의 설정이 허황하’고 ‘혁명이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면서도 ‘지배 계급의 속성에 대한 런던의 이해가 상당히 깊었’음은 인정한다.
오웰은 런던이 ‘작가로선 드문 모험가이자 활동가였다’면서 ‘어린 시절 겪었던 비참함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피착취계급에 대한 의리를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의 단편들이 이룬 성취를 말하면서 오웰은 런던의 ‘큰 주제의 하나는 자연의 냉혹함’이라고 규정하고 ‘그냥 고기’를 최고작으로, ‘프란시스 스페이트 호’와 ‘스테이크 한 장’을 높이 평가했다.
오웰은 런던의 ‘탁월한 단편’들이 <강철군화>의 명성에 가려서 잊혀졌다고 말하는데, <불을 지피다>에 실린 단편은 오웰의 서문을 실은 책의 작품과 7편이 겹친다. 따라서 런던의 단편을 읽는 것으로도 오웰이 말한 것처럼 ‘마흔 살의 짧은 인생치고는 괜찮은 성취’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오웰(1903~1950)은 잭 런던(1876~1916)보다는 한 세대 뒤의 작가다. 나는 잭 런던에 대한 그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런던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에 작가로서의 질투 비슷한 감정이 묻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할 만큼.
2013년, 현재형의 '노자 대립'
오웰은 <동물농장>과 <1984년>을 통해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풍자하고 암울한 ‘디스토피아(Dystopia)’의 세계를 예언한 탁월한 작가다. 마찬가지로 잭 런던은 독점재벌(트러스트)이 산업과 행정·입법·사법 등 국가기구는 물론 언론·학교·교회까지 완전 장악하는 ‘과두 지배체제(강철군화)’를 통해 독점자본주의의 미래를 불길하게 예언했던 작가인 것이다.
“두 사람이 똑같은 것에서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전부를 얻으려고 들 때,거기에는 이해의 대립이 존재합니다.그것이 노동과 자본 간의 이해의 대립입니다.”
- <강철군화>(한울, 1990) 46쪽 중에서
<강철군화> 이후 100년이 지났다. 그러나 주인공 어니스트 에버하드가 지적한 ‘노동과 자본 간의 이해의 대립’이라는 명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2013년 현재, 이 노자의 대립은 한국에서 여전히 현재형이다. ‘경제 민주화’를 내걸고 국민적 지지를 획득한 권력은 그 과실만 챙기고 다시 자본의 힘에 기대려 한다. 법을 간단히 뛰어넘는 자본의 절대적 힘 앞에서 노동은 ‘고공농성’과 ‘희망버스’로 드러난 시민들의 지지로 힘겹게 싸우고 있다. 이 땅에서 잭 런던이 읽혀야 이유는 차고 넘치는 것이다.
2013. 8.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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